상단영역

본문영역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서 흑룡강黑龍江을 일본어로 번역해 보자. ‘ 고쿠류고!!! ’ (Kokuryūkō) 이것은 ‘바이든날리면’으로 들리지 않는다. 고구리(려)高句驪 의 驪 는 ‘가라(검은= 黑)말 (黑馬)’.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43)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3.12 19:41
  • 수정 2023.03.13 13:5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들어가는 말

1) 코리아의 역사를 차이나 대륙에서 찾을 때 중요한 지명이 발()와 갈()이다

 

2) 사마천이 사기에서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발해를 건너 조선 왕험을 점령하고 5제후국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로부터 약 200년 후인 반고의 한서는 조선에 낙랑·진번·임둔·현도 4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했다. ‘사기이후 약 400년 이후에 나온 많은 역사서들이 조선 왕험이 낙랑군 조선현이고, 고구리() 평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왕험 = 낙랑군 조선현 = 고구리() 평양, 과연 조선 왕험고구리() 평양인가?

 

3) 많은 연구자들이 발해갈석을 찾고 있다.

 

4) ‘사기에서 확실히 기록한 것중 기억할 것들이 몇가지 있다.

한나라 육군은 요동에서 출발한 요동의 병사들이었다. 이 때의 요동은 어디인가?

한나라 수군은 ()에서 출발한 제나라 병사들로 발해를 건넌 것이 아니라(()) 떠 갔다.(()) 이 때의 제는 어디인가?

 

5) 19세기 증기선이 나오기 전까지 대규모로 수십척 이상의 배가 황해를 건너 차이나에서 코리아로 넘어오는 경우는 없었으며, 모든 추정기록은 일제와 부일 사이비 역사학자들이 지어낸 공상과학만화다.

 

6) 발해는 차이나 대륙 내에 있는 호수나 강이다.

 

2. 한나라 역사 요약

1) 차이나의 역사는 정권을 장악한 어떤 지배 민족 혹은 세력들이 다수의 피지배 민족, 부족, 세력들을 지배하다가 정권을 빼앗긴 기록이다. 정권을 잡으면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天子(천자) 라고 자칭했는데, 처음으로 인간의 후손임을 나타낸 왕조의 창시자가 한나라 고조 유방이다.

 

기원전 200년 경 한나라 고조 유방은 간신히 진나라와 항우를 누르고 정권을 잡았으나 집권기간 내내 흉노의 식민지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다.

 

2) 기원전 130년경 집권한 한나라 무제는 50여년 집권기간 중 최대의 난적 흉노를 제압하고 그 다음 난적 동이계 조선을 제압했다.

 

3) 한나라는 철저한 중앙집권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차이나의 모든 다른 왕조도 마찬가지였다.

 

유씨 일가를 지방으로 보내어 왕이라 칭하면서 지방을 장악하게 했으나 이도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지방정권의 반발과 쿠데타 모의로 불안정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기원전후 왕망에 의해 전한(서한)은 멸망하고 짧은 20년 가까운 기간의 나라가 들어섰다. ‘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나라가 후한(동한)이며 후한 역시 100여년이 지나면서 지방정권의 반발과 황건적의 난과 같은 민란의 연속으로 결국 문을 닫는다. 위촉오 삼국 시대를 거치고 를 이은 서진이 잠시 집권하는 듯 했으나 기원후 400년 전후하여 선비족 북위 등에 의해 남쪽으로 쫓겨 가면서 동진’ (남쪽으로 물러남을 숨기기 위해 진이라고 한 것 같다) 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황하 이서, 이북 이른바 태행산맥 동·서쪽지역(화북평원)516국 시대를 거쳐 수나라가 통일한다.

 

3. 한서(지리지)에 나오는 코리아와 관련된 주···기록

1) 기원후 100년경 반고가 편찬한 한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거의 베껴 왔으며, ‘사기가 기록하지 못한 사마천 이후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코리아와 관련된 부분만 집중적으로 살펴 보자.

 

한서는 제기(帝紀) 12, () 8, () 10, 열전 70권으로 전 100권 이다. 이중 제28권이 지리지로 상, 하로 나뉘어 있다. 103개 군을 수록했다. 짤막한 소개와 현 이름이 들어있다.

 

2) 한서지리지 시작을 보자.

누런임금 황제가 백리 단위로 마을을 일만개 만들었다. 순임금이 12주로 나누었다. 우공9주 외 병주, 유주, 영주 합계 12주다 (안사고 주석). 우공이 다시 9주로 만들었다.”

우공의 9주 소개가 나온다. 첫 번째 기주가 나온다. ‘갈석碣石이 처음 나온다. 갈석은 한4군의 위치와 관련하여 항상 등장한다. 갈석은 발해와 같이 고대 차이나에서 조선의 위치설명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지명이다.

 

3) 한서지리지는 13주를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어느 군이 어느 주에 속하는지 정확하게 표현해 놓지 않고 있다. 후대에 몇 번이나 고쳐졌음을 위키백과 등에서 계속 업데이트 하면서 전한 초기의 13주 소속군과 후한시대의 13주 소속군을 비교해해 보아야 한다. 현재 작업 중이다.

 

4) 한서지리지 28, 29번 문장이다. 이는 필자가 참조하는 차이나 사이트

国学导航漢書 - 漢書卷二十八上  地理志第八上 본문에 임의로 번호를 매긴 것이다. http://www.guoxue123.com/shibu/0101/01hsyz/037.htm

 

4-1) 한무제가 북쪽으로 와 남쪽으로 을 제압하고 교지 주와 삭방 주를 두어 모두 13주에 자사를 두었다.

漢興因秦制度崇恩德行簡易以撫海內

至武帝 攘卻() 開地斥境南置交阯北置朔方之州,〔兼 徐并夏周之制改 雍曰涼改 梁曰益十三)〔〕,置 刺史

 

先王之跡既遠地名又數改易,〔是以采獲舊聞考跡詩書推表山川以綴禹貢周官春秋下 及 戰國漢焉。〔

 

4-2) 첫 번째 군은 경조윤京兆尹 이다. 비유하면 서울특별시이다. 인구가 약 68만이라 하니 매우 큰 도시이다. 현이 12개가 있다.

 

첫 번째가 장안長安 현이다. 익히 알고 있는 그 장안이다.

 

두 번째가 신풍新豐현이다. 새로운 풍현이다.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의 고향이 서주 패현 풍읍이다. 지금의 강소성 서주시이다.

 

중요한 것은 신풍현이 여산驪山의 남쪽에 있고 옛날에 여융의 나라驪戎國였다는 것이다. 진시황은 죽고 여산 기슭에 묻혔다. 진시황릉이 서안시 동북쪽으로 약 35떨어진 임동(臨潼) 여산(驪山) 북쪽 기슭에 위치한다. 여산은 아지 그대로인데 신풍현에 살았던 여융족은 어디로 갔을까?

 

사기 주본기에 위기에 몰린 주문왕 (은나라를 이긴 주 무왕의 아버지) 가 은나라 임금에게 갖다 바친 뇌물이 천하의 명마 여융의 말이었다.

()왕이 이에 서백(주문왕)을 유리(羑里)에 있는 감옥에 가뒀다. 굉요(閎夭) 등의 무리가 이를 걱정하였다. 이에 유신씨(有莘氏)의 미녀와 여융(驪戎)의 준마驪戎之文馬와 유웅(有熊)의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 아홉 대를 다른 기이한 물건들과 함께 주왕의 총애하는 신하 비중(費仲)을 통해 주()왕에게 바쳤다. (사기 주본기. 스윙, https://m.blog.naver.com/swings81/221792374001 )

 

京兆尹 元始二年戶十九萬五千七百二口六十八萬二千四百六十八。〔

縣十二

1)長安

2)新豐驪山在南驪戎國秦曰驪邑高祖七年置。〔

3)船司空 4)藍田 , 5)華陰 , 6)7)8)下邽()9)南陵10)奉明11)霸陵12) 杜陵

 

4-3) 차이나가 주위의 외국을 낮춰 부르는 말이 있다.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다.

서쪽의 외국을 모두 융이라 불렀다. ‘중에 하나가 려융인데 高句고구려의 이다. 려는 + 이다.

 

려융!= 서융.

 

고구리()는 서쪽에서 온 것이 아닐까?

 

전 서울대 교수 박창범은 고구리()의 천문관측지=서울·수도는 몽고지역 즉 지금의 서안시 기준 서북쪽임을 밝힌 바 있다. 필자는 그 가능성을 弱水(약수)를 근거로 제시한 바 있다.

 

[ “후한서, 삼국지 위서, 진서의 부여조. 세 역사서를 공통하는 것은 현도의 북쪽에 부여가 있고 부여의 북쪽에 약수 (弱水)가 있다. 그 약수는 지금 고비사막 남쪽 차이나 감숙성과 몽고 국경사이에 있다.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37)”

미디어피아 이원환 전문 기자 입력 2023.02.12.

http://www.mediapia.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848 ]

 

4-4) 가라말 리()’ 라고 읽는다. ‘가라말흑마를 말한다. ()가라라고 읽은 것이다.

 

가라= ()’구루뭔가 비슷하지 않은가? *‘구루溝漊가 고구려 말로 ()이라고 한다. (후한서 등 부록참조).

 

살던 고을, 마을, 성을 나라 이름으로 혹은 성씨로 사용하던 시대였으므로

구루溝漊 는 구리()句麗· 임에 틀림 없다.

후한서는 구려를 쓰고 삼국지 위서북사 고구려는 구려를 쓴다.

 

4-5)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흑룡강黑龍江을 일본어로 번역해 보았다. 일본어로 검을 흑구로임으로 구로 뭐가 나올 줄 알았다. 구글 번역기에서 나온 발음은 충격이었다. ‘고쿠류고!’ 아마 귀를 의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이든날리면이 아니다.

가라 = 구루溝漊 = 구로 = =くろい (구로이 현대 일본어). 발음이 매우 비슷하다.

(계속)

 

* 부록 1

* 부록 2 구루溝漊= ()

 

삼국지(三國志) > 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 > 고구려(高句麗) > 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樂工

 

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樂工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玄菟郡에 나아가 [한나라의] 朝服衣幘을 받아갔는데, [현도군의] 高句麗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玄菟]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상에 작은 을 쌓고서 朝服衣幘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망건 책) 溝漊라 부른다. 溝漊[]구려 사람들이 을 부르는 말이다.

三國志 > 魏書 30 東夷傳 > 高句麗 > 漢時賜鼓吹技人, 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

 

漢時賜鼓吹技人, 常從玄菟郡 受 朝服衣幘, 高句麗 令主 其名籍. (元本, 令主, 作今王, . )

 

後稍驕恣, 不復詣郡, (元本, , 作諸, .)

 

于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時來取之,

 

今胡 猶名此城 爲 幘溝漊 溝漊者, 句麗名城也.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