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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삼국지 위서, 진서의 부여조. 세 역사서를 공통하는 것은 현도의 북쪽에 부여가 있고 부여의 북쪽에 약수 (弱水)가 있다. 그 약수는 지금 고비사막 남쪽 차이나 감숙성과 몽고 국경사이에 있다.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37)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2.12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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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모든 역사책들이 원래 편찬된 때 그대로 전해져 왔다는 보장은 절대없다.

 

北史(북사)’ 백제조는 索離國 [‘나라]에서 남으로 엄수와 대()수를 건너온 동명은 부여의 왕이 되었다. 동명의 후손 구태仇台가 대방고지帶方故地에 만든 나라가 백제라고 기록하고 있다.

 

北史(북사)’ 고구리()조는 高句麗는 그 先祖夫餘에서 나왔다. (중략) 朱蒙은 이에 焉違 등 두 사람과 함께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중략) 朱蒙과 함께 紇升骨城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高句麗라 하고 인하여 高氏라 하였다. ” 라고 기록하고 있다. 북사를 기록한 편찬자의 입장에서 부여와 고구려는 서북쪽에 있었던 것이다!!!

 

이번 시리즈는 사마천 사기등 차이나 사서에서 동이족 내지 한민족의 근거지를 차이나 황하 유역 등에서 찾고자 시작한 것이다.

 

고구리()는 처음 황하유역 기준으로 동북쪽인 차이나 동북3(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 등이 아니라 서북쪽에서 왔을까?

 

2. 후한서 부여조, 삼국지 위서 부여조, 진서 사이 부여조. 세 역사서를 공통하는 것은 현도의 북쪽에 부여가 있고 부여의 북쪽에 약수 (弱水)가 있다는 것이다. (이원환 후한서 삼국지 진서 모두 부여 북쪽에 약수가 있다고 했다. 약수는 어디에 있는 강인가?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5) 이원환, 2022.11.21., 미디어피아)

 

1) 바이두 ( 百度(백도) : 차이나의 네이버)로 약수를 찾아 보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弱水 는 현재도 존재했고, 黑水(흑수) 와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구글어스로 弱水를 검색하고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弱水, 구글어스 명칭으로 Ruoshui River 가 떡하니 있었고, 이는 몽고의 Ejina (Emune) Gaole 과 연결되어 있었다. 차이나 말 약수에서 몽고말 에진(에문) 가올이 된 것이다. 가올은 () 인 듯 하다. 차이니즈로 额济纳 河로 쓰는 것 같다. Gaole (가올)이 강의 뜻도 있지만 고을 (마을)의 뜻도 있다면 에진가올 은 여진골로 연결될 수도 있다! 여진족의 무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연구가 많이 필요한 부분이다.

 

2) 현대의 약수 (흑수)가 후한서, 삼국지, 진서가 편찬되었을 때의 약수(흑수)인가 ?

 

이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부여가 만주 흑룡강 성에 있는 것으로 배워 온 한국 사람들은 단순히 글자가 같을 뿐이라고 넘겨 버릴 것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약수 (흑수)가 과거 즉 기원후 5세기까지는 지금의 서안과 좀 더 가까운 거리까지 흘렀다고 가정한다면 지금의 약수(흑수)가 위 세 역사서 상의 약수와 같은 강이 아니라고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다.

 

차이나 역사서 만으로 한민족 (조선, 동이)의 역사 주무대가 한반도가 아니라 차이나 대륙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증명하고 넘치기 때문이다.

 

3. 최남선의 1930년 기록

1) ‘朝鮮[조선]神話[신화]日本[일본]神話[신화]’ 라는 글에서 최남선은 고구려() 역시 서북쪽에서 시작하여 남, 동남, 동으로 이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쉽게도 李奎報[이규보]<東明王篇[동명왕편]>에는 韻文[운문] 중에서는 남으로 향하였다고 하고 산문 脚註[각주]에서는 서쪽에서 왔다고 한 바와 같이,” 라는 부분중 산문 脚註[각주]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다빈치 맵.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4729&Lang=%ED%95%9C%EA%B8%80&Page=1 )

 

53

그리고 또 하나 天帝子[천제자]解慕漱[해모수]의 아들 朱蒙[주몽]은 그 모국 부여에서 용납되지 아니하여 가만히 出奔[출분]하여 남쪽으로 향하여 淹㴲水[엄사수]를 건너서 卒本[졸본][]에 새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三國史記[삼국사기]> 이하의 많은 기록의 文面[문면]입니다마는,

 

朱蒙[주몽]新國[신국]에의 進取線[진취선]은 어떤 방향이었을까요.

 

<三國史記[삼국사기]> 등에는 이 방향의 표시가 없고,

 

<梁書[양서]>에는 남방이라 했고,

 

支那[지나] 문헌중에서 고구려의 고사를 전한 가장 상세한 <後漢書[후한서]>에는 동남이라 했고,

 

이에 관해서 조선측의 가장 오랜, 가장 상세한 기록인 李奎報[이규보]<東明王篇[동명왕편]>에는

 

韻文[운문] 중에서는 남으로 향하였다고 하고

 

산문 脚註[각주]에서는 서쪽에서 왔다고 한 바와 같이,

 

동남동으로 되어 諸書[제서]指示[지시]가 일정하지는 아니하나, 대체의 의미를 음미해 보면 역시 동방에의 방향을 표시하고 있음을 간취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나라의 기반이 되었다는 淹㴲水[엄사수]에는 盖斯[개사]라는 한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東明王篇[동명왕편]><三國史記[삼국사기]>등이 다 전하고 있으니, 그 유역에는가이시[]이라는 이름이 있었으리라는 것쯤은 능히 想定[상정]할 수 있는 바입니다.

 

요컨대 仲牟[중모]의 고구려 건국도 史記[사기]는 어떻든 전설상으로는 역시 동쪽 즉가시하라에 진출하였으리라고 인정되는 바입니다.

 

2) 전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 박창범은 고구려의 최적 천문관측지가 내몽고 지역임을 밝힌 바 있다.

 

고구려의 일식 관측이 주로 행해졌던 곳은 두 군데다. 한 곳은 만주평야에서도 북서쪽으로 위쪽이다. 이곳만 하더라도 지금의 주류 역사학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있다. 이 지도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 북서쪽으로, 바이칼호수도 지나서 지금의 몽골과 카자흐스탄 접경 지역까지 고구려의 세력 범위였다고 말한다.” ( 주간조선 2020.5.19. 이진아 씀)

 

4. 최춘태 박사와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토곡(). 지금의 차이나 청해성, 감숙성.

 

2017갑골음으로 잡는 식민사학 동북공정이라는 책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최춘태 박사는

 

202292일에 게시한 그의 유튜브 채널 '식민사학 동북공정' 저자 최춘태 박사가 음운학으로 증명한 고구려 국경 遼水(요수), 浿水(패수). 지금의 遼河는 옛 遼水가 아니다.’ (갑골음으로 증명한 고구려 국경시리즈 3)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황하에서 더 서쪽으로 가야 고구려가 나온다. 난하 일대라고 했음을 정정한다. 초기갑골음을 연구하면 (연대를) 더 올라가면 황하의 서쪽이 본래의 고구려다. 고대로 갈수록 소금과 철이 중요하다. 차이나 청해성에 있는 청해호가 토곡()혼이다.

 

夫餘(부여)의 부夫餘다스리다.’의 뜻이 있고 여소금을 말하기도 함으로 夫餘 소금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부여를 순유淳維 라고 쓰기도 했다. ()은 소금기가 있어 척박하다는 뜻이 있다. ()는 땅이라는 뜻이 있다. 순유는 소금땅이다. 부여가 소금땅인데 청해성에 있었다. 청해성의 청해호는 염호(소금호). 광개토왕비에 토곡()혼 순찰기사가 나온다. 이 지방을 모두 갑골음으로 조사하면 고구려는 지금의 감숙성, 청해성에서 차이나 대륙으로 왔음을 증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최춘태 박사를 응원한다!!!

 

참고로 다음 기사를 보자. “ 광개토태왕!티벳(토욕혼)까지 정벌하였다! 다물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광개토태왕의 정벌루트를 추적한다.” [윤복현 , 국민뉴스, 2010/11/17]

(전략)

광개토태왕비문의 기록을 보자!8년은 무술년이었다. 정예부대를 백신(숙신)과 토욕에 보내어 동정을 살피고 막구라성과 가태라곡을 쉽게 차지하여 그 곳의 남녀 300여명을 포로로 잡아 왔다. 그들은 이 때부터 조공을 바쳐 오게 되었다. 八年戊戌 敎遣偏師觀帛愼土谷 因便抄得 莫0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口事廣開土王碑文 永樂八年條

 

백신과 토욕의 정확한 위치는 사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으나, 백신은 숙신을 지칭한 것이다. 숙신은 고구려 서천태왕 11(A.D 280) 10월에 고구려의 변경을 침범하였다가 달가의 역습을 받아 추장이 죽고 단로성이 점령당하여 6-7개소의 부락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 후 영락 8(A.D 398)에 고구려가 정벌한 백신은 동부여의 동쪽인 연해주 방면이다.

 

그리고 토욕(土谷)[위서(魏書) 토욕혼전(吐谷渾傳)]에 나오는 토욕혼(吐谷渾)을 지칭한 것이다. 이 토욕혼은 선비족 모용외의 일파였는데, A.D 4세기 초에 시조 토욕혼이 이복동생인 모용외와 사이가 벌어져서 모용외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서쪽으로 이동하였는데, 광개토태왕이 토욕혼을 정벌한 A.D 398년경에는 북위의 서쪽인 감숙성, 청해성 방면인 티벳지역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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