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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시』 ‘청춘예찬’ (12)

윤한로 시인
  • 입력 2023.01.0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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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시로 엮은, 내 시를 삶으로 엮은

2부 청춘예찬 12

 

떨어지고 나니까 깨지고 나니까

시가 쓰고 싶었다

인생은 가슴 뭉클 더 깊어졌다

그렇구나, 시인이 굳이

대학에 가야만 하는가

펜대를 굴려야만 하는가

비를 노래하고 바람을 노래하면 그뿐

개똥 골목길 나무를 노래하고

새를 노래하면 그뿐

꾀죄죄한 절망과 희망 하냥 사랑하고

또 미워하면 됐지

싸구려 츄리닝 속

허여멀건 멀대 목 파묻으면 됐지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졌으면 됐지

긴긴밤 와룡생 무협지도 끝이 났어라

밀려오는 대미의 진한 허무

씹고 또 씹었으면 됐지

삼선쓰레빠 찍찍 끌명

복개천 속 끈적한 그리움 찾아

귀 기울여 속삭이고 속삭이면 됐지, 흐흐흐

담배 피우는 고삐리들 만화방 모퉁이 굽돌아

그 꿀꿀함에 절고 또 절었으면 됐지

별에 찌들고 안개에 찌들고

개버즘 넓적한 잎

지린내에 쩌들었으면 됐지

망치고 나니까 청춘 다 잡치고 나니까

조지고 나니까 인생은, 이름은

외려 깊어졌더라 눈부시더라

찌그러진 봉고의 저, 빛나는 범퍼처럼

 

발가락이 닮았다

 

아들아

나는 네가 공부 못 하는 게

재수, 삼수 공부하고 공부해도

대학에 계속 떨어지는 게

너무 좋다 그래야 네가 나중

땀 흘려 몸으로 벌어먹고

피로 벌어먹고 살지

그래야만 어디에서 또 누군가

머리로 벌어먹고

입으로, 눈으로도 벌어먹지

하다못해 마음으로라도

벌어먹고 살 게 아니냐

아들아

그래 나는 네가 골통이라도

오히려 기쁘다 우리 머릴 닮지 않고

발가락을 닮았으니

전혀 아프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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