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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집콕, '현대 시' 한 편 어떠세요?

이운주 전문 기자
  • 입력 2021.02.13 22:18
  • 수정 2021.02.13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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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시인 '일찌기 나는'

출처: YES 24 

   벌써 일 년째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로 인해 뗄래야 뗄 수 없는 '집콕'. 넷플릭스엔 볼 영화가 없고 티비엔 이미 모두 시청한 재방송만 나오고 있다면? 집순이, 집돌이의 각종 취미는 한 번씩 다 해 봤다면? 영상 구독 서비스, 자극적인 유튜브 콘텐츠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우리는 하루에 과연 몇 줄의 문장을 읽는가. 우리는 모두 현대인이 되기 전 학교에서 문학을 배워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가장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시인은 누구일까. 윤동주? 혹은 나태주? 앞으로의 기사에선 교과서에 나오는 시인을 제외하고, 우리의 마음까지 살찌워줄 현대 시인과 작품을 추천하고자 한다. 코로나로 지친 일상, 아주 오래 녹여 먹을 문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최승자 시인, <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 지성사, 1999, 13.

  최승자 시인은 부서져 버린 이 시대의 아픔을 시로 노래하고 있다. 메마른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의 사랑은 어떠할까. 마른 땅에 핀 곰팡이 같고, 구더기에 몸을 내어 준 시체와 같다. 이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아닌 의 상태로 떠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사람은 살아가면서 많은 물건과 인간을 축척하며 살지만 결국 이 시대를 떠날 땐 바람 한 점 쥘 수 없는 존재이다. 유성처럼 일시적이고, 벼룩의 간 같은 삶일지언정 시인은 사랑에 희망을 걸고 있다. 최승자 작가의 작품을 보면 2020,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당장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마스크 없이 볼 수 없고, 좋아하는 공부도 현장에 나가서 할 수 없지만 그 속에서도 너, 당신, 그대와 같은 행복들이 찾아오리라 믿고 싶다. 설령 그것이 루머라 할지라도, 이 시대를 견디다 보면 실제가 되리라 믿으면서 말이다.

  남은 설 연휴에는 커피와 유튜브 대신 가벼운 스낵 시 한 편은 어떨까. 당신의 마음 속, 지루한 문학 시간에 접한 시의 맛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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