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스낵 시 한 편! 겨울을 녹일 감성, 주민현 시인의 '킬트, 그리고 퀼트' 시집 추천

이운주 전문 기자
  • 입력 2021.11.25 16:0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네가 신이라면' 집중 분석

출처: 알라딘
출처: 알라딘
쌀쌀한 겨울을 녹을 따뜻한 내 손안의 스낵 시,
젊은 시인 주민현의 '킬트, 그리고 퀼트' 시집 추천

  첫눈이 내렸다. 단풍나무 위로 눈꽃이 피는 기이한 날씨, 하루에도 수십 번 변덕을 부리는 날씨. 기온차에 적응하기도 바쁜 우리에게 감성을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주변은 얼어붙었지만, 봄을 닮은 분홍빛의 표지 <킬트, 그리고 퀼트>는 건조한 마음에 시원한 눈송이를 내려 줄 것이다. 따뜻해 보이는 표지 이미지와 달리 시집은 아주 냉소적인 내용을 다룬다. 

  이 시집은 주민현 시인이 2017년에 등단하여 처음으로 낸 시집이다. 낯선 시인일 수 있다. 하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아주 새로운 감각과 비유로 드러내는, 재능있고 정성스러운 시인이라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시집은 사회 문제를 담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마냥 무겁게 주제를 다루지 않고, 축제 배경이나 일상물들을 활용하며 다양한 오감을 일깨운다. 그중 인상 깊었던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네가 신이라면>은 너라는 상대가 신이란 전제 하에 무엇을 할지 가정하고 있지만 이밖에 다른 시에서는 국제적인 시각으로 여성을 바라보거나 오컬트적인 시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네가 신이라면

첫 페이지에 역사와 종교를

다음 페이지에 철학과 과학을 적고

스물네번째 페이지쯤에 음악과 시도 적겠지

그렇다면 나는 눈을 감고 거꾸로 책장을 넘기겠네

 

독재자의 동상 앞에서

 예술가들을 추방한 철학자들과 춤을 추겠네

네가 신이라면 새들에겐 그림자

인간에겐 견딜 만한 추위와 허기를 주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겠지

 

나는 구멍난 공깃돌에서 흐르는

작은 슬픔을 엿보네

 

네가 신이라면

나는 네 두 눈 속에 오래 서 있는 동상

네 다리를 핥는 회갈색 눈의 개

 

 너는 사랑하는 두 사람과 두 사람을 막아서는 나무들

무성한 나무들의 숲과 그 숲 속에

 울려퍼지는 절규의 화음을 만들지

 

그것을 사람들은 음악이라 부르네

 

소년들은 커서 좀도둑이 되고

소녀들은 헐값에 신부가 되고

 

네가 신이라면 나는

무성한 나무숲을 돌지

포기를 모르는 들개처럼

 

네가 신이라면  

너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하나의 귀

 

나는 밝은 대저택과 침침한 교회 앞에서

하인처럼 조아리는 두 개의 음악

 

트리에 온통 반짝이는 것은

심장처럼 매달린 전구들

 

나는 붉게 빛나는 허름한 구두 한 짝

 

하늘엔 비행기

땅에는 부드러운 털모자를 쓴 인간들

 

실밥은 터진 호주머니 사이로 흐르고

가난한 연인들은 사랑을 조각보처럼 기워서 입고 다니지

 

<네가 신이라면> 전문

 

  네가 신이라면 책 첫 장에 역사와 종교, 과학과 철학을 담을 것이라고 시를 시작한다. 하지만 바로 책을 뒤집겠다는 반전이 이루어진다. ‘독재자들의 예술가들을 추방한 철학자들과 춤을 추겠네와 같은 행을 보면 이 역시도 예술가에 추방에 대한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작품 속에선 네가 신이라면이라는 가정을 갖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이 시 안에서도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네가 신이라면 나는 네 두 눈 속에 오래 서 있는 동상 네 다리를 핥는 회갈색 눈의 개라는 행이 특히 좋았다. 이미 이 행에서 시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신의 위치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신은 하늘 높이 떠있기에 인간은 그 아래, 두 눈 속에 담겨 위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신이라는 신성한 존재 앞에서 사랑을 받기 위해 다리를 핥는 짐승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이 탁월하다 느꼈다. 이후 이러한 신 아래에서 자란 인간들은 좀도둑이 되거나, 낯선 나라로 싼 값에 신부가 되어 팔려가고야 만다. 이러한 문장에서도 시인이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각이 드러난다. 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탄절, 트리는 아름답게 빛나지만 그에 비해 인간은 허름한 구두 한 짝처럼 보잘것없고 볼품없다.

  후반부,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은 찢어진 천을 모아 조각보를 붙여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시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구절이었다. 해외에서 국제 결혼을 하기 위해 돈에 팔려가는 어린 여성, 강한 자는 계속 살아남고 약한 자는 길거리에 나앉는 현실, 절대적 군주 앞에서는 한낮 하찮은 짐승이 되어 버리는 인간들주민현 시인은 신이라는 성역의 존재,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늠해야 할지 모르는 그 존재 아래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부조리를 시적으로 풀어낸다. 시집을 쭉 훑어보면, 주민현 시인이 얼마나 냉철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세상에 마냥 투정하지 않고, 자신만의 주관을 통해 예술 작품으로 새 목소리를 내는 시인의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손끝에 다가온 겨울, 봄을 닮은 해사한 색의 시집을 가슴에 품고 멀지 않을 새 봄을 기다려 보는 것은 어떨까. 스낵 시의 연재는 일상에 지친 현대인, 고민이 많은 학생, 다양한 선택에 놓인 사람들이 가슴 속에 문학적 감각을 포기하지 않고 품을 수 있길 바라며 연재하고 있다. 심심하면 꺼내 먹는 과자처럼 아주 편한 형태로 말이다. 오늘도 독자들의 마음에 뜨거운 불씨 하나가 피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