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한 상 차려놓고/김주선 경남 삼천포항 근처에 사는 친구로부터 아이스박스에 담긴 택배가 도착했다. 태양력의 절기로 농사를 짓는 집안에서 흙냄새로 자란 친구였다. 조선소 근처에서 청춘을 보내더니 바닷가 사람이 다 되었나 보다. 태음력을 꿰고 물 때를 헤아리는 걸 보니 제법 갯내가 난다. 상자에는 꾸덕꾸덕 말린 가자미와 새끼 딱돔이 해조류 위에 끼리끼리 포개져 누워있다. 입덧 때 즐겨 먹던 다시마 부각처럼 기름에 노릇노릇 튀겨내면 바다가 한 상 차려지겠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바다를 본 게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첩첩산중 내륙
경부고속도로 /박경임 경부고속도로 50주년을 기념한다는 티브이 안내를 보다가 아득한 옛날이 생각났다. 1975년이니 경부고속도로 개통 5년째가 되는 해였다. 나는 인문계 여고를 나와, 주산, 부기를 못 하니 작은 회사의 경리 자리도 찾기 힘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동안 하릴없이 청춘의 고뇌를 곱씹으며, 나를 대학에 보내주지 못한 부모만 원망하면서 막걸리 집에서 못 먹는 술을 퍼먹기도 했다. 아버지는 공무원시험이라도 보라고 달래기도 했는데 그 시절 공무원은 별 인기 있는 직업도 아니었고 상명하복의 낡은 분위기가 싫었다. 그러다
방앗간 옆 정미소 / 김은미 정미소가 다양한 문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쓰임새가 다 된 정미소가 이색적인 카페, 맥줏집, 공연장, 도서관, 전시관 등으로 성업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정미소에서 쓰던 기계들이 그대로 놓여 있고, 도정 작업과 관련된 용품과 농기구도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장년층에게는 향수를, 젊은이에겐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해 보였다. 고향의 옆 동네인 대척 마을에 정미소와 나란히 있던 방앗간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곳의 거대한 몸집을 가진 빨간 양철지붕과 땅을 울리는 장엄한 기계 소리는 충분히 흥미로
남해가는 길/김시현 아버지 기일이라 동생과 함께 가는 남해 고향 길 이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에는 봄꽃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들녘엔 봄기운이 피어나고 있었다. 농부의 손길이 필요한 밭갈이가 한창이었다. 언덕엔 연둣빛이 꼬물거리고, 살랑이는 바람결에 나뭇가지는 수줍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와 함께 갔던 쌍계사 벚꽃길이 떠올랐다. 집 담 너머 운동장에서 보았던 벚꽃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아름다운 꽃길은 황홀 그 자체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도로가 확장되면서 우리 집은 도로가 되었다. 아버지는 지금의 집을 설계하
초저녁잠이 많았던 아버지는 저녁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지셨다. 목침을 베고 누웠음에도 어찌나 달게 주무시던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였다. 산사의 범종 소리만큼 깊고 우람한 괘종시계의 타종 소리가 제아무리 댕댕거려도 꿈쩍 않던 양반이셨다. 그런 부친의 잠귀가 얼마나 밝았던지 밤마실을 다녀오는 도둑고양이 같은 여식한테는 아무리 부처님 귀라도 엄하게 꾸짖었다.언니들이 출가하거나 취업해 나 혼자 남은 집은 적막으로 채워졌다. 나이가 들면 잠귀도 어두운지 예전만큼 불호령은 없었지만, 부모님이 계신 안방은 여전히 고리타분한 기운이 감돌
삼십오 년 전 봄, 부모님은 생계의 수입원인 잠업(蠶業)에서 손 떼셨다. 섬유산업의 발달로 합성섬유가 대중화되고 누에고치 수매가격이 폭락하면서 뽕밭을 갈아엎고 땅을 묵혔다. 토질이 안정되면 과실나무 묘목을 심을 요량이었다. 휴지기를 보낼 무렵, 시집간 막내딸이 다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첫차를 타고 달려온 부모님은 시댁 세간살이를 보고 기가 찼는지 방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 아빠는 변변한 직업도 없이 얼굴만 반지르르한 연기 지망생이었다.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이가 생겨, 나는 어쩔 수 없이 시댁의
옹기가 놓인 풍경 부엌 뒷문을 열면 장독대가 있었다. 돌로 단을 쌓고 자갈을 곱게 깔았다. 장독대를 보고 딸을 데려간다고 해서일까. 윤기가 반지르르하면 그 집안 주부의 됨됨이나 살림 솜씨를 가늠할 수 있다고 들었다. 채송화로 촘촘히 둘러싸인 장독대는 토담과 어우러진 한편의 정물화였다. 그래서 사계가 모두 멋스러워 보였다. 대청에 누워 액자 같은 쪽문으로 보이는 장독대를 보며 ‘단란한 가족’ 같다고 하니 엄마가 빙그레 웃으셨다. 잔칫날 삼대가 모인 흑백 가족사진처럼 독, 항아리, 동이, 자배기, 시루, 소래기 등 갖가지 옹기들이 오순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을 보면 이름이 참 독특하고 시적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대다수 인디언은 삶의 경험이나 품성, 자연이나 상황을 묘사한 이름을 지으며 성도 없이 자연에 결속되었다. 주먹 쥐고 일어서서, 머릿속의 바람, 발로 차는 새, 그리고 영화 제목이기도 했던 ‘늑대와 함께 춤을’도 사람 이름이었다. 길지만 멋진 의미가 있었다. 한때 네티즌 사이에서 인디언식 이름짓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나의 생년월일을 앱에 넣으니 다음과 같은 이름이 만들어졌다. ‘조용한 황소와 함께 춤을’. 피식 웃음이
새들에게 묻는다 / 김주선 논둑에 세워진 허수아비가 어깨춤을 추었다. 광대 분장의 얼굴은 새들도 겁내지 않을 표정이었다. 바람이 잠시 숨 고르기를 하는 동안 구경하던 참새 가족이 날아와 허수아비 어깨 위에 앉았다. 핫바지 광대 따위는 겁나지 않은 모양이다. 고향 가는 길, 들녘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농부와 새들 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터이기도 하다.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새들은 저들끼리 무어라 지껄이는 걸까. 어린 날, ‘훠~이, 훠~이’ 새를 쫓던 아버지의 쉰 목소리가 동구 밖까지 들리는 듯하다.학교 다닐 때 우둔하거
겨울 서정으슬으슬 몸살 기운이 돈다. 재채기가 나는 걸 보니 고뿔까지 들려나 보다. 때가 때인지라 서둘러 피로회복제 한 알과 쌍화탕을 데워 마셨다. 온몸에 약발이 도는지 낮부터 졸음이 쏟아진다. 이재무 시인은 십일월을 가리켜 의붓자식 같은 달이라 했던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허드레 행사나 치르게 되는 달이라고. 하지만 긴 겨울나기를 준비하느라 아버지는 가장 분주했다. 부엌을 고치고 굴뚝을 소제하고 측간을 비워야 했다. 모든 채비가 허드렛일이 아니었다. 상달은 일꾼의 새경을 치르고 도지를 정산하는 달이기도 했다. 농부의 빈손에
이 밤에 ‘코’를 잡고 모두가 잠든 밤, 털실을 꺼내 뜨개질을 한다. 떴다, 풀기를 수없이 반복한 실이라 털도 많이 빠지고 낡아 어떤 뜨개질을 해도 헌것처럼 되었다. 엉킨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뜨개질만 한 것이 없었다. 밤새 뜬 것을 다시 풀어 실뭉치로 둔다 한들 아깝지 않았다. 두었다가 언젠가 또 불면의 밤이 오면 뜨개질을 할 것이기에. 글이 쓰이지 않는 날이 많아지자 나는 부쩍 뜨개질 바구니를 꺼내 거실 바닥에 펼쳐놓았다. 마음이 심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손끝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바늘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근심했던
친애하는 쿠마 씨마음 까지 읽어주는 번역기가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당신이 열어보지 않는 메일이지만 이 가을에 편지를 씁니다.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오래전 당신이 찍어 준 사진들을 발견하고 감회에 젖습니다. 도메인 공원에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 나를 세우고 자꾸 웃으라고 재촉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사진 속의 나는 세상 다 산 여자처럼 보이지만, 뒤쪽에 서 있는 천년의 은행나무는 너무나 곱고 아름답습니다.붉은악마가 열광했던 해였습니다. 치열했던 3년간의 싸움은 5분 만에 협의로 끝이 났습니다. 살림을 나누고 말고 할 것도 없
한때, 나는 향수 수집광이었다. 여행 기념으로 한 두 개씩 사 모으다 보니 나중엔 집착이 되었다. 은은하게 분사되는 향기보다는 액체를 담고 있는 우아한 유리병의 로망과 브랜드 수집에 대한 탐욕이 더 컸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지금은 몇 개를 제외하고는 지인에게 나누어 주거나 오래되어 버렸으니 과거 나의 장식장을 화려하게 채웠던 것은, 젊은 날의 허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향수란 마릴린 먼로가 애용했다는 ‘샤넬NO5’처럼 관능적 향기 거나 마음을 홀리는 향이거나 유혹을 부추기는 것이라 여겼다. 미국의 데메테르 향수 제조사의
어릴 적 우리 집은 솟을대문이 있는 기와집이었다. 중류층의 보통 집 구조였으나 새마을운동 이전에는 부러움을 사는 고택이었다.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집안일을 거드는 일꾼의 살림방이 있는 행랑채가 있었다. 대문은 두 개였다. 바깥마당에서 안마당으로 들어서는 중앙에 자리 잡은 솟을대문은 아버지의 벼슬 같은 자랑이었다. 행랑채는 살림방 외에 대문을 중심으로 외양간과 광(곳간)이 있었고, 집터를 아우르는 흙담 아래로 봉숭아가 피는 화단이 있었다. 목수인 조부에게 집 짓는 일을 배운 아버지는 전쟁통에 절반은 허물어진 어느 집 고택을 사, 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