뜯어진 바짓단을 깁기 위해 딸아이가 쓰던 반짇고리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지금은 집을 떠나 독립했지만, 의상학을 전공한 딸아이의 공구함은 그야말로 보물단지다. 물감처럼 가지런히 놓인 색실 칸을 뒤로 밀치면 쓰임도 다양한 바느질 도구들이 보인다. 키가 다른 바늘집, 제도용 자와 초크 펜, 가죽 골무 등등. 가봉 시 손목에 끼는 핀 쿠션에는 알록달록 구슬이 달린 핀들이 꽃 수술처럼 꽂혀있다. 가위의 종류도 서너 가지다. 실밥 자르는 가위, 옷본 자르는 가위, 천 자르는 가위 등, 그중 철판도 자를듯한 재단 가위는 딸 몰래 가끔 부엌으로
쓸쓸한 당신에게 숨겨놓은 애인 하나쯤 눈감아 줄까 보다. 응접실 탁자 위에 앉아 불경기에 시름 거리는 당신을 위로해 준다니 마누라보다 백번은 낫지 않은가. 남편은 몇 개의 분재를 본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소장하고 있다. 내가 기르는 화초에 비하면 그의 분재는 거의 예술품에 버금가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거래처에 갔다가 얻어 온 분재작품 ‘단풍나무’와 ‘소사나무’ 그리고 일반 ‘사과나무’ 분재였다. 손이 많이 가는 나무였지만, 몸값을 한다며 물 한 모금도 남의 손에 맡기지 않았다. 어쩌다 담배 한 모금이라도 피울라치면 눈을 흘긴다며 금
인생수업료 / 김주선 죽고 싶지만 죽을 수 없는 운명의 도깨비와 기억상실증 저승사자가 매력을 뚝뚝 흘리며 TV 화면을 가득 채웠던 2017년 봄, 금요일이었다. 그날 밤, 큰아들은 늦은 귀가를 했다. 나는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재방송 드라마 《도깨비》를 몰아보던 중이었고, 남편은 맥주 안주로 북어포 살을 발라내던 중이었다. 서울북부지방법원의 소인이 찍힌 봉투 하나가 아들의 안주머니에서 툭, 떨어질 때 내 심장도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입대 날짜를 받아놓고 마음을 잡지 못해 방황할 무렵, 아들은 아프리카TV에서 진행하는 ‘여자도
싸가지 신랑 /김 주 선 더위가 한풀 꺾였는지 꿀잠을 잤다. 잠결에 홑껍데기 이불을 끌어다 덮을 정도로 제법 선선했다. 주말인데도 남편은 출장을 가는지 새벽부터 커피 텀블러에 얼음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요깃거리라도 챙겨줄까 하다가 모르는 척했다.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맞벌이 부부고 그이가 아내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배려로 티스푼 젓는 동작 하나도 살살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싸가지 신랑’이라고 휴대전화에 저장한 지도 십 오륙 년이 넘었다. 그 사람 휴대전화에 나는 ‘집사람’으로 뜨는데 말이다. 언젠가 남편에게
노트- NO. 3 / 김주선 그동안 강산이 변해도 네 번은 변했을 텐데, 기억도 가뭇한 노트가 택배로 왔다. 좀 벌레가 오줌을 지린 듯 얼룩이 많은 사륙배판 크기의 대학 노트였다. 나의 청춘에 묻은 얼룩인 양 창피해서 얼른 감추었다. 그리고 두어 달이 지났을까. 모처럼 마음먹고 책상에 앉아 자물쇠가 걸린 일기장을 열듯 내 청춘 노트를 다시 펼쳤다. 서러운 장구 소리 / 육신의 뼈마디가 결리는 / 애달픈 몸짓 // 피의 아픔이 터져 / 넋 잃은 수천 개의 눈동자가 / 집시의 얼굴을 뒤진다 // 타오르는 젊음의 / 흩어진 머리채 //
그 남자의 오브제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김주선 사내(社內) 남자 화장실에 있는 소변기가 고장 나 설비기사를 불렀다. 부품을 교체하고 센서 감지기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수선비를 지급했다. 주르륵 물이 흘러내리자 그동안 막혀있던 관이 뻥 뚫린 듯 시원하게 씻겨 내려갔다. 누런 때도 벗겨지고 지린내도 나지 않아 속이 다 시원했다. 성역이나 다름없는 곳을 몰래 훔쳐보는 재미랄까. 오래전에 10유로 이상 되는 입장료를 내고 본 미술관이 생각이 났다. 아마 십 오륙 년은 지난 일일 것이다. 독일에 사는 친구와 단둘이 유럽을 여행하게
연당연화(煙堂煙花) / 김주선 예닐곱 살쯤, 나는 담배꽃을 처음 보았다. 내 키만 한 줄기에 넙적넙적한 잎이 어긋나기로 자랐다. 나팔꽃 같기도 하고 분꽃 같기도 한 길쭉길쭉한 꽃이 우산대처럼 핀 모습이었다. 꼭지를 따 쪽쪽 빨아먹으면 벌들도 좋아할 달곰한 맛이 났다. 짓궂은 애들은 담배꽃 무덤에 둘러앉아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내며 놀았다. 나도 엄마 몰래 꽃을 따 입에 물어보기도 했다. 한여름 연초 밭에 꽃이 피면 일꾼들의 손이 바빠졌다. 예쁜 꽃구경은 사치인 양 가차 없이 꽃대를 베어내 꽃무덤을 만들었다. 서둘러 잘라내지 않으면 영
그녀의 뜰에 핀 무궁화는 / 김주선 고등학교 졸업식도 못 치르고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 간 친구가 있다. 곱슬머리에 주근깨가 많고 사리에 밝은 영민한 친구였다. 오 년 전이었을까. 집 근처 농장에서 무궁화(Rose of Sharon) 묘목을 샀다며 현관 출입구 왼쪽 화단에 심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 잘 자랄지 걱정을 하더니 해마다 꽃나무의 성장기를 알려왔다. 작년 여름에는 백송이 넘게 피었다며 분홍색으로 활짝 핀 무궁화꽃 소식을 전했다. 한국에서 자라는 것처럼 나무가 크진 않지만, 근성이 있는 꽃나무라 낯가리지 않고 잘 자라
수필과 프레임 인생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른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인생에 대해 갖고 있는 비유가 다른 경우가 많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프레임이라고 한다. 프레임은 삶을 바라보는 고정관념이 이거나, 사건을 해석하는 가정이나 전제, 경험의 순서 등 개인에게 내재된 삶에 대한 틀이기도하다. 수필에서 프레임은 삶의 애매함 너머 숨어있는 진실을 찾아 내는 방식으로 작가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세계관이 보편적 감동을 일으킬 때 깊은 감명을 주게 된다. 프레임에 삶에 대한 목적의식이나 방향, 근원적 질문이 들어갈수록 작가의 세계관은
오지 않을 고향의 봄 / 김 주 선 몇 해 전 기록적인 가뭄이 든 적이 있었다. 수몰되었던 남한강 주변 마을 터가 유적지처럼 모습을 드러낸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집터와 돌담이 쌓였던 흔적, 깨진 옹기들, 수백 년은 자랐을 것 같은 당산목의 그루터기까지 적나라하게 모습이 드러난 사진이었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지는 강바닥에서 수풀이 자라난 모습은 기상이변이 나은 생경한 풍경이었다. 누군가는 수석을 주워가고 또 누군가는 집터 흙을 한 삽 퍼갔다는 사연마저 들렸다.제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충주다목적댐 건설로 청풍면의 거
백사의 꿈 / 김 주 선 용 두 마리가 승천했다는 영월 쌍용리는 농업이 주업일 만큼 비옥한 땅이었다. 38번 국도변 일대는 석회암 지대여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석회동굴이 많았다. 1962년 비옥한 농경 지대에 시멘트를 생산하는 양회공장이 들어서고, 70년대 건설 붐이 일자 광산업자들이 마을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외지 사람이 몰려 지역경제가 살아나자 인구가 늘었고, 무엇보다 중학교가 생겼다. 돈이 돌고 삶이 기름질수록 사람들은 욕심이 늘어갔고 더불어 몸에 좋다는 음식이라면 뭐든지 갈구했다. 그 무렵, 이웃에 뱀집이 이사를 왔다.
책소개독자의 시각과 취향 모두 만족시킬 예술성과 문학성 뛰어난 수필 60편2022년 수필문단에서 주목해야 할 빛나는 수필가들의 수필 60편을 만날 수 있는 『The 수필, 2022 빛나는 수필가 60』이 출간되었다.이혜연 선정위원은 「발간사」에서 “『The 수필 2022』의 작품 선정에는 기존의 블라인드 방식 외에 선정위원이 추천한 작품에 자기 점수를 매기지 않는 채점 방식을 추가해보았다. 조금이라도 더 공정한 평가를 하기 위해서였다. 심사를 거듭할수록 심사하기가 어려워진다. 공정이라고는 했지만, 위원 각자의 시각과 취향이 다르니
엄마의 무두질 /김 주 선 엄마는 갈걷이 후 뒷설거지하러 들에 갔는지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빈집이었다. 뒤꼍 우물에 가서 물 한 바가지 퍼마시고 돌아서려는데 커다란 고무 물통에 담긴 물체를 보고 기겁했다. 역한 비린내가 나는 담요 모양의 털 껍데기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우물에 자빠질 뻔했다.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신 듯 비위가 상했다. 학교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오리(五里)가 넘어 어린 걸음으로 삽 십여 분 이상 걸렸다. 도중에 도축장이 있었다. 새마을 운동 후에는 다른 곳으로 이전해 문을 닫았지만, 빈 건물 앞을 지나다닐 때면
K-굿 / 김주선 독일 뒤셀도르프에 사는 친구에게 한국의 ‘굿’ 열풍을 들은 건 이삼십 년 전이었다. 사실 믿기지는 않았다. 베를린에서 진혼굿을 하는 김금화 소식을 들었을 때는 편견이 심해 남의 나라까지 가서 왜 저러나 싶어 심드렁했다. 무엇보다 기독교인이었고 미신이라고 터부시할 때라 별 관심이 없기도 했는데 오히려 독일인 친구들이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신비한 무녀 비단 꽃(금화)에 열광했단다. 에너지가 폭발하는 매력적인 무속 의식에 푹 빠져 한국으로 유학 온 학생도 있었는데 관련 자료가 컨테이너 한 대 분량이라며 그 열의를 놀
혼자만의 방 / 김주선 자기 방 하나도 감당 못 하는 작은아들이 자취하겠다고 선언한 게 아마 작년 2월경이었나 보다. 옷 무덤을 만들고 퀴퀴한 쓰레기와 한 몸이 되어 뒹굴던 녀석이 자취의 의미를 알기는 할까. 통학하기도 자취하기도 참 애매한 거리의 학교였다.스물다섯 약대 5학년, 군대를 다녀왔다면 복학을 할 나이지만 아들은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았다. 입대를 미룰 만큼 녀석의 바짓가랑이를 잡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아들의 청춘 일기에 잔소리 한 줄을 보태고 싶지는 않았다. 부쩍 자취하겠다는 걸로 보아 녀석의 꿍꿍이가 의심스러웠지
뒷간둥이 / 김주선 “옛날, 옛날에 감자바위 아래 울음도 시원찮은 계집아이가 태어났단다. 온몸에 재를 묻힌 더러운 꼴로 잿간 삼태기 안에서 우는 걸 삼신할미가 안고 나왔지.” 부엉이가 우는 밤. 외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언제나처럼 산파 노릇을 하는 삼신할미 이야기로 시작했다. 마흔여섯에 출산을 한 당신 맏딸의 노산이 얼마나 힘들고 기가 막힌 일이었는지, 탄생이 경사가 아니라 얼마나 남사스러운 일인지를 회상했다. 잦은 병치레로 지어미 등딱지에 붙어사는 외손녀에게 숨을 거두시는 그날까지 똥 묻은 애, 재 묻은 애라고 놀렸다. 나의 출생은
커피공화국/김주선 도핑검사에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카페인은 선수들의 기분전환 차원을 넘어 실제로 경기에 도움을 준다는 보고가 있다. 국제반도핑기구에서 2004년에 카페인을 금지약물에서 제외했지만, 운동 전에 커피를 마신 사람이 운동 성과가 좋았다는 발표는 꾸준하게 나오고 있다. 요즘 스포츠를 보다 보면 선수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제공되고 쉬는 틈틈이 물 마시듯 하는 걸 볼 수가 있다. 스포츠 트레이너에 따르면 심폐지구력을 향상하여 근육의 힘을 지속해 준다고 하니 안 마실 선수가 있겠는가. 내가 커피 맛을 안건 고3 때였다. 입시 공
쑥부쟁이 노인 / 김주선 김 노인의 직업은 침구사였다 . 신작로 곁 , 미루나무 아래에 납작 엎드린 집이 그의 침방이었다 . 잡초 같달까 , 신작로의 흙먼지가 앉아 초라한 그 집 뒤안길에는 노인처럼 괄시받던 쑥부쟁이가 무성했다 . 그이는 침술원이라는 목판 하나 내 걸지 않은 채 침 치료를 하거나 쑥을 캐러 다녔다 . 남모르는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귀향했을까 궁금했던지 그의 새 아내를 보고 동네 아낙들이 수군댔다 . 제법 서울 물 먹은 티가 나는 중년 여인이 홀아비인 그를 따라 산골로 내려오다니 나도 궁금하기는 했다 . 누추했지만 용하
수필 쓰는 AI /김 주 선'그날은 구름이 드리운 잔뜩 흐린 날이었다. 방안은 언제나 최적의 온도와 습도. 요코 씨는 그리 단정하지 않은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시시한 게임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서울신문 2016.03.23. 인용) 이 글은 AI가 단어를 조합해 만든 문장이다. 전혀 어색하지 않다. 불과 몇 년 전 일본 모 신문사가 주최한 공모전에 AI가 소설까지 도전했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본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등단하는 시대도 올 것 같다. 인물이나 플롯을 구성해주면 알아서 단어를 조합해
언덕 위의 집 /김주선청량산에서 뻗어 내린 줄기와 이어진 나지막한 구릉성 산지가 영장산이다. 언덕에 올라가면 성남 구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분수 광장을 지나 넓은 골 능선으로 접어들면 망경암이 있고, 봉국사가 있으며, 고갯길 바로 아래 태평동 시댁이 있다. 영장산 봉국사의 저녁 공양이 끝나는 시간이면 인근 주택가까지 염불 소리가 들렸다. 시어머니는 저녁 산책을 하다 노스님의 천수경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종종 사찰 안까지 발걸음을 들여놓곤 하였다. 무늬만 불자였던 시어머니는 사월 초파일에 가끔 절밥을 드시러 갔지만, 시주하거나 연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