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거처의 골방을 뒤졌더니 적음 형이 낸 단행본 ‘저문 날의 목판화’가 나왔다. 첫 장에 ‘김홍성에게 /임신년 겨울/ 寂音’이라는 서명이 있다. 허공에 휘날리던 터럭들이 우연히 거기 모였다 싶은 필체에서 적음 형의 빙그레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1992년 10월에 출판사 서울창작에서 낸 이 책의 판권에는 적음 형의 인지도 붙어 있다. 종서로 새긴 인장의 寂音 두 글자가 삐뚤빼뚤했다. 취해서 걷는 적음 형의 뒷모습 같았다. 표4에는 천상병, 중광, 이시영, 송기원의 덕담이 있고, 발문은 표성흠이 썼다. 이시영, 송기원은 적음 형의 서
3개월이나 갱생원에 갇혀 있었는데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적음 형이 승적을 박탈당했거나 천애 고아가 됐거나 속가의 피붙이와 절연된 상태였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적음 형은 15세에 절에 갔다. 절에 가기 전날, 어머니가 쇠고기 넣고끓여준 미역국을 너무 많이 먹고 설사를 했다. 1년 뒤 수계식에 어머니가 찾아와서 대견해 하였고, 다시 반 년 뒤에 고암사로 찾아와서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가 책에 나온다. 그 대목들 말고는 어머니나 형제에 대한 특별한 얘기가 없다.말 하지는 않았지만 적음
응암동에 다녀온 지 며칠 안 되어 적음 형이 회사로 찾아 왔다. 모자도 없이 맨 머리로 삐뚜름하게 서서 빙그레 웃는 눈에 눈물이 슬쩍 맺히는가 싶더니 수선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복도가 울릴 정도로 큰 웃음 소리였다. 편집실에 있는 동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 앞장세우고 등을 밀다시피 회사 밖으로 나왔다.회사에서 좀 떨어진 중국 음식점 이층 구석방에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적음 형이 두서없이 말한 바를 정리해 보면, 술이 너무 취해서 서울역 벤치에 누워 있었는데 그 놈들(경찰 또는 방범)이 와서 일어나라고
왜 그렇게 늦게 연락을 주었는지 어제는 감꽃이 지기 시작하더니초가을 바람이 벌써 한차례 비를 몰고 가는구나저녁엔 스산해서 한 잔 소주로 목을 달랬다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놓아두고그렇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이 저녁을꾸려가야 하는 것인가연락은 한차례 내리는 비처럼 왔다 갔다감이 발갛게 익어가는 모습을 차마보지 못하겠다- 저녁에 全文어제 밤에는 K와 전화로 긴 얘기를 했다. 파주 지역 가톨릭 연령회 회장이기도 한 그는 작년 연말부터 어제까지 여덟 명의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이번 겨울에는 유난히 많은 노인들이 사망해서 병원마다 영안실이
시집 ‘저녁에’는 2004년에 출판사 ‘홍익 21’에서 나왔다. 적음 형은 ‘홍익 21’에서 수필집도 낼 예정이었다. 내가 거처를 춘천에서 양구나 속초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을 그 때 적음 형은 조만간 나올 수필집에 게재할 발문을 하나 써달라고 전화로 요청했었다. 그것마저 사양할 수는 없었다. 노느니 염불이라도 한다는 심정으로 발문을 쓰기로 했다.발문 원고를 전했던 날일까? 적음 형을 인사동에서 만났다. 적음 형은 개량 한복 같은 것을 깨끗하게 입고 있었다. 웃음소리며 너스레며 가끔 이윽히 주시하는 시선도 변함이 없었다. 거의 15
춘천에 살 때였으니 10년 전인가 보다. 귀국 초기부터 연락하고 지낸 후배 K의 전화가 왔었다. 그는 적음 형의 고관절이 부러졌다는 소식을 전하며 곧 간병하러 갈 거라고 했다. 그는 같이 갈 생각은 없냐고 묻기도 했는데 나는 못 간다고 대답했다. 뿐만 아니라 나의 귀국조차 아직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움직이는 게 도무지 귀찮았음은 물론 적음 형의 전화를 받는 일도 달갑지 않았다.귀국 이후 나에게는 많은 일이 일어났었다. 따져 보면 그 모든 일이 누구나 겪는 흔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 때 점점 더 분노에 휩쓸리고 있었다.
적음 형이 여생을 마친 곳은 경북 봉화 땅이었다. 물야면 수직리 야산 기슭의 민가에 일소암(一笑庵)이라는 당호를 달고 살았다는데 무슨 인연으로 거기까지 흘러갔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기댈 데가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시인통신에 가끔 들렀던 화가 부부가 나에게 적어 준 주소도 그 쪽이었고, 멀지 않은 산에 있는 큰 절 주지가 적음 형의 도반이라는 얘기 들은 적이 있다. 그 스님은 절에 들어오는 시주로 적음 형을 도왔을 것이다. 일소암 초기에는 한 보살이 적음 형을 시봉했으나 얼마 못가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적도 있
보살의 나이는 적음 형 또래거나 한두 살 많아 보였다. 얼굴이나 표정은 가수 임주리와 비슷했다. 강한 인상 속에 처연함이 들어 있고, 바보처럼 순진한 표정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음성이나 창법은 가수 김추자와 비슷했다. 그러나 동종(銅鐘) 같은 울림이 있고 비애가 과장되지 않았다. 기성 가수 중에도 그런 가수는 흔치 않을 것이다. 나는 존경을 품고 보살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 한 곡 더 청했다. 적음 형도 옆에서 ‘오늘 더 잘하네. 한 곡 더 해봐라.’ 하면서 거들었다. 한 곡 더 했을 것이다. 아니 두 세 곡 더 했을지도 모
적음 형이 서울 삼청동 총리 공관 인근의 오래 된 단층집 구석방에 살았던 때는 언제였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내가 도망치듯 네팔로 떠나곤 했던 1991년 이후부터 아주 살러 갔던 1996년 이전일 수도 있다. 내 직장이 세종로에 있었던 1985년 무렵일 수도 있다. 잡지 쟁이는 보따리 장사라는 말도 있었는데, 나는 직장을 여러 번 바꿨다. 한 번 바꿀 때마다 직급이 오르거나 보수가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내가 직장을 여러 번 바꿨듯이 적음 형의 거처도 여러 번 바뀌었다. 이 산에서 내려오고, 다시 저 산으로 들어갔다가
3개월이나 갱생원에 갇혀 있었는데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적음 형이 승적을 박탈당했거나 천애 고아가 됐거나 속가의 피붙이와 절연된 상태였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적음 형은 15세에 절에 갔다. 절에 가기 전날, 어머니가 쇠고기 넣고 끓여준 미역국을 너무 많이 먹고 설사를 했다. 1년 뒤 수계식에 어머니가 찾아와서 대견해 하였고, 다시 반 년 뒤에 고암사로 찾아와서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가 책에 나온다. 그 대목들 말고는 어머니나 형제에 대한 특별한 얘기가 없다. 말 하지는 않았지만 적
응암동에 다녀온 지 며칠 안 되어 적음 형이 회사로 찾아 왔다. 모자도 없이 맨 머리로 삐뚜름하게 서서 빙그레 웃는 눈에 눈물이 슬쩍 맺히는가 싶더니 수선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복도가 울릴 정도로 큰 웃음 소리였다. 편집실에 있는 동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 앞장세우고 등을 밀다시피 회사 밖으로 나왔다. 회사에서 좀 떨어진 중국 음식점 이층 구석방에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적음 형이 두서없이 말한 바를 정리해 보면 술이 너무 취해서 서울역 벤치에 누워 있었는데 그 놈들(경찰 또는 방범)이 와서 일어나라고
내 거처의 골방을 뒤졌더니 적음 형이 낸 단행본 ‘저문 날의 목판화’가 나왔다. 첫 장에 ‘김홍성에게 /임신년 겨울/ 寂音’이라는 서명이 있다. 허공에 휘날리던 터럭들이 우연히 거기 모였다 싶은 필체에서 적음 형의 빙그레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1992년 10월에 출판사 서울창작에서 낸 이 책의 판권에는 적음 형의 인지도 붙어 있다. 종서로 새긴 인장의 寂音 두 글자가 삐뚤빼뚤했다. 취해서 걷는 적음 형의 뒷모습 같았다. 표4에는 천상병, 중광, 이시영, 송기원의 덕담이 있고, 발문은 표성흠이 썼다. 적음 형의 인사동 술친구였던 천
1981년은 몇 년 전인가? 37년 전이다. 적음 형이 33세가 된 그 해에 나는 28세였다. 나는 월급 받는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서대문구 교남동의 잡지사였다. 적음 형은 술값이 떨어지면 여기저기 전화를 했는데, 그중 한 군데가 내 직장이었다. ‘형이다’로 시작해서 ‘돈 좀 있나?’로 이어지는 형의 전화는 사실 반갑지 않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마감 때는 짜증도 났다.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전화 하세요’ 이러면 ‘나중에 언제?’하고 물었다. ‘형, 전화 끊는다. 미안.’이러기도 했다. 셋방을 얻어 결혼 생활을 시작한 나에
적음 형이 흑석동 어느 골목에 방을 얻어 살았던 때는 언제였는가? 기억이 뒤죽박죽 뒤엉켜서 갈피를 못 잡겠지만 나는 그 방에서 적음 형이 구술하는 육성 원고를 타자기로 기록하고 있었다. 적음 형은 종이에 제목들만 나열해 벽에 붙여 놓고 내용은 그날그날 즉석에서 만들어 냈다. 나는 늘 한 손에는 타자기, 한 손에는 종이봉투를 들고 적음 형에게 갔다. 방문을 열고 종이 봉투를 내밀면 적음 형은 염화시중 같은 미소를 지었다. 빙그레 웃는 입가에서 곧 침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나는 앉은뱅이 밥상에 타자기를 놓고 앉는다. 내 준비는 끝난
대학 신문의 공모전에 K 형의 소설이 당선된 해는 언제였을까?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이었을까, 아니면 복학해서였을까? 기억이 확실치 않다. 일단 1976년이라고 해 두자. 70학번(69학번이라는 설도 있었다) 복학생이었던 K 형은 특별한 군대 생활을 했다. 카투사로 미2시단 제주도 휴양소에서 근무하다가 미군들의 흑백 갈등에 휘말려 병장 때 국군에 편입되었다. K 형은 전방 부대 소총 소대에 재배치되었는데 병장 대우를 못 받았다. 카투사에서, 그것도 제주도 휴양소에서 근무한 죄로 소대 내무반 최하위 졸병들과 동급으로 취급되며 지난한
적음 형은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1949년생이다. 처음 만났던 1975년에 우리는 둘 다 20대였다. 스물 두 살의 내가 스물일곱 살의 적음 형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선시를 읽는 듯 신비스러웠다. 적음 형의 시는 한문을 번역한 선시와는 달리 자연스러운 운율이 느껴졌다. 글씨체는 짧고 꼬불거리는 터럭을 모아 가지런히 정렬해 놓은 듯, 여차하면 바람에 흩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런 적음 형의 서체를 누구는 음모정렬체라고도 평했다. 악의를 가졌던 것은 아니고, 웃자고 한 평인데 딱 들어맞았다. 적음 형은 내 공책에 써 준 자기
작가 박인이 낸 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에 수록된 단편소설 속에서 적음 형을 만났다. 여러 해 전에 이미 고인이 된 적음 형은 미아리 시절의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다녔던 선배이다. 박인은 적음 형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랐던 사람임이 소설 속에 나타난다. 내 기억에는 적음 형을 그렇게 진실하게 대했던 후배는 많지 않다. 함부로 대하고 반말했던 후배, 약소하나마 지출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미리 내빼는 후배, 심지어 발길질을 했던 후배도 있었다. 술집에 잡혀 놓고(앉혀 놓고) 도망치는 데 필요한 볼모로 써 먹은 후배도 있었다.
꿈 없는 잠이 있을까.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이리라. 냄비의 물이 찌개를 끓이듯 잠은 꿈을 끓인다. 최근 며칠 동안 내 잠은 무슨 꿈을 끓였던 것일까? 온동네를 돌며 구걸해온 여러 가지 음식물들을 한꺼번에 쓸어 넣고 끓이는 다리 밑 걸인들의 죽처럼 빈곤하고 스산한 잡탕이 대부분이다. 꼬리지느러미가 달린 고등어 뼈, 갈치 대가리, 양파 껍질, 파 뿌리……. 잡탕 속에는 이런 박테리아성 쓰레기에 불과한 것들도 함께 끓고 있었다. 그런 죽에서는 걸레나 행주 냄새가 날 뿐, 그것이 무슨 죽인지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내 머리가 아직 번쩍번
무슨 이유로 불려 나갔는지는 이제 희미하다. 그 때 생긴 이마 위의 흉터도 잘 봐야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해졌다. 그러나 그 선생의 성난 괴물 같은 모습은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그는 겨우 열두 살 먹은 6학년 어린이의 머리통을 수박 들 듯 두 손으로 움켜쥐고 들어서 칠판에다가 두두두두 소리가 나게 연속으로 쳐 박았다. 그가 동작을 멈추고 내 머리를 붙들었던 두 손을 뗐을 때 나는 어지러워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 했다.한 반에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을 통제하며 수업을 진행해야 되는 교사의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아무리 말썽
관광버스였는지 일반 시내 버스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비좁은 버스에 옹기종기 낑겨 앉아 노래를 부르며 소풍을 떠났다. 첫 노래는 교가였다. 앞부분은 기억이 안 난다. 뒷부분, 그러니까 후렴만 기억난다. “혜화, 혜화, 혜화, 하늘과 땅과 나라의 은혜로 우리는 변함이 없구한다.” ‘없구한다’가 무슨 뜻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마 ‘없으련다’라는 뜻일 것이다. 김밥과 사이다와 삶은 계란을 가지고(어떤 애들의 가방에는 바나나도 있었다) 학교 밖으로 멀리 나간다는 것만으로 들떠서 아이들은 자못 씩씩하게 노래했다. 교가보다 더욱 씩씩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