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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영갑서예 #5 제주올레길 14-1코스] “기억 속으로 보낼, 희미한 사람이 됐다”

이용준
  • 입력 2018.01.31 00:00
  • 수정 2021.12.16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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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잘못 생각한 걸까. 띄어쓰기 하나라도 조심하려 했는데 그 맥락을, 그 의미를 알까. 우리가 만난 환경과 바닥만이 문제였나. 네가 살아온 방식 그대로 내버려 둬야만 했는가.

고내리 무인 카페 ‘산책.’ 제주 인심의 종결자. 주인이 누군지 궁금하다. 치아파스 유기농 아메리카노를 단돈 2천 원에 마시며 여유롭게 오후를 보낸다. 산책하고 함께 밥 먹고 아이들 재우는 일상을 나누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면 행복할까. 불륜보다 삶을 나누는 일이 더 무서운 일이다. 너와 일상을 섞게 된다면 우리는 또 어떻게 변할까.

“부모님 등지고 나랑 살 수 있어? 난 축복받는 결혼하고 싶어.”
“남들이 우리 보면 미쳤다고 할 거야.”
“아프지 말라는 사람이 제일 아프게 했어.”

왜 갑자기 힘들다고 했을까. 내가 너를 힘들게 했는가. 내가 무얼 잘 못 알아들었나. 내가 너를 잘못 생각한 걸까. 띄어쓰기 하나라도 조심하려 했는데 그 맥락을, 그 의미를 알까. 우리가 만난 환경과 바닥만이 문제였나. 네가 살아온 방식 그대로 내버려 둬야만 했는가.

마지막 함께한 그날 아침, 단골 술집에서 기다리면서 이젠 너도 기억 속으로 보낼, 희미한 사람이 됐다는 생각이 왔다. 그래야만 한다는 울림이 있었다. 그걸 막아보려고 네 안에 흔적을 남겼던 것, 너는 알까. 콘돔을 끼지 않고 사정했다는 이유로, 피임약 처방받으러 병원에 함께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너는 모든 걸 끝냈다. 강퍅한 사람,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자기 덫에 걸려 평생 후회하는데. 기억에서 지운다고, 콘돔 낀다고 뭐가 달라질까.

“개새끼, 좆만 한 새끼가! 나 구류도 산 적 있어. 니 집 가서 다 뒤집어 놓을 거야! 내가 이럴 줄 몰랐지? 눈깔아 새끼야, 어디 손을 주머니에 처넣고 시팔!”

어쩌면 그날 네가 나를 해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원래 머리랑 가슴이랑 따로 노는 내게 말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차라리 그대로 파국을 맞았더라면 기억할 이유도, 잊지 못해 괴로워할 시간도 필요 없었을 텐데. 끝내지 않고 내 손에 넘긴 마지막 배려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어리석고 이기적인 건 결국 나였다.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행동을 저지르는지 너는 몰랐어도 나는 알고 있기에.

무작정 버스를 탄다. 싫어도 어쩔 수 없다. 배든 비행기든 타려면 도심으로 가야만 한다. 그래야 섬을 떠날 수 있다. 오늘 돌아가야 할지 내일 가야 할지 결정하지는 못했다. 공항이 보이자 반가워 무작정 내린다. 표가 없을 걸 기대하면서 물으니 저녁 9시 반 좌석이 남았다. 1만 9천 원. 표를 끊었다.

아직 하지 못한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일인데도 잊고 있었다. 어딘지 알 길 없는, 네가 살았던 곳을 찾아가야만 한다. 사라봉 뒷동네, ○○오거리 근처. 동문시장에서 내려 오거리란 오거리는 죄다 들르며 동네방네 사진을 찍어 댄다. 무언가에 홀연히 미혹되어 사라봉까지 전력한다. 날마다 운동했다는 곳, 사라봉 정상에서는 약수도 마시고 정자에 앉아도 본다. 이렇게라도 추억을 돌려주고 싶었다. 남자들을 대표해 참회하고 싶었다.

‘Do you remember? have lived here?’

절정의 현재는 끝났다. 사라봉을 내려오면서 마음이 편해진다. 이제는 의지로 정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밀려온다.

십 년 전, 네가 이곳에 홀로 온 이유를 내내 생각했다. 추정은 의심과 다르게 근거와 가설로 구성된 반 사실이다. “과거는 자기 거야, 떠벌리지 않아도 되는 거야”라고 말했던 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과거를 살았는지 알기 위해 섬에 온 것일까. 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지금 너는 얼마나 외로울까.

by 이준 -Copyrights ⓒ말산업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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