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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자서전

이진성
  • 입력 2023.09.25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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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5.02:01

요즘에는 대본리딩을 할 때에도 아이패드 같은 전자기기를 쓴다. 수업을 할 때에도 노트필기가 아닌 아이패드 필기를 종종 보곤 한다. 돈이 없어서 안 사는 것이 아님에도 뭔가 초라한 것만 같은, 내 종이로 된 노트 구석을 만지작 거린다.

나는 종이가 좋다. 아직도 내 가방 안에는 수많은 대본과 독백들이 들어가 있다. 연습하다가 휙 집어던질 수 있는 편리성에서 오는 일종의 쉬운 태도도 좋다. 비싼 기계는 뭔가 앙칼진 여자친구 같아서 공주대접 하다가 내가 내 풀에 지칠 것만 같다.

요즘 보드게임 모임에 나가는데 보드라는 뜻에도 종이의 흔적이 뜻에 묻은 것 같다. 그래서 게임의 승리 보다 보드게임의 케이스와 질감에 집중한다. 마치 지금도 종이에 글을 먼저 적는 것처럼 말이다. 남들은 빠르게 타이핑해서 글감을 만드는 경우에 비하면 좀 특이한 행동이긴 하다. 그러고 보면 종이를 참 좋아한다. 북클럽에 갈 때에 들고 가는 책도, 영화관에서 요즘엔 안 뽑아도 되는 티켓도, 내 일기장도, 공연 티켓도 다 종이다.

연기할 때에 인물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쓰는 것을 자서전이라고 한다. 나에게 종이는 어떤 존재인지 자서전을 써서 돌아가본다. 어머니는 내가 책을 읽기를 바라셨고 우선 종이와 지류에 진해지도록 만화책을 사주셨다. 덕분에 아직도 책을 가까이 두는 편이고 결국 다독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종이 운반업을 하셨고 집에는 가끔 종이로 된 장난감이 놓여 있곤 했다. 그 시절에 나는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 있었다. 스케치북도 참 많이 썼다. 그러다 스무 살 남짓 서점에서 일도 했다.

나의 자서전을 돌아보니 종이가 참 않았다. 종이는 냄새도 좋다. 나도 종이처럼 만지면 질감이 있고 좋은 냄새가 나는 배우가 되면 좋겠다. 종이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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