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주몽]은 [고구려]의 왕인가? [부여]의 왕인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가짜 (불신론)’ 라고 마음대로 [교과서]를 소설로 만든 국사편찬위원회. 거대한 음모(22) 일본을 편드는 국사편찬위원회 (96)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9.17 13:2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최근 [책보고] 가 출판한 [백제서기·백제왕기] 에 [코리아 삼국사기·삼국유사]나 [차이나 삼국지] 등 역사책에는 없는 기록이 다수 실려 있다.

 

코리아 삼국사기는 1145년에 출간되었으나 지금 전해지는 것은 조선시대 이후인 14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기록된 것들이다. 몇 백년 동안 전해오면서 고의든 과실이든 원본과 다르게 위·변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 편찬자 (대표 김부식)들이 참조한 차이나 역사책은 삼국지, 한서, 수서, 구당서 등 최소 22권 이상으로 지금도 전해져 오고 있다.

 

참조한 코리아 역사책은 고기, 삼한고기 등 21권이라고 하나 (나무위키, 삼국사기) 코리아 역사책은 통으로 전해져 오는 것은 없고, 부분만 전해 오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일본 편드는 [친일 국사편찬위원회]에 빌붙은 소위 강단 역사교수들에 의해 ‘진짜인지’ 의심된다고 무시된다. [책보고]가 출판한 [백제서기·백제왕기]도 마찬가지 대접을 받는다.

 

일본 편드는 [친일 국사편찬위원회]에 빌붙은 소위 강단 역사교수들은 아직도 일본 제국주의 일제가 지배하던 시절에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가짜다 (불신론 이라는 거창한 표현은 싫어한다)’ 라는 주장을 따르고 있다.

 

일본 편드는 [친일 국사편찬위원회]에 빌붙은 소위 강단 역사교수들에 의해 [코리아 삼국유사]도 “일본에 유리한 부분은 역사적 사실이고 일본에 불리한 부분, 가령 단군관련 기록은 신화로 믿을 수 없다.” 고 평가된다. [코리아 삼국유사]는 1281년에 편찬되었다고 하나 지금 전해지는 것은 14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것과 1512년에 간행된 정덕본이다.

 

2. 그럼 우리는 코리아의 역사, 정확하게는 [한반도와 부속도서 (헌법의 표현이다) 그리고 만주 일대 ]등의 지역의 역사를 어떻게 공부하고 기록해야 하나?

 

방법은 단 한가지다.

 

첫 번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으로서 차이나 역사책과 일치하는 것은 일단 제대로 전해진 것이라고 본다.

 

두 번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으나 차이나 역사책에 없는 것과 그 반대의 것은 최대한 비교·검증하되 모순되거나 일치되지 않으면 두 개 다 기록하는 것이다.

 

3. 이 방법으로 한반도와 부속도서의 역사를 기록하면, 이성계 조선 시대 이전에 기록할 것은 거의 없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성계 조선의 왕들이 불태웠든, 일본제국주의가 일본 궁내성으로 가지고 갔든, 전해지는 역사책이 거의 없다.

 

둘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린 기록은 차이나 대륙에서 발생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 편드는 [친일 국사편찬위원회]에 빌붙은 소위 강단 역사교수들은 아직도 일본 제국주의, 일제가 지배하던 시절에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가짜다 (불신론 이라는 거창한 표현은 싫어한다)’ 라는 주장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셋째 기원전 100년 경 편찬되어 차이나 역사책 중 가장 오래된 정부 역사책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은 [고조선]이 차이나 대륙 황하유역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넷째 차이나가 285년에 편찬한 ‘삼국지’ 는 [고조선]의 왕 [준]이 [위만]의 쿠데타로 쫓겨나 기원전 190년 경 ‘해’ 지역인 ‘마한·진한·변한’ 지역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4. 코리아 언어 ‘해=태양=sun’을 차이나 역사책은 때로는 해解 로 때로는 해海 로 기록했다. 코리아 사람들은 스스로를 ‘해’ 민족이라고 했고, 살던 지역을 ‘해’ 라고 불렀고, 지배 계층은 ‘해解’라는 성씨를 써 왔다. 부여 고구려 역사에 나오는 [해解부루= 해解 + 부루]나 [해解모수=해解+ 모수] 가 좋은 보기이다.

 

차이나 정부 역사책으로 기원후 100년 경에 편찬된 차이나 한漢서 지리지에 ‘해’가 들어간 군(郡. 지방정부)이 있다. ‘발해군’ ‘북해군’ ‘동해군’ 이다. 3 개 군에는 ‘바다=sea’가 없다. 바닷가 라고 우기거나 큰 호수가 있어 ‘바다 해’가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해’는 ‘바다 해’가 아니라 ‘태양 해’ 이다. 당연히 차이나 漢(한)나라가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마치 차이나 漢(한)나라의 지방정부인 것처럼 기록해 놓은 것이다.

 

‘발해’는 ‘밝은 해’ ‘큰 해’ 의 코리아 언어를 발음만 옮겨서 漢字(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원래 삼수변이 없는 勃(발)해로 기록되어 있다.

 

‘발해’의 ‘발’은 두 가지로 쓴다. ‘발勃과 ’삼수변 발渤’이다. 삼수변 발渤 은 발勃 부족(씨족, 민족)이 살던 땅에 있는 강이나 호수를 말한다. ‘발’은 ‘밝다’의 ‘밝’이다. ‘밝다’는 해 (해= 태양 = sun) 의 뜻이다.

 

‘발해’는 ‘밝은 해’를 빨리 읽고 줄여 읽어서 ‘발해’라고 하고 ‘발해勃海, 渤海’ 라고 표기한 것이다.

 

5. 삼국유사 기록이다. [주몽]은 [부여]의 왕이 된 적이 없다. [금와]는 [해부루]의 아들임으로 해解씨이다.

 

“ [일연]은 [해부루]의 아들 [금와]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데리고 왔다. [유화]는 [해모수]를 만나서 사통하고 알을 낳았는데, 알에서 [주몽]이 나왔다. [주몽]이 비류수(沸流水)가에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고구려]라 했다.

 

[주몽]의 본래의 성은 해解씨였는데 이제 천제의 아들로서 햇빛을 받고 낳았다 하여 자신이 높을 고高자로 성을 삼았다. “

沸流水上居之, 國號 髙句麗, 因 以 高爲氏, 夲姓解也. 仐自言是天帝子承日光而生, 故自以高爲氏.

 

6.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백제본기 1편]에서 큰 글씨로 [온조왕의 아버지 추모(주몽)은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고구려왕이 아니라 부여왕이 되었다.]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7.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백제본기 1편]에서 작은 글씨로

[주몽은 부여왕이 된 적이 없고 고구려의 왕이 되었다. ]

 

“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이니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이다.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니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B.C.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으며,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왕업을 세우는 데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은 소서노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8. 주몽이 부여왕이 된 적이 있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이제 차이나 역사책은 주몽을 부여왕으로 했는지 고구려왕으로 인식했는지 살펴보자. (계속)

 

부록1

≪국사(國史)≫ 「고려본기」註 373에 이른다. 시조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은 고註 374씨요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처음에 북부여왕註 375해부루가 동부여로 자리를 피하고 나서 부루가 죽으매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에 왕은 태백산註 376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나서 사정을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본시 하백(河伯)의 딸로서 이름은 유화(柳花)註 377인데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와 놀던 중 때마침 한 사나이가 있어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자칭하면서 나를 유인하여 웅신산(熊神山)註 378 밑 압록강변의 방 속에서 사통(私通)하고는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단군기(檀君記)≫註 379에 이르기를 “[단]군(君)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상관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기록을 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관계하여 뒤에 주몽을 낳았다고 하였다.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부루이다.”라고 하였으니 부루와 주몽은 이복형제(異母兄弟)일 것이다.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외간남자를 따랐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