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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사람이 [신라]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 [수서隋書]. 국사편찬위원회는 차이나 정부 역사책 [수서隋書]가 위조된 것이라고 할 것인가? 거대한 음모(20) 일본을 편드는 국사편찬위원회 (94)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9.0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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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지문덕 장군이 격파했다는 수隋나라 정부 역사책 [수서隋書] 는 당나라 때 수정(변조)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부록1) 어느 부분이 어떻게 수정(변조) 되었는지는 지금은 알 수 없다. 다른 역사 기록보다 [코리아]에 좀더 유리하게 쓰여져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이다. 수서 동이열전 신라 조를 보자. 코리아 국사편찬위원회 원문은 차이나 국사도항 사이트 원문과 같았다.

 

[수서 권81, 열전 46 동이전. ] 국사편찬위원회는 목록을 표시하지 않았다.

 

新羅

 

新羅國,在高麗東南,居漢時樂浪之地,或稱斯羅。魏將毌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留者遂為新羅焉。故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獩之地。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

 

한 문장씩 보도록 하자.

 

2.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新羅國, 在 高麗 東南,

 

통상 차이나 역사책은 어느 나라의 서울을 기준으로 어느 나라의 위치를 표시한다. 이 문장에서 신라의 서울은 고(구)려 서울의 동남쪽에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서울이 차이나 대륙 서북쪽 (흔히 기억하는 대로 동북쪽이 아니다!)에 있었다면 신라의 서울이 동남쪽에 있어도 특별히 문제가 없다. 그런데 고(구)려의 서울이 차이나 대륙 동쪽 혹은 한반도 어디라고 한다면 신라의 서울을 지금 한반도의 경주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3. 신라 사람들은 차이나 한漢나라 때 낙랑樂浪 땅에 살았다. 사라斯羅라고도 한다. 居 漢時 樂浪之地, 或稱 斯羅.

 

슬슬 복잡해진다. 신라의 서울이 차이나 한漢나라 때 낙랑樂浪 땅에 있었다고 한다. 낙랑樂浪 땅을 한4군 중 하나인 낙랑군이라 하고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부일(친일) 국사편찬위원회의 주장대로라면 신라의 서울이나 고구려의 서울이나 같은 곳에 있었다는 해괴망칙한 결과가 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차이나 정부 역사책 [수서]도 위조된 것이라고 할 것인가?

 

차이나 역사책에 쓰여진 대로 [신라]가 낙랑 땅에서 시작했다면, 낙랑 관련 여러 역사기록을 제대로 해석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낙랑 땅이 지금의 산서, 산동, 하북, 하남 혹은 더 크게 강소, 호북성까지라고 한다면 그래도 서로 충돌 모순되지 않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보고 있는 [수서] [신라] 조의 기록에서 [낙랑]은 그리 넓은 지역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령 산동성 하북성 접경지역 정도의 넓이로 보인다.

 

나라 이름이 [신라] 혹은 [사라]라고 했다. [라]는 땅을 의미하는 말임으로 [신] 혹은 [사] 한 글자가 [신라]를 만든 사람(민족)을 부르는 ‘소리 (音(음)’이다.

 

4. 위魏나라 장수 무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는 옥저 沃沮로 쫓겨 갔다. 魏將毌丘儉討高麗, 破之, 奔沃沮.

 

뒷 문장까지 보면 [신라]의 최초 도읍지는 [옥저] 지역이다. 차이나 역사책이 워낙 거짓말을 많이 해서 코리아 사람들은 “ 위魏나라 장수 무구검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고구려가 원래 어디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옥저]로 쫓겨갔다.” 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1145년에 처음 쓰여진 [삼국사(기)]에 비슷한 기록이 있으니 그렇게 믿기 쉬웠다. 다시 잘 따져보아야 할 기록이다.

 

우리는 [옥저]는 한반도에 있다고 배웠다. 위魏나라는 지금의 차이나 황하 남쪽 낙양시가 서울이다. 위魏나라는 촉나라 오나라하고 전쟁하기 바빴다. 그런 무구검이 황하도 건너고, 무슨 강도 건너고, 무슨 강도 건너서 한반도 압록강 집안현 (우리는 [국내성]이라고 마음대로 부른다)까지 고구려를 쫓아와서 불사르고, 고구려는 지금의 한반도 함흥 지방으로 그 높은 개마고원, 낭림산맥을 넘어 도망갔다는 것이다.

 

낙양에서 한반도 압록강 집안현 까지 2023년 현재 고속도로 기준으로 1,712 ㎞ 이다. 창 들고 칼 들고 식량 들고 전쟁하지 않으면서 하루 30㎞ 걸어도 57일 걸리는 거리다. 이 거리를 전쟁하면서 왕복했다고 해석하는 국사편찬위원회는 진정한 의미의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요즘 표현으로 엄청난 스케일의 ‘뇌피셜’이다.

 

5. [그들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 갔는데, [이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新羅를 세웠다. 其後 復歸故國, 留者 遂 爲新羅 焉.

 

무구검이 순순히 위魏나라로 돌아가서 고구려가 무구검에게 빼앗겼던 고구려 서울로 다시 돌아가자 따라가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 [옥저] 땅에 [신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6. 그러므로 신라 사람은 화하(차이나)·고[구]려·백제의 사람들이 뒤섞여 있으며 故 其人 雜有 華夏·高麗·百濟之屬,

 

여기서 또 한번 충격을 받는다. 화하·고[구]려 사람이 섞여 사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백제]가 왜 나오는가? [옥저]가 [백제] 땅이거나 [백제]와 바로 붙어 있어야만 가능한 기록이다.

 

7. 옥저沃沮·불내不耐·한韓·예獩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兼有 沃沮·不耐·韓·獩之地.

[신라]는 옥저沃沮·불내不耐·한韓·예獩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옥저의 위치는 밝히지 못하고 있으나 [옥저]가 [신라]의 땅임은 위 문장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불내不耐·한韓·예獩 가 문제이다. 이는 다음 호에서 살펴보자.

 

8. 신라의 왕은 (그 왕은) 본래 백제사람이었는데, 其王 本 百濟人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自海 逃入 新羅, 遂 王其國.

海(해)지역으로부터 自海 (백제가 海(해)지역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도망쳐서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신라의 왕이 되었다.

 

1) 위 6번 문장에서 [옥저] 지역을 중심으로 [신라] 의 서울 지역에 고구려, 백제, 차이나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고 함으로 [백제] 사람이 [신라]의 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번 더 생각해 보자. 이 문장은 신라의 첫 번째 왕 즉 시조를 기록한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가 쫓겨 와서 고구려 유민들이 주축세력이 되어서 만든 나라이니 고구려 계가 [신라]의 왕이 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고 자연스럽다. [고구려] 계가 아니라 [백제] 계가 [신라]의 왕이 된 것은 특이한 사실임으로 차이나 역사책 [수서]가 기록한 것이다.

 

2) [백제]사람이 왕이 되었는데 그는 백제 땅인 海(해)지역으로부터 도망쳐서 신라에 들어온 것이다. 분명히 海(해)지역으로 [부터] 自海 라고 표시하고 있는데 국사편찬위원회는 “ 바다로 도망쳐 ” 라고 번역하여 기록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세금 먹고 노는’ 집단임이 분명하다. ‘海(해)’ 지역은 어디인가? (계속)

 

부록1

제기(帝紀) 5권, 열전(列傳) 50권, 지(志) 30권으로 총 8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621년 이연이 당나라를 건국한 후, 무덕(武德) 4년에 왕소(王劭)가 수서 18권을 완성하였다. (위키백과. 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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