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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는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신·구당서新·舊唐書] 뭐! ‘신라’가 ‘진한’이 아니라 ‘변한’이라고? ‘변한’이 ‘가야’ 아닌가? 차이나 대륙에서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지워라. 거대한 음모 (12)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82)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8.05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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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중국정사조선전 > 新唐書(1) > 東夷列傳 > 新羅 > 新羅, 弁韓苗裔也. 에 나오는 주 397이다.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jo_015_0020_0030_0010

 

1) 아래 註 397 新羅 弁韓苗裔也 는 굉장히 어렵게 쓰고 있다. 쉽게 써 보자.

 

‘신라’의 기원에 대하여 세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① 코리아 韓(한) 중 하나인 辰韓(진한)이 ‘신라’ [양서梁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한원翰苑 등]

 

② 기원후 250년 경 ‘무구검’ 고구려 침입 후 고구려 사람들이 당시 ‘옥저’ 근처에서 세운 ‘신라’ [ 수서隋書(수서)·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

 

③ 신라新羅는 변한弁韓의 후예이다.註 397 [신· 구당서新·舊唐書]

현재까지 배워온 [마한=백제, 진한= 신라, 변한= 가야]와 완전히 다른 말이다.

 

2) 註 397 新羅 弁韓苗裔也 :

新羅의 出自에 대한 대표적인 說로는『梁書』로부터 나타난 ‘秦世亡人’이라는 것과 毌丘儉侵入 以後의 高句麗系統의 殘留民이라는 주장이 있다.

 

전자의 기록을 답습한 文獻은『南史』·『北史』·『翰苑』등이며, 후자의 기록을 이어온 것은 『通典』·『文獻通考』등이다.

 

그러나 『新·舊唐書』는 이들과는 별도로 ‘弁韓之苗’라 하여 앞의 사료와는 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다.

 

1. 들어가는 말

거대한 음모 (11)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81) 의 계속이다. 읽기 쉽도록 전 호의 순서를 그대로 사용한다.

3.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세 번째 ‘후한서’

‘범엽’이 440년경 편찬한 ‘후한서’ 동이열전은 서론(王制云)·부여(夫餘)·읍루(挹婁)·고구려(高句驪)·동옥저(東沃沮)·예(濊)·한(韓)·왜(倭)·논(論曰)·찬(贊曰)으로 단락이 구분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왜(倭)만 빼고 모두 다 번역하였다.

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네 번째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삼국지에 ‘오환선비동이전’이라는 이름으로 오환·선비·동이가 나오며 동이 문단은 부여(夫餘)고구려(高句麗)동옥저(東沃沮)읍루(挹婁)예(濊)·한(韓)왜(倭)로 구분되어 있다. 백제·신라는 없다. 기원후 280년 경 편찬된 삼국지에 백제·신라는 없다.

5. 백제가 차이나 역사책 (소위 25사 정사 기준으로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기재 순서)에 처음 나온 것은 차이나 남북조 시대 南朝(남조)의 宋(송)서 이만열전에 고구려·백제로 같이 나온 것이다.

6. 南朝(남조) 梁書(양서) 동이열전에 고구려·백제·신라 순서로 ‘신라’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온다.

7. 北朝(북조) 위서 (魏書. 삼국지 위서가 아니다) 열전에는 고구려·백제·물길이 있다. 신라는 차이나 남부지방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소위 차이나 南北朝(남북조) 시대 (386~589) 南朝(남조)에는 ‘신라’ 기록이 있지만 ‘北朝(북조)’에는 ‘신라’ 기록이 없다.

8. 북조 주서(周書) 이역열전 에도 고구려·백제만 있다.

9. 남조 남사(南史) 동이열전에 고구려·백제·신라 순서로 나온다.

1) 원문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번역이다.

 

新羅의 선조에 관한 사적은『北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百濟의 동남쪽 5천여리 밖에 있다. 국토의 동쪽은 큰 바다와 沿해 있고, 남과 북은 [高]句麗·百濟와 접하고 있다.

魏나라 때는 新盧라 불렀고, 宋나라 때는 新羅 혹은 斯羅라 하였는데

 

新羅, 其先事詳北史, 在 百濟 東南 五千餘里. 其地 東濱大海, 南北 與 句麗·百濟接. 魏時曰 新盧, 宋時曰 新羅, 或曰 斯羅.

2)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는 신라를 숨기기 위한 의도로 기록된 것임으로 별 의미가 없다. 百濟의 동남쪽 5천여리 밖에 있는데 바로 다음 글에서 백제와 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0. 北朝(북조) 북사北史 열전에 고구려·백제·신라·물길 순서로 나온다. 북조 역사서에 ‘신라’가 처음 나온다. ‘북조’기록에 ‘신라’가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다.

 

1) 북사(北史)는 중국 북조의 역사서로 ‘이대사’에 의해 편찬이 시작되었고, 그의 아들인 ‘이연수’에 의해 완성된 이십사사 중의 하나인 역사서이다. 전체 100권이며, 본기 12권, 열전 8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북조 시대(439년 – 589년)의 북조에 해당하는 왕조인 북위, 서위, 동위, 북제, 수나라의 역사를 담고 있다. (위키백과 북사)

 

2) 원문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번역이다.

 

新羅註 127는 그 선조가 본래 辰韓의 종족이었다. 그 땅은 高[句]麗 동남쪽에 있는데, 漢나라 때의 樂浪 지역이다.

 

辰韓을 秦韓이라고도 한다. 대대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秦나라 때 流亡人들이 役을 피하여 [馬韓으로] 가자, 馬韓에서는 그 동쪽 지경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秦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秦韓이라 하였다고한다.

新羅註 126者, 其先 本 辰韓種 也. 地在高麗東南, 居漢時 樂浪地. 辰韓 亦曰 秦韓. 相傳言 秦世亡人 避役 來適, 馬韓 割其東界 居之, 以秦人, 故名 之曰 秦韓.

 

3) [신라가 한漢나라 때의 낙랑樂浪 지역이다.] 라는 기록을 유심히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11. 隋書(수서) 동이열전에도 고구려·백제·신라·물길 순서로 나온다.

1) 원문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번역이다.

新羅國, 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之地, 或稱斯羅.

신라국新羅國은 고[구]려高[句]麗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대漢代의 낙랑樂浪 땅으로서 사라斯羅라고도 한다.

 

魏將毌校勘 071丘儉討高麗, 破之, 奔沃沮.

위魏나라 장수 무구검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는 옥저沃沮로 쫓겨 갔다.

 

其後復歸故國, 留校勘 072者遂爲新羅焉.註 166

[그들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 갔는데, [이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신라新羅를 세웠다.註 166

 

故 其人 雜有 華夏·高麗·百濟之屬, 兼 有 沃沮·不耐·韓·獩之地.

그러므로 그 나라는 중국·고[구]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沃沮·不耐(내, 능)·韓·獩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其王 本 百濟人,註 167 自 海 逃入 新羅, 遂王 其國.

그 나라의 王은 본래 百濟 사람이었는데,註 167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2) [ 其王 本 百濟人,註 167 自 海 逃入 新羅, 遂王 其國.

그 나라의 王은 본래 百濟 사람이었는데,註 167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여기서 海(해)는 당연히 ‘바다’가 아니다. 백제와 신라의 경계에 있는 海(해) 는 어디일까? 백제 사람으로 신라의 왕이 된 사람이 있는가?

3) 수나라 역사책 隋書(수서)는 기원후 250년 경 조조의 魏(위)나라 장수 무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구려는 옥저까지 (옥저가 위치는 어딘지 모른다) 후퇴했다가 다시 복귀했는데 그 때 복귀하지 않은 고구려 세력이 신라를 세웠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아래 세 가지는 확실하다.

3-1) 250년 이전에 신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3-2) 신라의 첫 도읍지는 옥저 어디이다.

3-3) 이 기록의 ‘신라’가 다른 기록의 ‘신라’와 같은 것인지는 증명할 수 없다.

 

4) ‘신라’ 백성은 차이나華夏, 고구려, 백제에 속한 백성들이 섞여 있었고雜有, 옥저, 불내, 코리아韓(한), 예獩의 땅이 섞여兼 있었다. 故 其人 雜有 華夏·高麗·百濟之屬, 兼 有 沃沮·不耐·韓·獩之地.

4-1) 漢(한)나라때 낙랑 이었고, 魏(위) 나라 때는 차이나華夏, 고구려, 백제, 옥저, 불내, 코리아韓(한), 예獩 가 같이 있는 곳이었으니 결국 지금의 하북성, 산서성, 산동성, 하남성, 강소성을 포함하는 지역일 수 밖에 없다.

 

12. 舊唐書(구당서) 동이열전에 고구려·백제·신라 순서로 나온다. 북적열전으로 말갈과 발해말갈을 기록하고 있다.

 

1) 신라왕을 낙랑군공 신라왕 이라 하니, 낙랑이라는 지역에서 신라가 건국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낙랑’은 한반도 평양 일대는 당연히 아니고, 차이나 대륙 어디인지를 찾아야 한다. 낙랑= 조선임을 기억하자. 차이나 대륙 황하 유역 일대 동쪽 전부가 낙랑= 조선이다. (부록1)

 

2) ‘신라 진평왕’부터 기록이 나오는데 비단 300단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장의 내용으로만 보면 신라가 당나라에 조공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가 신라에 조공한 듯 하다.

 

3) [그 나라는 漢代의 樂浪 땅에 있으니,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 연하여 있고, 서쪽은 百濟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高[句]麗와 인접하였다. 동서로 1천리, 남북으로 2천리이다.]는 기록에서 숫자에 너무 집착할 필요 없다.

 

樂浪낙랑이 지금의 어디인지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차이나 특유의 역사왜곡으로 고구려·백제·신라를 지우는 판인데 역사책의 숫자와 방향에 집착해서는 차이나가 파 놓은 덫에 걸려 헤어나오지 못한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기원전 100년에 쓰여진 차이나 최초의 공인 역사책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에 ‘낙랑’은 없다. 기원후 100년에 쓰여진 반고의 ‘한서’에 ‘낙랑’이 처음 나온다!

 

 

13. 신당서 동이열전에 고구려·백제·신라 순서로 나온다. 북적열전으로 흑수말갈과 말갈을 기록하고 있다.

 

1) 원문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번역이다.

 

新羅註 396

 

(東夷 新羅) 新羅, 弁韓 苗裔 也.註 393

新羅는 弁韓의 후예이다.註 397

 

居 漢 樂浪地, 橫千里, 縱三校勘 183千里, 東拒 長人,註 394 東南日本, 西 百濟, 南 瀕海, 北 高麗.

漢代의 樂浪[郡] 땅에 위치하니,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동쪽은 長人[國]註 398에 닿고, 동남쪽은 日本, 서쪽은 百濟, 남쪽은 바다에 연해 있으며, 북쪽은 高[句]麗와 [접해 있다.]

 

而王居 金城, 環八里所, 衛兵 三千人. 謂 城 爲 侵(침)牟羅, 邑在內 曰 喙(주, 훼)評, 外曰 邑勒. 有 喙評 六, 邑勒 五十二.

王은 金城에 사는데 그 둘레는 8리이며 衛兵은 3천명이다. 城을 侵 牟羅라 부르며, 그 邑이 [侵牟羅의] 안에 있는 것은 喙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邑勒이라 한다. 喙評은 6군데, 邑勒은 52군데 있다.

 

朝服尙白,註 395 好祠校勘 184山神.註 396 八月望日, 大宴賚官吏, 射.註 397

朝服은 흰 빛을 숭상하고,註 399 山神에게 제사하기를 좋아한다.註 400 8월 보름날에는 벼슬아치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어 주고 활쏘기를 시킨다.註 401

 

2) [ 東拒 長人,註 394 동쪽은 長人[國]註 398에 닿고,]에서 신라의 동쪽에 있던 ‘키다리나라 長人[國]’는 어디일까?

 

신라가 한반도 동해안 경주에 있었다면 상상이 안 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놀랍지만 저급한 상상력을 동원한다. 주394 원문이다.

 

2-1) [註 394 東拒長人 : 長人國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이 없으나 宇山國(鬱陵島)일 가능성이 크다.]

우산국이 현재 대한민국 울릉도 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차이나 漢(한)과 코리아 韓(한) 은 차이나 漢(한) 때 붙인 이름인 낙랑 지역을 두고 서로 쟁패했다. 낙랑지역은 지금의 하북성, 산동성, 하남성, 강소성에 이어지는 지역으로 차이나 漢(한) 나라나 魏(위)나라가 지배권이 있었다고

 

“현대에 일본이 한반도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우기는 것과 같이 ”

 

우기면서 이를 차이나 역사책에서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2-2) [ 『三國史記』「異斯夫列傳」에 의하면 ‘謂 其國人 愚悍(사나울 한) 難 以威 降’이라 하여 『新唐書』와 의미상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또한 그 나라가 중국측에 알려졌는지도 불확실하다.]

 

이 부분을 쓴 국사편찬위원회의 저자를 꼭 알고 싶다. [‘謂 其國人 愚悍(사나울 한) 難 以威 降’이라 하여 『新唐書』와 의미상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라고 하는데

 

‘謂 其國人 愚悍(사나울 한) 難 以威 降’를 번역하면

“ 이르기를 그 나라(우산국) 사람은 어리석지만 사나워서 위엄(허장성세)로 항복시키기 힘들다.”로 번역되는데

 

무엇이 “ 『新唐書』와 의미상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인가?

 

죽은 역사 매국노 “ 이병도 ”가 다시 살아난 것 같다.

3) 신당서 동이열전 신라조에서 빈해瀕海 는 어디일까? 西 百濟, 南 瀕海, 北 高麗.

 

낙랑 땅에 횡(동서 라고 하자)으로 천리, 종(남북)으로 3천리인 땅인데 남으로 빈해에 닿는다. 낙랑 땅이 지금의 산동성이라면, 빈해는 지금의 주산군도가 아닐까? 居 漢 樂浪地, 橫 千里, 縱 三千里,

 

4) 성을 侵 牟羅 라고 한다. 謂 城 爲 侵(침)牟羅

4-1) ‘침모라’는 치(우두머리 치) + ᄆᆞᆯ (모라 는 ‘ㅁ’+‘ㄹ’+‘ㅏ’) 로 풀이할 수 있다. 건모라健牟羅 (남사 동이열전)의 건健 (큰) 이나 탐모라耽牟羅 (수서 백제전)의 탐耽 글자와 같은 용법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4-2) 우두머리가 사는 마을이 치 마을= ‘치ᄆᆞᆯ’ 이다.

 

4-3) 牟 는 고깔모자 모厶 + 소 우牛 인데 이는 牛頭(우두)머리 (소머리)와 통한다. 牟羅 는 우두머리의 땅, 즉 왕성이다.

 

4-4) 라羅, 로盧, 나那는 ‘땅’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新羅(신라) 도 ‘새 땅’ 혹은 ‘쇠 땅’이다. 斯盧(사로)는 신라의 옛 이름이다. 徐那伐(서나벌) 역시 신라의 다른 이름이라고 배워 왔다. 南史(남사)에서는 新盧라고 표기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왕의 칭호는 거서간(居西干) 또는 거슬한(居瑟邯)이라 하였다. 또한, 나라이름을 서나벌(徐那伐) · 서라벌(徐羅伐) ·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 사로(斯盧)라 하였다.] ( 혁거세 거서간 (赫居世 居西干)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국정사조선전 > 新唐書(1) > 東夷列傳 > 新羅 > 新羅, 弁韓苗裔也. 에 나오는 주 397이다.

https://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jo_015_0020_0030_0010

 

1) 註 397 新羅 弁韓苗裔也 :

新羅의 出自에 대한 대표적인 說로는『梁書』로부터 나타난 ‘秦世亡人’이라는 것과 毌丘儉侵入 以後의 高句麗系統의 殘留民이라는 주장이 있다.

전자의 기록을 답습한 文獻은『南史』·『北史』·『翰苑』등이며, 후자의 기록을 이어온 것은 『通典』·『文獻通考』등이다.

그러나 『新·舊唐書』는 이들과는 별도로 ‘弁韓之苗’라 하여 앞의 사료와는 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다.

 

2) 굉장히 어렵게 쓰고 있다.

‘신라’의 기원에 대하여 세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① 코리아 韓(한) 중 하나인 辰韓(진한)이 ‘신라’ [양서梁書· 남사南史·북사北史·한원翰苑 등]

② 기원후 250년 경 ‘무구검’ 고구려 침입 후 고구려 사람들이 당시 ‘옥저’ 근처에서 세운 ‘신라’ [ 수서隋書(수서)·통전通典·문헌통고文獻通考 ]

③ 신라新羅는 변한弁韓의 후예이다.註 397 [신·구당서新·舊唐書]

현재까지 배워온 [마한=백제, 진한= 신라, 변한= 가야]와 완전히 다른 말이다.

 

 

부록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중국정사조선전 > 新唐書(1) > 東夷列傳 > 新羅 > 新羅, 弁韓苗裔也.

 

○ 新羅註 392

(東夷 新羅) 新羅, 弁韓苗裔也.註 393

 

居 漢樂浪 地, 橫 千里, 縱 三校勘 183千里, 東拒 長人,註 394 東南 日本, 西 百濟, 南 瀕海, 北 高麗. (서쪽은 말할 필요 없이 ‘차이나 (唐(당)나라) 임으로 서술하지 않고 있다!)

 

而 王居 金城, 環 八里 所, 衛兵 三千人. (신라왕 호위부대가 3천명이다!)

 

謂城 爲 侵牟羅, 邑 在 內曰 喙評, 外曰 邑勒. 有 喙評 六, 邑勒 五十二.

 

朝服尙白,註 395 好祠校勘 184山神.註 396 八月望日, 大宴賚官吏, 射.註 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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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2 舊唐書(1) > 東夷列傳 > 新羅 > 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

 

新羅國, 本 弁韓之苗裔也.

新羅國은 본래 弁韓의 후예이다.註 229

 

其國在 漢時樂浪之地, 東及南方俱限 大海, 西接 百濟, 北鄰 高麗. 東西 千里, 南北二千里.

그 나라는 漢代의 樂浪 땅에 있으니,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 연하여 있고, 서쪽은 百濟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高[句]麗와 인접하였다. 동서로 1천리, 남북으로 2천리이다.註 230

 

有 城邑 村落. 王之所居 曰 金城校勘 146, 周 七八里.註 229 衛兵三千人,註 230 設 獅校勘 147子隊.註 231

城邑과 村落이 있다. 王이 사는 곳은 金城으로, 둘레가 7·8리이다.註 231 衛兵은 3천명으로,註 232 獅子隊註 233를 설치하였다.

 

文武官은 모두 17등급이 있다.

文武官凡有十七等.

 

其王 金眞平, 隋文帝時 授 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註 232 武德四年, 遣使朝貢. 高祖親勞問之, 遣 通直散騎侍郞 庾文素 往使焉, 賜以 璽(새)書 及 畫屛風·錦綵 三百段,註 233 自此 朝貢不絶.註 234

 

그 나라의 王 金眞平은 隋 文帝 때에 上開府 樂浪郡公 新羅王을 除授받았다.註 234 武德 4년(A.D.621; 新羅 眞平王 43)에 使臣을 보내어 朝貢을 바쳤다. 高祖는 친히 노고를 치하하고, 通直散騎侍郞 庾文素를 使臣으로 보내어 璽書 및 그림병풍과 비단 3百段을 하사하였다.註 235 이로부터 朝貢이 끊이지 않았다.註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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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3 梁書 > 東夷列傳 > 新羅 > 新羅者, 其先本辰韓種也.

 

新羅註 107

新羅註 108者, 其先 本 辰韓種也.註 109

 

辰韓註 110亦 曰 秦韓,

 

相去萬里, 傳言 秦世亡人 避役 來適馬韓,

 

馬韓 亦割 其 東界 居之, 以秦人, 故 名之曰 秦韓.

 

其 言語名物 有似 中國人, ( “中國人” 후대 삽입, 조작의 흔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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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4 南史 > 東夷列傳 > 新羅 > 新羅, 其先事詳北史, 在百濟東南五千餘里.

 

新羅註 052

新羅, 其先事詳北史, 在百濟東南五千餘里. 其地東濱大海, 南北與句麗·百濟接. 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註 053

[ 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에서 盧, 羅 는 ‘땅, 영토’ 라는 의미로 쓰인 단어이며 발음도 매우 비슷하다. 로, 라 인데 ‘ᄅᆞ’ 발음으로 유추하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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