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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韓(한)의 학생들이 ‘마한’이 ‘백제’, ‘진한’이 ‘신라’, ‘변한’은 ‘가야’라고 기계적으로 외우는 한 [코리아 역사의 광복]은 절대 없다! 차이나 대륙에서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지워라. 거대한 음모 (10)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80)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7.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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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지 위서 ()조에 나오는 위략’(이라는 역사책)조선에 대한 글을 계속 살펴 보자. 이후로 왜와 ()은 비로소 대방에 속했다.” (이하 ‘200년 사건이라 한다)

·靈之末, ·濊 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 韓國. 建安中, 公孫康 分 屯有縣 以南荒地 爲 帶方郡,

 

遣 公孫模·張敞等 收集 遺民, 興兵 伐 韓·, 舊民 稍 出, 是後 ·韓 遂屬 帶方.

 

2. 삼국지 위서 ()조의 해당 부분 요약이다.

 

대방군은 한서지리지에서는 낙랑군 대방현이었다. ‘코리아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경한다.

 

기원후 189년 경에 마한과 예가 모두 강성해져 차이나 ()나라의 백성들이 마한으로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원후 210년 경 공손강이 낙랑군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었다. 원래 대방현이 있었으니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와 대방현이 합쳐진 것이라고 본다.

 

공손모·장민 등이 코리아 한과 예를 정벌하자, 코리아 한은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 현재 국사학계가 중고교 교과서를 편찬한 대로 해석하면 한반도 전역이 차이나 대방군에 속하게 된다.

 

기원후 248년 경 (백제 고이왕 4~6) 에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 사가 몰래 해를 넘어서 대방·낙랑 두 군을 평정하였다.

 

이후 코리아 ()’이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대방태수 궁존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다. ‘궁존은 전사하였으나 낙랑·대방 2군은 마침내 코리아 한을 멸하였다. 이 기록을 따르고 한반도에 백제 신라 가야가 있다는 견해를 고집하면 백제 신라 가야는 하늘에서 떨어져 생겨난 것이 된다.

 

3. 원문은 三國志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 삼국지 권30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제30 (차이나 국학도항 사이트)에서 가져 왔고, 번역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번역을 필자가 임의로 고쳐 쓰고 의견을 담.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30 동이전(東夷傳) > ()>景初 연간(A.D.237~239; 百濟 古爾王 4~6)...[한국사데이터베이스]

 

1) 正始 六年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 弓遵 以 領東 濊 屬 句麗興師 伐之不耐侯等 舉 邑降

正始 6(기원후 245) 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영토동쪽의 예(동예가 아니다)[]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불내후不耐侯 (낙랑군에 불이不而현이 있다.)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을 국사편찬위원회는 단단대령이라고 하나 특별한 근거가 없다. 필자는 동의하지 않으며 일단은 영토라고 해석한다. 좀 더 연구해 볼 분야이다.

 

낙랑지방의 불내不耐혹은 불이不而이 예의 영토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2) 其八年詣闕 朝貢詔 更拜 不耐濊王居處雜在民間四時詣郡朝謁

二郡 有 軍征 賦調供給役使遇之如民

정시 8(기원후 247)에는 [나라의] 조정에 와 조공하므로, 불내 예왕不耐濊王 으로 봉하였다.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계절마다 (낙랑·대방)군에 와서 조알하였다. 2군에 전쟁부역이 있거나 조세를 거둘 일이 있으면, [의 백성에게도] 공급케 하고 사역을 시켜 마치 차이나 ()나라의 백성처럼 취급하였다.

 

낙랑지방의 불내不耐혹은 불이不而을 지배했던 예()不耐濊王(불내예왕)으로 임명했다.

 

3) 韓在 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

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중략)

코리아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경하니, 면적이 방 4천리 쯤 된다.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세째는 변한인데, 진한辰韓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중략)

 

[진한辰韓은 옛 진국辰國이다.] 그러나 진국辰國 에 대하여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차이나 역사가들은 한민족의 역사를 가능한 숨기고, 밝히더라도 축소해 왔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진국辰國 의 진[ , , 별의 총칭(總稱), 일월성(日月星). 북극성(北極星).임금, 천자(天子)...] 등 좋은 뜻은 모두 가지고 있는 글자이다. 진국辰國 은 가장 으뜸되는 나라이며,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가 다스리는 나라이다.

 

진한을 진국이라 하면서 辰韓者古之辰國也자연스럽게 [조선=()=辰國(진국) =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가 다스리는 나라] 임을 밝히고 있다.

 

4) 侯準 既僭號 稱 王為 燕亡人 衛滿 所攻奪將其左右宮人 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

조선 후 준이 참람되이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그의 주요 참모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 지역으로 들어가서 코리아 한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차이나 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철마다 조알하였다.

 

4-1) ‘삼국지 위서는 조선왕 준이 ()만에게 기습당하여 불과 몇 십명을(左右宮人) 데리고 원래 조선연방 소속인 코리아 ()나라에 가서 왕이 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4-2) 그러나 후한서 동이열전은 조선왕 준이 ()만과 큰 전투를 벌이고 패하여 수천인을 데리고 ()’지역으로 들어가 기존 세력인 마한을 꺾고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여 삼국지 위서와 큰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사실 권력의 속성상 최고권력자의 지위를 어서옵쇼하고 물려 주는 사례는 없다. 항상 피가 수반되는 전쟁이 있는 것이 상식이다.

 

후한서(後漢書) > 동이열전(東夷列傳) > () > 弁辰 사람들은 辰韓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데,

 

, 朝鮮王 準 爲衛滿 所 破, 乃 將其 餘衆 數千人 走入海, 攻 馬韓, 破之, 自立爲 韓王

처음에 조선왕 준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코리아 한나라의 왕이 되었다.

 

5) 其後絕滅今韓人猶 有 奉其祭祀者漢時 屬 樂浪郡四時朝謁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5-1) ‘삼국지 위서가 조선왕 준이 평화적으로 코리아 ()을 접수한 것처럼 기록한 것과 비교할 때 후한서 동이열전은 코리아 ()을 대표하는 ()= 마한의 왕 자리를 두고 치열한 권력투쟁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후한서) 準 後 滅絶, 馬韓人 復 自立爲 辰王.

의 후손이 끊기자, 마한 사람이 다시 自立하여 辰王이 되었다.

 

6) 靈之末韓濊彊盛郡縣不能制民多 流入 韓國

()나라 영제 말년(189년 경)에 마한과 예가 모두 강성해져 ()나라의 군현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코리아 한으로 도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7) 建安中公孫康 分 屯有縣 以南 荒地 為 帶方郡

후한 연호 건안 연간(196~220)에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8) 遣 公孫模張敞等 收集 遺民興兵 伐 韓·舊民 稍 出是後 倭·韓 遂屬 帶方

(이하 ‘200년 사건이라 한다.) 공손모·장민 등을 파견하여 [차이나 한나라에 속하는 조선의 백성遺民]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코리아 한과 예를 정벌하자, ‘코리아 한’·로 갔던 옛날 백성들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왜코리아 한은 드디어 대방帶方에 복속되었다.

 

8-1) 코리아 한보다 앞에 쓴 것은 사실상 왜와 코리아 한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는 바다 건너 지금의 일본열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코리아 한과 같이 낙랑군 둔유현 이남에 설치된 대방군에 있었다.

 

9) 景初中, 明帝 遣 帶方太守 劉昕· 樂浪太守 鮮于嗣 越海 定 二郡, (이하 ‘238년 사건이라 한다)

나라 명제연호 경초 연간 (237~239. 고구려 동천왕, 백제 고이왕) 에 위나라 왕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 사를 파견하여 해를 넘어서 대방·낙랑 두 군을 평정하였다.

 

9-1) 기원후 238년 경은 차이나 ()나라는 이미 망한 상태이고 [후한後漢, 기원후 25~220), 조조의 ()나라가 오나라, 촉나라와 싸우던 차이나의 위··오 삼국시대이다.

 

()나라가 국경이 바로 붙어 있지 않다면 낙랑·대방에 있는 코리아 ()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 낙랑·대방은 차이나 대륙 한복판 ()나라의 동쪽과 동남북쪽에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9-2) 월해越海(해를 넘다)의 해는 어디일까? 몰래넘어간 곳으로 ()이나 호수일 것이고, 유력한 것은 황하.

 

삼국지 위서()조 첫 머리에서 [ 韓 在 帶方之南, 東西 以海 爲限, 南 與倭 接, 方可 四千里. ‘코리아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해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라고 했다.

 

코리아 ()’의 동쪽은 지금의 황해임으로 로 한계를 삼는다는 표현은 정확하다.

 

코리아 ()’의 서쪽에 있는 [황하나 다른 강] 혹은 [황하나 다른 강에 인접한 호수]인 것이다.

 

이 사건 전까지 차이나 ()나라, ()나라는 낙랑·대방지역에 실효적 지배를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몰래(황하)를 넘어가 낙랑·대방의 중심지역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9-3)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동이전 서문 에 ‘238년 사건을 먼저 기록하고 있다.

 

기원후 238년 경 [나라 명제가 공손 ] 연을 죽였다. 몰래 潛軍 ()를 둥둥 떠 가서 浮海낙랑과 대방에 있는 군을 수복하니 收 樂浪帶方之郡 이후에 () 지역 (海表)이 표면적으로는 안정되었고, 동이東夷들이 굴복하였다.東夷屈服.”

 

景初中大興 師旅誅淵潛軍 浮海收 樂浪帶方之郡而後 海 表 謐(고요할 밀)東夷屈服

 

浮海라는 표현은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종제 부발해 從齊 浮 渤海 지역에서 발해를 둥둥 떠 갔다] 와 같은 표현이다. 이를 근거로 浮海를 발해로 볼 수 는 없지만 발해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물론 여기서 발해는 지금 황해의 일부분인 바다 발해가 아니라 황하의 일부분인 호수 발해를 말한다.

 

‘238년 사건을 두 번이나 기록한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을 진실이라고 우기는 것이 역력하다. 사실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으로 본다. 즉 위나라는 단 한 번도 낙랑·대방 지역에 있던 코리아 ()을 지배한 적도 없고, 침공에 성공한 적도 없는 것이다.

 

10) 諸 韓 國臣 智 加 賜 邑君 印綬, 其次 與 邑長.

여러 코리아 한의 신하 (.)’에게는 차이나 한군현의 태수에 해당하는 읍군의 명칭과 도장을 주었다. ‘읍군다음 지도자는 읍장으로 대우하였다.

 

11) 其俗 好 衣幘(), 下戶 詣郡 朝謁, 皆 假衣幘, 自 服 印綬 衣幘 千有餘人.

코리아 한의 풍속은 두건衣幘 쓰기를 좋아하여, 신분이 낮은 평민 하호下戶들도 낙랑·대방군에 가서 조알할 적에는 모두 두건衣幘을 임시적으로 착용한다. 자신의 허리에 인장印綬을 차고 두건衣幘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명이나 된다.

 

12) 部從事 吳林 以樂浪 本統 韓國, 分割 辰韓 八國 以與 樂浪, (이하 부종사 오림 사건이라 한다)

의 종사(벼슬 이름) ‘오림은 낙랑이 본래 코리아 한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진한 8(12국이 아니다)을 분할하여 낙랑에 넣으려 하였다.

 

당시는 차이나 ()나라 낙랑군 태수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유스런 상태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기록이다.

 

13) 吏譯轉 有 異同, 臣智 激 韓 忿(), 攻 帶方郡 崎離營.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전하는 과정에서 틀리고 맞는 부분이 있어,

 

신지臣智’ = ‘(차이나의) 신하이면서 코리아의 사실상 우두머리인 치라는 아주 나쁜 표현이다.)

 

코리아 ()’나라 사람韓人들을 선동하여 (차이나는 잘못이 없다는 아주 나쁜 표현)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14) 時 太守弓遵 · 樂浪太守 劉茂 興兵 伐之, 遵戰死, 二郡 遂滅 韓.

이 때 대방태수 궁존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존은 전사하였으나 낙랑·대방 2군은 마침내 코리아 한을 멸하였다.

 

14-1) ‘238년 사건과 비교해 보자.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 사’] [대방태수 궁존과 낙랑태수 유무’]로 바뀌었다. ‘238년 사건대비하여 10년 후에 부종사 오림 사건이 발생했다고 가정하면 대략 기원후 250년 경 발생한 사건이라고 추정하겠다.

 

14-2) ‘부종사 오림 사건사실이라고 할 지라도 최소 기원후 250년 경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볼 것이다.

 

기원후 250년 이후 차이나 대륙 北朝(북조)()나라 (220~265)와 이어지는 ()= 서진 (265~316)이 주도권을 가지고 北朝(북조)의 여러 나라를 잠깐이나마 장악한 시기였다. 그러나 곧, 516국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北朝(북조)는 숱한 왕조와 나라가 만들어지고 없어졌다.

 

15) ‘부종사 오림()나라 시대(220~265) 사람인지 서진= ()나라 시대 (265~316) 사람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위촉오가 전쟁을 하는 격변기에,

 

()나라 든 서진이든 낙랑·대방을 실질 지배할 수 없었다.

 

이름 뿐인 낙랑·대방 태수 들에 의해 ()이 멸망당했다는 기록은 거짓일 수 밖에 없다.

 

차이나는 가공의 낙랑·대방 태수들에(실제 존재한 인물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의해 코리아 () 이 멸망당했다고 해야 신라·백제를 지우기 좋다. 차이나는 결코 차이나 대륙에 있는 코리아의 역사를 진실대로 기록하지 않는다.

 

코리아 학생들이 마한백제진한신라변한가야라고 기계적으로 외우는 한, 코리아 역사의 광복은 절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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