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국지 동이열전 한조’와 ‘후한서 동이열전 한조’ 에 廉斯 염사 가 같이 나온다. 삼국지와 후한서 두 책에 같이 나오는 기사가 많다. 삼국지가 285년에 편찬되었지만 600년 경 배구(557~627)가 증보하였고, 후한서는 440년 경 편찬된 것이다. 좋은 말로 ‘서로 참조’하였고, 서로 베낀 부분이 많을 수 밖에 없다.
1)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염사廉斯 鑡착이 나온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韓)조]에 염사인廉斯人 蘇馬諟소마제 가 나온다. 후한 시절에 郡(군) 밑에 邑(읍)이 있었다. ‘蘇馬諟소마제’ 는 낙랑군樂浪 郡 염사읍군廉斯 邑君이 된다.
2) 염사 착廉斯 鑡에서 鑡착 은 돈, 쇠덩이, 사람이름이라고 네이버는 설명하고 있다. 글자 형성원리로 보면 金(금)과 齒(치)가 합쳐진 것인 바 ‘치’로 읽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인다. 차이나 사성음은 chuò 추이다. ‘치’는 장사(아)치, 길치 등 사람을 낮추어 부르는 접미사이다. 아주 오래 전에는 낮추어 부르는 말이 아니었을 수 있다. 염사廉斯 鑡착은 염사廉斯 지방의 우두머리 鑡치 일 가능성이 높다.
2. 낙랑군樂浪 郡 염사읍廉斯 邑을 중심으로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지명비정을 해보자. (1) 먼저 차이나 国学导航-後漢書 후한서 사이트에 나오는 원문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번역이다.
1) 初,朝鮮王 準 為 衛滿 所破,乃 將其餘眾 數千人 走入海,攻 馬韓,破之,自立為 韓王。準 後 滅絕,馬韓人 復自立 為 辰王。
과거에 朝鮮王 準이 衛滿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韓王이 되었다. 準의 後孫이 絶滅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自立하여 辰王이 되었다.
1-1) 走 入海에서 해海는 바다가 아니라 해海 가 들어간 육지임을 지난 글에서 증명했다. 이 글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육지에 있는 마한을 공격할 수는 없는 것이다. 走 入海,攻 馬韓,破之
해海 후보지로는 한서지리지에 나오는 발해군, 북해군, 동해군을 제시한 바 있다.
어느 해海 지역이 마한에 속하거나 마한과 가까운 곳임을 알 수 있다.
1-2) 走 入海,攻 馬韓,破之,自立為 韓王。準 後 滅絕,馬韓人 復自立 為 辰王。마한을 격파하고 스스로 한의 왕이 되었으니 이 글에서 마한은 한韓이고 마한馬韓은 진辰 의 일부 임을 알 수 있다. 馬韓人 復 自立 為 辰王。
2) 建武二十年,韓人 廉斯人 蘇馬諟 等 詣樂浪 貢獻。〔一〕 光武 封 蘇馬諟 為 漢廉斯邑君,使屬 樂浪郡,四時朝謁。
건무 建武 20년(A.D.44; 百濟 多婁王 17) 에 한韓의 염사廉斯註 134 사람인 소마시(제)蘇馬諟 등이 낙랑樂浪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소마시(제)蘇馬諟를 봉封하여 한漢의 염사읍군廉斯邑君으로 삼아 낙랑군樂浪郡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朝謁하도록 하였다.
靈帝末,韓、濊並盛,郡縣不能制,百姓苦亂,多流亡入韓者。〔一〕 廉斯,邑名也。諟音是。
영제靈帝 말년에 한韓과 예濊가 모두 강성해져 [漢나라의] 군현郡縣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자,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한韓으로 도망하여 流入하는 경우가 많았다.
2-1) 한韓=마한馬韓=진辰은 낙랑군 염사읍과 매우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확히는 ‘지역 낙랑’은 차이나의 주장대로라면 한4군이 설치된 지역이고 ‘지역 海(해)=마한 나라’로서 ‘지역 낙랑’과 붙어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지역 海(해)=마한 나라’ 는 ’차이나가 ‘낙랑군’으로 ‘침발라’ 놓은 지역도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2) 소마시(제)蘇馬諟 는 소마 + 시(제) 蘇馬 + 諟 로 구분할 수 있고 諟 는 주석에서 是 로 읽어라고 한다.是는 시, 제 두 가지로 읽고 諟 는 시, 체 로 읽는다. 諟 는 ‘치’와 발음이 비슷할 것이다.
삼국지 염사廉斯 鑡착에서 鑡을 ‘치’로 읽을 수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蘇馬諟 소마치 로 읽고 이름이 ‘소마’인 우두머리 ‘치’ 합쳐서 ‘소마 치’라고 본다.
3. 낙랑군樂浪 郡 염사읍廉斯 邑을 중심으로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지명비정을 해보자. (2) 차이나 국학도항国学导航-三國志삼국지 사이트에 나오는 원문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번역이다.
1) 漢時屬 樂浪郡, 四時 朝謁.〔三〕 [韓은] 한漢나라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에 소속되어 철마다 조알朝謁하였다.
〔三〕魏略曰:위략이 말하기를->2) 이하는 위략에 나오는 말이다.
2) 初,右渠 未破時,朝鮮 相 歷 谿卿 以 諫 右渠 不用,東之辰國,
일찍이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朝鮮 상相 歷谿卿역계경이 우거右渠에게 간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註 164으로 갔다.
2-1) 필자는 初,右渠 未破時,朝鮮 相 歷 谿卿 以 諫 右渠 不用,東之辰國,를
[ 일찍이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의 어떤 재상朝鮮 相이(이름 모름) “예谿=濊(예)” 의 관리(장로長老) “경卿”을 歷통하여서 우거右渠에게 간諫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註 164으로 갔다.] 고 번역한다.
2-2) 朝鮮 相 은 조선의 재상 (승상)으로 최고 지위이다. ‘사기 조선열전’의 주석 중에 ‘집해 한서음의集解 漢書音義’ 와 ‘색은 응소索隱 應劭’는 “ (글쓴이 들이 아니라) 융적(조선)은 관등을 알 수 없어 모두 승상이라고 칭한다.” 고 악의적으로 표현했다. 주목할 것은 조선을 융적戎狄 이라 한 것이다. 융적은 삼국지 이후 시대에는 통상 서쪽 오랑캐를 지칭했다.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이다.
(고)조선이 차이나 동쪽에 있었다는 고정 관념을 버리고 ‘동이’로 표시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고)조선은 차이나 낙양 기준 동북이 아니라, 서북에서 왔을 수도 있는 것이다. [부록1]
[사기 조선열전 끝 부분]
朝鮮 相 路人、相 韓陰、尼谿 相 參、將軍 王唊〔一〕 相 與 謀 曰
〔一〕集解 漢書音義 曰:「凡五人也。戎狄不知官紀,故皆稱相。唊音頰。」
索隱 應劭 云:「凡五人。戎狄不知官紀,故皆稱相也。路人,漁陽縣人。」
如淳云:「相,其國宰相。路人,名也。唊音頰,一音協。」
2-3) 朝鮮 相 歷 谿 卿 에서 ‘조선의 재상 이름이 역계경’이 아니라, ‘조선의 재상이 谿=濊(예)의 관리 경卿을 경유하여’ 로 해석해야 한다.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이계尼谿 를 濊(예) 로 보았다.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사기 조선열전’ 주석 주36 원문이다.
“ 이계尼谿를 예濊의 反切音으로 보아 예濊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海東繹史』「衛滿朝鮮」 元封 2年條) (중략)
조선상 역계경 朝鮮相 歷谿卿은 마지막 왕인 우거右渠가 미파시未破時에 간諫하였던 모양이나 들어주지 않자 동쪽 辰國으로 갔다는 것이다.
결국, 朝鮮 相은 王 밑에 있었던 가장 最高의 지위였을 것이다. 또한 하나이지 둘은 아니었을 것이며, 末期에 나오는 朝鮮 相 路人은 朝鮮相 歷谿卿이 떠난 뒤에 그 자리에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
2-4) 尼谿 이(니)계 혹은 이(니)혜 는 반절로 읽으면 ‘예(녜) ’ 가 된다.
谿(시내 계, 다툴 혜) 溪(계)와 동자(同字). 뜻을 나타내는 골곡(谷 ☞ 골짜기)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奚(해→계)가 합(合)하여 이루어짐. (네이버 한자사전)
여기서 奚 는 ‘해’뿐만 아니라 ‘계’로 발음될 수도 있고, 고대에는 ‘ㅎ’과 ‘ㄱ’,‘ㅋ’사이의 어떤 발음이 있었고 ‘ㅐ’ 역시 ‘ㅖ’ 로 발음이 서로 혼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서지리지에 나오는 많은 奚 (해, 혜)가 들어가는 지명은 예濊 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3) 時 民 隨出居者 二千餘戶,亦 與 朝鮮 貢 蕃 不相往來。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戶註 165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朝鮮에 조공하는 번국藩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3-1)[蕃 은 우거질 번, 고을 이름 피.]이다. 오랑캐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조선 공번朝鮮 貢 蕃에서 공貢은 眞(진)으로 의심된다는 기록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원문에 있다. 그러나 차이나 국학도항 삼국지 원문에는 없다.
공貢은 眞(진)이라면 공번貢蕃 은 진번眞蕃 이 된다. 진번眞蕃 은 眞番(번)과 혼용되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번眞番이다.
위 문장 조선공번朝鮮貢蕃은 조선진번 朝鮮眞蕃 이 된다.
3-2) [지역 조선] 은 [지역 진번]과 붙어 있다. 이제 [사기 조선열전]이 기억날 것이다. 진번과 조선眞番과 朝鮮 두 지역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으로 번역해 놓았다.
한국사데이터 베이스가 번역한 [사기 조선열전] 첫 부분이다.
朝鮮註 003王滿註 004은 옛날 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燕나라의 全盛期로부터註 005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註 006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註 007를 쌓았다.
그 이후 “ 朝鮮에 조공하는 藩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고 국사편찬위원회는 번역하는 데 필자는 공貢 은 진眞으로 보고 다르게 해석한다.
[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戶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진번 朝鮮 眞藩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3-3) 조선의 넘버 투(2)인 재상이 어떤 [정치적 이유로] 직접 간언하지 않고, 예濊의 고위관리 경卿을 통하여 간언한 내용은 매우 중대한 것이었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쪽의 진국 ‘海(해)=한韓=마한馬韓=진辰’ 으로 간 것이다, 따라간 백성이 2천여 호나 된다는 기록으로 보아 사실상 나라가 분열된 것으로 볼 정도이다.
그 이후 “ 朝鮮에 조공하는 藩國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고 국사편찬위원회는 번역하는 데 필자는 공貢 은 진眞으로 보고 다르게 해석한다.
[그 때 백성으로서 그를 따라가 그 곳에 산 사람이 2천여戶나 되었는데, 그들도 역시 조선진번 朝鮮 眞藩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조선에서 ‘海(해)=한韓=마한馬韓=진辰’ 으로 간 조선의 넘버 투(2)인 재상과 2천여호 대략 1만 2천여 명이 그 후로 조선 진번과 왕래하지 않은 것이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원문이다.
時 民 隨出居者 二千餘戶, 亦 與朝鮮貢(‘眞’의 誤記인 듯 하다.)蕃 不相往來.
亦與 朝鮮 貢校勘 126蕃 不相往來. 貢, 疑作眞.
校勘 126 ‘眞’의 誤記인 듯 하다.
4. 사마천의 ‘사기 태사공 자서 제70’에 나오는 글을 소개한다.
燕丹 散亂 遼閒,滿 收其亡民,厥聚 海東,以集 真藩,〔一〕 葆塞 為 外臣。作 朝鮮列傳 第五十五。
연燕과(의) 단丹이 요 일대遼閒를 어지럽힐 때 만은 유민을 거두어 해동에 모아 真藩=眞番 葆塞(진번에 있는 요새) 에 집결시키고 변방의 외신이 되었다.
葆 성채(城砦: 성과 요새를 아울러 이르는 말)
〔一〕 集解 徐廣 曰:「一作『莫』。藩音 普寒反。」 번이 아니라 ‘반’으로 읽는다.
史記 卷一百三十 太史公自序第七十
http://www.guoxue123.com/shibu/0101/00sj/130.htm
5. 조선의 넘버 투(2)인 재상이 예濊의 고위관리 경卿을 통하여 간언한 내용은 “ 한나라가 침공할 수 있으니 대비하라.”는 내용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무제 본기에 나오는 ‘뜬금없는 기록’을 소개한다.
1) 기원전 128년에 흉노와의 전쟁을 주로 기록하던 한무제 본기가 동이의 예군 남여가 28만명을 이끌고 항복하여 滄海郡(창해군)이 되었다는 기록이다. 더 황당한 것은 2년후인 기원전 126년에도 흉노와의 전쟁을 주로 기록하다가 ‘뜬금없이‘ 창해군을 없앴다는 것이다. [부록2]
2) 東夷 薉君 南閭 等〔一〕 口二十八萬人 降,為 蒼海郡。
〔一〕服虔曰:「穢貊 在 辰韓之北,高句麗 沃沮 之南,東窮 于 大海。」
예맥은 진한의 북쪽, 고구려·옥저의 남쪽에 있다. 동쪽으로 대해(지금의 황해)에 닿는다. 예=예맥이다. 이 위치는 산동반도일 수 밖에 없다.
晉灼曰:「薉,古 穢字。」薉 더럽다. 잡초 艹(초두머리 초) + 歲(해 세)
師古曰:「南閭者,薉君之名。」
3) 기원전 195년경 조선왕 준이 달려서 走(주) 海(해)지역으로 들어가入(입), 마한을 공격한 (走 入海,攻 馬韓) 그 ‘海(해)’ 글자가 滄海郡(창해군)에도 들어 있다.
우거가 죽은 것이 기원전 108년 경인데 그 20년 전인 기원전 128년이 우거가 살아 있을 당시라면, 조선의 넘버 투(2)가 2천여호 (최소한 1만 2천여명)를 이끌고 조선 동쪽의 ‘海(해)=한韓=마한馬韓=진辰’ 으로 간 것이다.
4) 기원전 128년에 있다가 없어진 창해군은 지금 ‘海(해)=한韓=마한馬韓=진辰’ 지역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당연히 창해군은 한서지리지에는 없다.
2천여 호와 28만명의 숫자 차이가 크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한무제 본기 기록은 ‘동이’가 스스로 항복한 것이니 많다고 할수록 漢(한)나라에는 좋은 것이고, 조선의 넘버2가 조선을 나온 것은 적다고 할수록 조선과 마한을 적게 기록하는 것임으로 漢(한)나라에는 좋은 것이므로, 같은 사건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는 아닌 것이다. (계속)
[부록1] 사기조선열전
左將軍已并兩軍,即急擊朝鮮。朝鮮 相 路人、相 韓陰、尼谿 相 參、將軍 王唊〔一〕 相與 謀曰:
좌장군이 이미 양군을 합하여 맹렬히 조선을 치니, 조선의 相 路人註 036과 相 韓陰註 037과 尼谿相 參 ·將軍 王唊이 서로 모의하기를,
「始欲降樓船,樓船今執,獨左將軍并將,戰益急,恐不能與,(戰)王又不肯降。」
“처음 누선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누선은 지금 잡혀 있고 좌장군 단독으로 將卒을 합하여 전투가 더욱 맹렬하여 맞아서 싸우기 두려운데도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는다.”
陰、唊、路人 皆亡降漢。路人道死。
하고 [韓]陰·[王]唊 ·路人이 모두 도망하여 漢나라에 항복하였다. 路人은 도중에서 죽었다.
元封三年夏,尼谿相 參 乃 使人殺 朝鮮王 右渠來降。王險城未下,故右渠之大臣成巳又反,復攻吏。左將軍 使 右渠子 長 降、〔二〕相 路人之子 最〔三〕告諭其民,誅成巳,以故 遂定朝鮮,為四郡。〔四〕封 參 為澅清侯,〔五〕陰 為荻苴侯,〔六〕唊 為平州侯,〔七〕長〔降〕 為幾侯。〔八〕最 以父死頗有功,為溫陽侯。〔九〕
〔一〕集解 漢書音義 曰:「凡五人也。戎狄不知官紀,故皆稱相。唊音頰。」
索隱應劭云:「凡五人。戎狄 不知官紀,故 皆稱相也。路人,漁陽縣人。」
如淳云:「相,其國宰相。路人,名也。唊(겹)音頰(겹, 협),一音協。」
[부록2] 漢書卷六 武帝紀第六
http://www.guoxue123.com/shibu/0101/01hsyz/006.htm
秋,匈奴入遼西,殺太守;入漁陽、雁門,敗都尉,殺略三千餘人。遣將軍衛青出雁門,將軍李息出代,獲首虜數千級。
東夷 薉君 南閭 等〔一〕 口二十八萬人 降,為 蒼海郡。
〔一〕服虔曰:「穢貊 在 辰韓之北,高句麗 沃沮 之南,東窮 于 大海。」
晉灼曰:「薉,古 穢字。」
師古曰:「南閭者,薉君之名。」
魯王餘、長沙王發皆薨。
二年冬,賜淮南王、菑川王 几 杖,毋朝。〔一〕
〔一〕 師古曰:「淮南王安、菑川王志皆武帝諸父列也,故賜几杖焉。」
春正月,詔曰:「梁王、城陽王親慈同生,〔一〕願以邑分弟,其許之。諸侯王請與子弟邑者,朕將親覽,使有列位焉。」於是藩國始分,而子弟畢侯矣。
〔一〕 文穎曰:「慈,愛也。」
匈奴入上谷、漁陽,殺略吏民千餘人。遣將軍衛青、李息出雲中,至高闕,〔一〕遂西至符離,〔二〕獲首虜數千級。數河南地,置朔方、五原郡。
〔一〕 師古曰:「山名也,一曰塞名也,在朔方之北。」
〔二〕 師古曰:「幕北塞名也。」
三月乙亥晦,日有蝕之。
夏,募民徙朔方十萬口。又徙郡國豪傑及訾三百萬以上于茂陵。
秋,燕王定國有罪,自殺。
三年春,罷蒼海郡。
三月,詔曰:「夫刑罰所以防姦也,內長文所以見愛也;〔一〕以百姓之未洽于教化,朕嘉與士大夫日新厥業,祗而不解。〔二〕其赦天下。」
〔一〕 晉灼曰:「長音長吏之長。」張晏曰:「長文,長文德也。」師古曰:「詔言有文德者,即親內而崇長之,所以見仁愛之道。見謂顯示也,音胡電反。」
〔二〕 師古曰:「解讀曰懈。」
夏,匈奴入代,殺太守;入雁門,殺略千餘人。
六月庚午,皇太后崩。
秋,罷西南夷,城朔方城。令民大酺五日。
四年冬,行幸甘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