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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시』 ‘염소 선생’ (3)

윤한로 시인
  • 입력 2023.06.10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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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시로 엮은, 내 시를 삶으로 엮은

4부 염소 선생(3)

 

개미 컨테이너

온종일 앉아

착한 마음 구두를 닦는다

허리 구부려

늦은 밤 맑은 영혼

열쇠를 깎고 도장을 판다

진짜 선생이시구나

반백의 흐트러진 머리 치켜들면

카아, 어둠 뚫고 떠오른

인생 한 모금 좋더라

푸른 밤바다 얇은 다리 금방

노 저어 갈지니

삐걱이는 두 짝 잎새 다리여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 하면

내 오른손 그 솜씨도 잊혀져라

*14,15행은 『구약 성경』 「시편」 136장에 나오는 구절

 

내 일찍

진짜 공부를 했어야 하는데

좁은 컨테이너 박스 안에 진종일 틀어박혀

구두를 닦고 열쇠를 깎고

도장을 팠어야 하는데

내 진즉 런닝구가 다 해지도록

찢어지도록 싸워야 했는데

이겼어야 하는데 터덜터덜 늦은 밤 집에 올 때마다

긴 골목 어귀 토막 컨테이너 속

불 밝혀 일 하는

개미협회 선생님께도 엄청 부끄러웠는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슬퍼하지 마세요, ㅠㅠ

1

어두운 바닷속 가슴 아픈 시간들

귀 기울여 들어 보면 그대들 마음은 언제나

괜찮아요 ㅎㅎ, 왜 이리도 천사 같냐

깊은 바닷속 그리운 이름들

눈감고 읽어 보면 그대들 영혼은 언제나

미안해요 ㅠㅠ, 왜 이다지 꽃다울까

나 그대들 위해 그대들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진정 아파하지 않았으며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싸우지도 못했는데

살려 주세요 밝혀 주세요 목이 터져라 외치지도 못하고

날뛰는 파도 빤히 바라보면서

우리 어느 누구 하나 뛰어들어 건져 주지 못했는데

잘못만, 온통 잘못만 했을 뿐인데 그저 부끄러울 뿐인데

이제 보니 아름답고 착해서

아무 이유 없어라,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하나 둘 곁을 떠나가 어느덧 왕따가 됐구나, 그대들

살을 에는 듯 차가운 바닷속, 어쩔 수 없이

홀로 깨어 홀로 빛나야 하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품어야 하리 안아야 하리 깨물어야 하리

2

그러니 우리 아이들 잊지 마세요 아니요 저기요 그러니까요 제발요 나쁘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씹지 좀 말아 주세요 짜고 하는 짓거리라고 아아아, 돈이나 바란다고 그러다가 새들이 화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풀들이 핏대 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새들한테 된통 혼날지도 몰라요 풀들한테 엄청 밟힐지도 몰라요 저기 동네 박스들한테, 스티로폼들한테 까일지도 몰라요 까이면 아프잖아요 열라 서럽자나여, ㅠ ㅠ

3

저번 날이군요 그래도 이 나라엔 아름다운 초저녁이 왔답니다 들으셨나요? 십일월 십이일 함성 소리를 수능시험 마지막 사탐을 치고 학교 교문마다 쏟아져 나오던 대한민국 고3들 막을 수 없는 뜨거운 물결들을 그 물결 속에 우리 어여쁜 녀석들 함께 있었습니다 흘렀습니다 파카잠바 깃 속 깊숙이 파묻었다 비로소 내민 얼굴들 더러는 갸름해지고 더러는 동그스름해지고 듬성듬성 수염도 났습디다 그러나 불그스름 볼에 웃음 가득 머금어 여전히 앳될 줄이야 숫될 줄이야

얘들아, 정말 고생했다

이제 모두 모여 밤새도록 한바탕 뛰놀아라

하늘에서 땅에서 일번가에서

그대들 마음껏 빛나라 싱그러운 웃음으로, 기쁨으로

부디 내 허물 깨끗이 없애 주라

우리 잘못 다 씻어 주라

 

어줍잖게나마

세월호 아픔을 쓰고 말았습니다 안 쓸 수 없었습니다

세월호 아픔을 쓰며, ‘ㅎㅎ’과 ‘ㅠㅠ’를 꼭 넣고 싶었습니다

그 말들은, 비록 머리 허옇지만, 내게도

어떤 비유나 은유, 상징보다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이슬이한테 물었습니다

‘ㅎㅎ’은 언제 쓴다니?

기쁘고 좋을 때 써요

그럼 또 ‘ㅠㅠ’는?

슬프고 아플 때, 외로울 때요

그런데 읽는 건 어떻게 읽어야 하지?

……

미안쿠나, 시를 쓰고 다시 읽어야 해서

우리 둘은 갑자기 벽에 부딪쳤습니다

히읗히읗, 하하, 후후, 웃음웃음, 유유, 눈물눈물, 방울방울

그날 밤 이슬이한테서 문자 한 통이 왔습니다

쌤. 슬퍼하지 마세요

우네요우네요!

아,

 

잡시

첫눈이 내린다, 설렌다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더라

퇴직할 생각을 하니

기원에 가서 바둑도 두고 아무려나

읽고 싶을 때 읽고

쓰고 싶을 때 쓰고

때려치고 싶을 때 때려치고

마누라 손잡고 날마다 산도 다니고

가자, 눈 오는 날은 무궁화 기차 여행도 떠나고

성당에 가서 교황님처럼 종일 묵주기도도 바치고

하늘 높이 가마귀 놈 때갈스러이 운다, 짖는다

날 저물어 초가집은 흰 눈 속에 파묻히고

아삼삼, 굴뚝엔 장작 연기 폴폴 오르고

이렇게 설렐 수가, 고플 수가

이제 방도 내가 쓸고 밥도 내가 하고

내 빨래는 내가 해야지

시간이 엄청 모자라겠다

와중에 바가지도 긁고 쌈박질도 하고 그러려니

돈은 또 엄청 모으겄다

조금 먹고 조금 싸니

 

게다가

요즘 들어 유난히 딱따거리는 그거이들 앞에

더는 굽힐 일 없으니 가만,

어쩌면 갑자기 늙겄구랴

백수나 건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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