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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있는 차이나의 장성을 보면 ‘조선朝鮮’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조趙나라와 위魏나라가 있네. 사마천의 ‘사기’를 믿어야 돼 말아야 돼 (1)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65)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5.20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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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조선 차이나 황하 유역설은 그 자리에 기원전 11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주나라, 춘추5, 전국7웅이 있었다는 선입견 때문에 지지를 못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나라가 ()만 조선을 멸하고 5제후국을 세운 사기 조선열전의 무대가 황하 유역임이 드러난 이상, ‘조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차이나 역사가와 코리아의 역사가가 지목한 위나라, 나라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마천의 사기는 어느 나라의 역사를 그냥 쓴 경우는 그의 입장에서 외국 오랑캐 (만이)들이다. 조선열전, 흉노열전이다. 사마천이 보기에 한나라와 핏줄이 같은 나라는 세가로 편입하여 가문의 역사인 것처럼 어느 나라의 역사를 서술했다. [세가()’는 종묘라는 의미로, 주나라 때부터 시작된 봉건 제도하에서 천자에게 분봉 받아 제후국을 세우고 그 봉토에서 자자손손 이어 가며 조상을 받들고 통치권을 행사한 가문을 말한다. 사마천은 당시 난립했던 제후국 중 큰 영향력을 지녔으면서도 그의 의도와 기준에 맞는 나라와 인물을 선별하여 세가에 수록하였다. ] (사기 세가 사마천 저/김원중 역)

 

은나라를 멸한 주나라 무왕의 친동생, 친척들에게 어느 나라를 봉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실 원래 그 지역에 있던 세력을 무시하고 주나라 무왕이 인척을 봉했을 리는 없다. 도리어 원래 있던 세력에게 그대로 작위를 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전체 30 세가 중 위나라 세가와 조나라 세가를 살펴볼 생각이다.

 

2. 지난 호에서 게시한 지도를 보자. 번 장성은 흉노를 막기 위함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 장성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1) “ , 는 차이나 (진나라이든, 주나라이든) 가 흉노(서융)와 대적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 동쪽은 모두 차이나의 영역이다.”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현대 차이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달콤하지만, 장성 으로 벽에 부딪힌다.

 

, 장성 서쪽과 ()남쪽이 서안 등의 지역으로서 누런임금 黃帝(황제) ()나라, () 나라의 역사 주무대라고 해석해 왔기 때문이다.

 

西周(서주. 기원전 770~ 403. 지금의 서안시 일대 도읍) 가 기원전 403년경에 東周(동주, 기원전 403~ 기원전 221, 지금의 낙양시 일대)로 이동하여 전국시대가 열렸다는 것이 이때까지의 정설이다.

 

즉 이때까지의 정설의 입장에서 설명하면 장성 서쪽이 흉노의 영역이었다고 인정하는 것이고, 어느 시점에서 차이나 정통의 주나라, 진나라의 수도 서안시 일대가 흉노의 영역이었다고 설명하여야 함으로 난처하기 짝이 없게 된다.

 

결국 장성 동쪽의 어느 세력을 막기 위해서 () 나라가 장성을 세웠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다. 장성 동쪽의 어느 세력은 조선(동이) 일 수 밖에 없다.

 

2) 조선의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에 위 지도상으로는 조, , 세 나라가 있다. 는 위나라를 합병하여 혼동을 주기는 하지만 위나라는 대부분 위를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부록 참조) 위 지도상으로는 조선의 자리에 조, , 두 나라가 있는 셈이다.

 

3) 기원전 11세기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했을 때 은나라의 친족 기자를 조선에 봉했는데 신하가 아니었다 (封 箕子 於 朝鮮 而 不臣也 사기 송미자세가) 는 기록에 의하면 은나라 수도 지금의 안양시 인근에 조선이 있었다.

 

4)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에 따르면 조선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 무제 때에 5제후국으로 갈라졌다.

 

5) 사마천 사기에만 의하면, 기원전 11세기에 조선이 존재했고 (사기 송미자세가), 기원전 108년에 조선이 와해되었다. (사기 조선열전) 이 사이 약 1천년동안 조선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위 지도상으로는 조나라와 위나라가 있다.

 

6) 나라와 위나라의 건국과 역사를 잘 살펴보면 역사왜곡 조선 지우기의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주의할 점은 위나라는 위나라 이다. (계속)

 

 

부록

 

전국7웅은 전국시대를 주도했던 진()나라, ()나라, ()나라, ()나라, ()나라, ()나라, ()나라의 7개 국가를 이르는 말이다.

 

통상 춘추5패는

제 환공 齊 桓公 (기원전 685 - 643, 이하 재위기간)

진 목공 秦 穆公 (659 - 621)

송 양공 宋 襄公 (651 - 637)

진 문공 晉 文公 (636 - 628)

초 장왕 楚 莊王 (614 591)를 말한다고 본다.

 

상나라 멸망시 태공망 여상(제나라의 시조), 소공 석(연나라의 시조) 등은 아예 상을 없애려고 했으나 무왕의 아우 주공 단(노나라의 시조)의 제안에 따라 주왕의 아들 무경을 상에 봉한다. 이와 아울러 그 주변에 관나라, 채나라, 곽나라를 세우고 각각 무왕의 아우들이었던 관숙 선, 채숙 도, 곽숙 처를 봉했다.

 

이들의 목적은 무경을 감시하는 것이었기에 삼감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무왕 사후 섭정을 맡은 주공 단의 찬탈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삼감의 난'을 일으켰으나 주공 단은 이들을 3년 만에 진압하여 주모자였던 무경과 관숙 선을 죽이고 채숙 도는 유배, 곽숙 처는 삭탈 관직에 처했다.

 

이 때 상나라 수도 일대의 이름을 은에서 위로 바꾸고 강숙 봉(문왕의 여덟 번째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을 봉했다. 수도는 조가였다가 초구, 마지막에는 복양으로 옮겼다. 국성은 희씨이다. 상나라 제사는 주왕의 큰형이었던 미자 계()[6]를 세워 송나라()에 봉했다.

 

처음 강숙이 봉토를 받았을 때 그 작위는 백작이었지만 경후 때 주 이왕에게 뇌물을 바쳐 후작으로 올랐고 기원전 771년 견융이 서주의 수도 호경을 침공했을 때 무공이 진(), ()과 함께 견융을 몰아낸 공으로 공의 시호를 썼다. 이때 무공은 주 왕실의 사도를 겸함으로써 위나라는 전성기를 맞았다 (중략)

 

전국시대에 이르러 위()나라는 위()나라의 종속국 신세로 전락했다. 위혜왕이 칭왕한 뒤에는 아예 성후를 폐위하여 그의 신하였던 자남 경(子南勁)이라는 영공의 방계 후손[14]을 후작으로 책봉했는데 그가 평후이다. 이에 성후 이후부터는 더이상 선대의 군주를 공()으로 높이지 않게 되었다.

 

기원전 330년에 위()나라는 위()나라를 아예 합병해버렸다. 당시 평후의 아들이 후작을 잇고 있었는데 그에게 복양(濮陽) 일대 만을 식읍으로 남겨주었고, 이에 위()나라 종실의 명맥은 일개 식읍의 주인인 '위군(衛君)'으로 이어지게 되었다.[15] 이후 전국 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위()나라가 진()나라에 합병되어 버렸고, 진나라는 복양에 동군(東郡)의 치소와 현()을 설치하면서 기존에 있던 위군의 식읍을 야왕(野王)으로 옮겨두었다. (위키백과 위(춘추전국시대))

고조선 사라진역사 142쪽 에서 캡쳐 편집 ( 2006.1.25 성삼제 저)
고조선 사라진역사 142쪽 에서 캡쳐 편집 ( 2006.1.25 성삼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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