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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김윤신, 그를 만든, 그가 만든 세계

문정기
  • 입력 2023.05.05 06:34
  • 수정 2023.05.24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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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멕시코, 파리. 지구의 반을 돈 인생

경기도 화성에서 만난 조각가 김윤신 1
경기도 화성에서 만난 조각가 김윤신 1

조각가 김윤신, 그를 만든, 그가 만든  세계

(아르헨티나, 멕시코, 파리. 지구의 반을 돈 인생)

김윤신, 1935년생, 북위 35도에서 태어나 남위 35도까지 남반구와 북반구를 넘고 지구의 반을 돌아 조국과 완전 반대편에 있는 머나먼 이국 땅 아르헨티나에서 나무조각을 시작했다. 이제 작품을 메고 지고 한국에 왔다. 빈손으로 갔다가 그래도 돌아올 때는 나무 조각, 돌 조각 작품을 들고 들어왔다. 따뜻한 봄날 경기도 화성 봉담 이윤숙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났다.

일제 강점기와 6.25사변을 몸으로 겪고 프랑스에 유학한 미술학도로서 중학교 교사직과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예술가의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한 김윤신 조각가, 어쩌면 아이와 같은 소녀성도 잃지 않고 졸수, 나이 90이 내일 모레인데 그의 정력은 아직도 끊임없이 솟아 오른다. 전쟁난민으로 어디엔가 분노와 아쉬움도 숨겨 있을 법한데.., 그는 고난의 승리자이다.

작가를 넌지시 넘겨다 보는 건 샘물의 밑바닥을 보는 것과도 같고 강물의 원류를 보는 것과도 같다. 거기에 작품은 없고 사람 김윤신이 있을 따름이다. 작품을 보고 사람을 헤아릴 수는 없으되 사람을 보고 작품을 짐작을 해본다.

그의 작품은 톱으로 시작되어 톱으로 마무리 된다. 잘라도 잘리는 게 아니고 합해도 합치는 게 아니다. 하나로 시작하니 끝도 하나로 끝난다. 밑그림도 없고 마무리도 거친 채로이니 밑도 끝도 없는 그녀의 인생과 같다.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지금까지처럼 다가오는 지금을 맞이할 것이다.

3시간 남짓 인터뷰라고 했으나 막상 작가의 얘기를 듣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그녀의 인생사이다. 그녀의 인생 철학이다. 작품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몇 가지 카테고리로 우리의 나눔을 정리해봤다.

 

1994년작, 알가로보 나무의 합이합일 분이분일, 종교적 염원성과 절대적 삶을 표시, 한옥의 곡선도 엿보인다.
1994년작, 알가로보 나무의 합이합일 분이분일, 종교적 염원성과 절대적 삶을 표시, 한옥의 곡선도 엿보인다.

 

합일사상

모든 것이 생명의 원천이라고 생각해요. 1978이후 제가 나름 도입한 합이합일 분이분일 合二合一 分二分一 개념은 둘이 합하여 하나를 만든다, 둘로 나눠도 하나가 된다하는 거예요. 그 하나를 만든다는 그것이 생명이에요. 반복적으로 그렇게 사물이 존재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생명의 근원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생각해봐요. 태어났다 죽었다. 단지 형태가 바뀔 따름이지 근본은 하나이지요. 존재라는 건 어차피 우주적 작업이잖아요.

작업을 할 때도 쟤와 내가 하나가 돼야 되는 거지요, 재료인 나무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게 그냥 하나가 되는 게 아니잖아요. 나의 정신과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그 재료에 완전히 녹아 하나가 돼서 표현이 되어야 만이 그게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만질 때 나하고 쟤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느낌을 거기서 찾아내는 거예요. 그거를 느끼는 순간 잘라주는 거예요. 잘려지는 공간을 보면서 아, 이게 이렇게 됐어? 그 다음에 나도 모르게 그냥 톱이 가는 거예요. 어쩌면 충동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어요.

정리해보면 내가 이렇게 톱으로 자르겠다. 마음을 갖고 시작하지 않아요. 출발할 때 일단 큰 둥치를 보면서 쟤 껍질과 속살의 차이가 어떻게 날 것인가, 얼마만큼 단단하고 얼마만큼 연할까, 그리고 그 나무가 갖고 있는 냄새가 어떨까, 정도를 파악해요. 그걸 보면서 아. 얘는 각도를 이렇게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때 그냥 하는 거예요. 말하자면 드로잉이 없어요. 심지어 머릿속에서 조차도..

 

원시성을 향하여

껍질이 그대로 붙어있는 원시성의 최근 작품,  자신의 소리와 하늘을 향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껍질이 그대로 붙어있는 원시성의 최근 작품,  자신의 소리와 하늘을 향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내 작품은 나무가 갖고 있는 그 형태를 되도록이면 없애지 않고 그대로 껍질을 원시적으로 올려요. 껍질을 보고 여기에 가지가 나온 거다 그러면 그거 그대로 살려서 그냥 해요. 돌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냥 두지요. 그걸 다 갈면 이내 보석이되든요.

워낙에 처음 켰을 때 갖고 있었던 그 모양을 남겨두면서 안에 속살을 표현해 주지요. 무슨 세련됐다는 하는거는 아니고 그냥 자체가 순수하고 그대로  어떤 느낌과 맛을 전달하는 겁니다. 사실 아르헨티나에서 3년간 전국순회전시를 하게 된 동기도 껍질있는 나무가 한몫을 했지요. 8079년인가 파리에서 청년조각가 전시회를 했는데 껍질 붙은 작품이 굉장히 찬사를 받은 거예요. 보통은 이렇게 안 하거든요. 거기 동양미술관엔가 그때 작품 한 점이 남겨 있어요.

원산에서 금강산 쪽으로 좀 들어가면 안변이라는 곳에서 언니들은 다 시집가고 오빠는 독립운동 가고 엄마랑 둘이 지냈어요. 그 마을에 애들도 없고 매일 자연하고 친구해서 놀았던 어린 시절, 뭔가를 꺾어서 뭔가를 만들고 혼자 자연과 수수깡 같은 그런 걸로 하루를 보낸 어린 시절이 몸에 배어 있는 거 아닌가도 싶어요. 원시인처럼 살았던 어린 시절, 그게 평생 머릿속에 남아 있어요. 우린 결국 원시로 돌아가는 거 아닌가요?

 

토테미즘이 몸에 배였다.

2000년대 초, 나무 조각에 파타고니아의 토템적 무늬와 색깔이 도입되었다. 
2000년대 초, 나무 조각에 파타고니아의 토템적 무늬와 색깔이 도입되었다. 

 

토테미즘? 그래요. 그런 토템적인 건 시골마을에 들어가면 골목입구에 장승들이 서있고 언덕받이에 돌멩이 얹고.. 늘 나와 같이 있었지요. 왜정 때 아들이 집을 간다 온다 없이 나갔는데 2차 대전이 나니까 일본 사람들이 군에 들어오라고 찾으러 오는 거예요. 엄마도 경찰서 불려 갔다 오고 아버지도 불려 갔다 오고.. 그때 엄마는 겨울이든 여름이든 매일같이 산에 가서 큰 동이에 물을 길어다 하얀 그릇에다 그 물을 옮겨 담아 장독대에 올려놓고  촛불을 켜서 놓고 두 손을 비비며 뭐라고 하시는데 어린 나이에 무슨 얘기를, 엄마가 왜 저렇게 하시는지 그건 모르는 거죠. 그때는 엄마하고 저밖에 없고 제가 막내니까 엄마 쫓아다니면서.. 그것이 오래 반복이 됐었고 어쩌면 나도 닮아 갔을거에요. 내게서 엄마 모습이 비칠지도 모르지요. 엄마 토테미즘, 그런 말이 있을까요?

나중에 파타고니아 원주민의 마푸체를 접하고 이들의 색상과 문양을 나무 조각에 도입하여 보다 원시적이고 토테미즘적 작품을 시도했지요. 어쩌면 제 이후 작품이 이런 방향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빠가 아빠였다.

1964년 대학마치고 유학가고 싶다. 그랬더니 오빠가 네가 시집 갈 때가 됐는데 시집 안 가고 공부를 더 하겠다면 보내 줄 수는 있다. 조건이 있는데 첫째로 나이 들어서 조카들한테 의지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면 내가 공부시킬 수 없다. 그리고 둘째는 호랑이 굴에 붙들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두 가지 말을 나한테 딱 남겼어요. 나는 오빠한테 약속을 했으니까 지켜야 되는 거지요. 오빠는 원래 독립운동하신 분이라 성질이 대쪽 같아 오로지 나라밖에 모르시는 철저한 분이었고 이 땅에 나로서는 오빠 밖에 없었지요. 그 오빠와의 약속인데..

이 약속은 지켰지만 나중에 오빠를 실망시킨 중대사건이 있었지요. 모 여대에 교수 재직 중이었어요. 아르헨티나 갈 때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고 학교에다만 전시하러 간다 했지요. 심지어 오빠한테도 말을 안 하고 왔어요. 현지 전시 때문에 귀국이 늦어지고 학교에서 동네방네 전 세계적으로 찾기 시작하니 드디어 오빠가 알게 되고. 오빠는 독립운동 하다 육사에 들어가서 별 둘을 달아 `나는 군대 수천 명의 부하들이 많지만은 내 평생 살면서 누구한테도 배반당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근데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나를 배반하고 간다 온다는 말이 없이 사라졌어?. 그것도 대학 교수 되려면 얼마나 어려운데 겨우 자릴 잡았는데 너는 도대체 어떻게 돼 먹었냐?` 동생일 뿐만 아니라 남한 땅에 도대체 혈육이 딱 나 하나인데 오죽했겠어요? 평생의 기둥이셨지요. 지금은 저 세상 사람이지만 아빠 대신, 엄마 대신 나를 이토록 강한 사람으로 만든 분이셨어요.

 

배고픈 어른

경기도 화성에서 만난 조각가 김윤신 2
경기도 화성에서 만난 조각가 김윤신 2

 

전쟁 때는요. 안 먹어도 절대 배가 안 고파요. 먹어서 배불리는 것 보다 우선 어떻게 살아남을 건가, 가 중요하지요. 그것 때문에 오늘날 이렇게 작업을 할 수 있는 굳은 정신으로 다져진 게 아닌가 생각하고 싶어요.

한번은 멕시코에서의 일이었어요. 거기에서 먹는 음식에 타코라고 한국으로 말하면 김밥 정도?. 땅콩과 강냉이를 갈아서 둥그런 판에다가 뿌리면 접시 같이 동그랗게 되잖아요. 거기에 매운 고추와 싹이 새로 나온 선인장 연한 것을 같이 넣어요. 거긴 비도 안 오고 눈도 없는 지역일 그런지 그런 요리를 하는 거에요. 그거를 프라이판에서 누르면 숨이 죽어요. 다음에 전병 같은 걸 올려놓고 두르르 말아서 주는데 그나마도 세끼를 주는 게 아니라 12시부터 5시 사이에 딱 한 번 줘요. 그게 밥이야? 맨날 배고프지요. 그 힘든 일을 하는데 먹을 게 없으니까 작업장 아래 조그마한 구멍가게 에 가서 맥주 깡통 하나 사서 요기했지요.

또 하나의 얘기, 어찌어찌해서 대사관 사람이 이따금 라면을 한 박스씩 사서 놓고 가요. 그 집 주인 아줌마 애들이 셋인데 딱 그거 하나를 삶아요. 당시 라면이야 그렇게 고급스러운 라면도 아니었어요.  요새는 좋지만그  조그만 걸 넷으로 나누어 조금씩 먹었으니.. 한 사람이 하나씩 먹는 건데.. 그거 잊혀지지가 않아요. 배고픈 어른, 그런 경험도 있어요.

 

세속을 버리고 예술의 세계로

경기도 화성에서 만난 조각가 김윤신 3
경기도 화성에서 만난 조각가 김윤신 3

 

전주 모여중 선생을 할 때였지요. 학교 교장 선생님이 못 마땅한 걸 자꾸 요구를 했었어요. 학생들 집을 한 바퀴 돌고 돈을 받아 오래요. 소위 가정방문이지요나라에서 학교를 지어는 줬는데 돈이 모자라다고. 근데 학교에서 왜 돈을 걷어요?

그때는 박정희 시대였던 것 같아요. 도시락을 싸오면요, 잡곡이 반 이상이 들어가야 돼요. 흰 밥 갖고 오면 안 돼. 선생님도 거기 교실에 앉아서 같이 먹으면서 조사를 해야 되는 거예요. 내 담당 학년의 학생하나가 점심 때만 되면 사르르 없어져.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못 싸 오는게 어찌 걔 하나뿐만이 겠어요. 어느 날 그 학생 집에 갔는데 엄마 아버지가 안 계시더라고, 그래서 어디 가셨냐 그랬더니 일하러 가셨대. 무슨 일을 하시냐 그랬더니 담배공장에 가서 두분이 일하신대요. 그래서 밥을 못 먹는 거예요.

먹을 게 없이 학교를 그냥 오는데 그게 한 집뿐만이 아니래요. 몇 집이 되는지 몰라요. 막상 가보니까 너무너무 안 됐어. 다음날인가 수업을 끝내고 교장실로 딱 들어갔어요. 학생들이 너무너무 가난해 밥도 못 먹고 학교 오는 애들인데 나는 돈을 걷을 자신이 없어요. 그런 학생들 집에 가서 돈을 걷으라고 하니 나는 이 자리에서 사표를 내겠습니다. 하고 그 자리에서 사표를 써서 교장 책상에다 올려 놓고 방송을 했어. 수업 중에 방송을 했는데 ``전교생다 운동장으로 나와요.` 운동장에 우루루 나오니까 수업하다가 놀래서 선생님들도 따라 나온 거야. 그래서 나는 `학교를 이 순간부터 퇴직이다. 여러 선생님들, 학생들 건강하게 지키기를 바란다` 그렇게 선언하고 거기에서 내려와서 바로 전주역으로 갔어요.

기차역으로 선생들부터  학생들까지 막 쫓아오는 거야, 선생님들이야 다 친구지. 기차 맨 뒤칸에 문이 있는데 거기 서서 나는 손을 흔들고..  기차길 위로 그냥 선생님들하고 애들이 막 쫓아오는 거야, 기차는 막 떠나는데 울고 불고 난리가 났어.

또 하나는 아르헨티나에 3년 전시로 붙잡혀있는동안  위에 말한 한국의 모여대에서  매일같이 편지가 오는 거요. 학장님이 언제 오냐, 방학이 끝났는데 왜 안 돌아오냐, 애들이 지금 데모를 하고 난리다, 빨리 와라.. 그래서 못 간다고 그랬어요. 못 간다고 그랬더니 그러면 좋다 전시 끝내고 와라. 올 때까지 3년이면 내가 월급은 못 준다. 하지만 자리는 붙잡고 있다가 그때 오면 그 자리 그대로 주마 이렇게 왔어요. 생각을 해 보니까 그건 아니야, 한국보다도 크고 문화도 앞서 있고 뭐든지 잘 사는 나라인데 아르헨티나가요. 그때는 그랬어요. 이런 나라에서 한국에선 감히 국립미술관에서 전시도 못하는 나를 전시를 이렇게 해주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작업을 하고 가는 거야,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아니고 예술가가 돼야 된다, 이 결심이 딱 온 거예요. 결국 안 돌아간 거지. 교수 포기.

 

아르헨티나의 3

보다 화려해진 최근 2022년 작품, 앞으로의 방향이기도 하다. 그림과 조각의 콜라보
보다 화려해진 최근 2022년 작품, 앞으로의 방향이기도 하다. 그림과 조각의 콜라보

 

아르헨티나 도착후 얼마안된 어느날 한국대사관에 가서 내가 이 나라에서 작품전시를 좀 하고 싶다. 그랬더니 어디서 하고 싶으냐고, 그래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현대미술관에서 하고 싶다고 그랬더니 이 양반이 `그래요? 그러면 갑시다. 관장 만나러 갑시다,` 하고 나를 태워 거기까지 갔어요. 거기 미술관 관장을 만났는데 대사관에서 추천을 한 작가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그러면 전시 해줄 수 있다. 이러는 거예요.

단, 조건이 작품을 봐야 해줄 수 있다. 근데 작품이 어디 있어요. 아무것도 없이 빈 몸으로 아르헨티나를 갔는데. 작품을 보여드리는데 두 달만 시간을 달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나서 길에 쓰러진 나무를 재료와 한국 톱 같은 걸로 행길에서 작업을 했어요. 행길 밖에 할 데가 없으니까, 어떻게든지 두 달 만에 두 점을 했어요.

그래서 연락을 드렸더니 공보관님하고 미술관 관장님하고 두 분이 오셨어요. ` 내가 여기에서 삼십년을 근무를 한 사람으로 지금 미술관장을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워낙 나무가 많기 때문에 조각가들이 나무 조각을 많이 해요. 근데 이렇게 껍질을 붙인 채로 단면을 뜯어내고 속살과 껍데기와 그 사이의 공간을 이렇게 작품으로 만든 건 처음 본다``했어요. 근데 껍질 붙이고 하는 거는 여기서만 한 게 아니고 한국에서도 내가 해봤거든요.

1년을 작업을 하니까 대작이 한 30점 쯤 됐어요. 사실 그 작품에 좋은 나무는 거의 없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비가 오면 나무가 많이 쓰러지고 집집마다 큰 나무가 많아 자기네가 소용없으면 와서 잘라달라고 그래요. 재료비가 거의 들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워낙 작품이 크니까 실내보다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식물원을 전시장으로 꼽았어요. 아주 아름다운 공원인데 야외에 탁 펼치고 두 달을 전시를 했어요. 그러니까 각 신문에 다 나고 여기 저기 다른 주에서도 전시하자고 연락이 막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다 하려니까 한 3년 걸리는 거예요. 그 전시를 다 하려면. 그래서 대학교수 그만두고 전업 예술가의 길로 들어선 거지요. 지금도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후기

동탄 이윤숙 작가의 아틀리에서 만난 김윤신 작가,  참석자들과 같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봉담  이윤숙 작가의 아틀리에서 만난 김윤신 작가,  참석자들과 같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인터뷰 기사 작성에 도움을 주신 조각가 정혜례나, 조각가 이윤숙, 김란님 관장, 이춘희 작가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요 대담은 정혜례나 작가가 맡았습니다. 작품은 5월 7일 까지 사당동 소재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에 전시중이며 이후 2024부터는 박수근 미술관에서 전시가 예정되어있습니다. --정리j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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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기자 문정기

공학박사/과학문화평론가

jgmoon11@naver.com

전 국가과학기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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