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1) ‘사기’는 기원전 100년경 편찬, ‘한서’는 기원후 100년 경 편찬되었다고 전해진다. 활자인쇄 및 종이 등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상태라 겨우 붓글씨로 베껴서 전해짐으로 ‘사기’나 ‘한서’나 편찬 당시 원문 그대로 라는 보장은 절대 없다.
2) ‘滋’ 지역 은 한나라, 제나라, 옛날 연나라, 진번조선이 한 군데에서 접경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雍’ 지역은 漢(한)나라 왕의 대궐이 있는 곳이다.
2. 조선(열)전 앞부분 요약과 분석
1) 요약
연나라 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갔다.
‘滿(만)’도 망명했다. 무리 천여명을 모아서 상투를 틀고 만이복을 입고 동쪽으로 달려 새(요동외요, 요새, 패수의 서쪽에 있다)를 나와서 패수를 건넜다.
진나라가 옛날 지배했던 공터에 상하로 담장을 치고 살았다.
점차 진번조선만이와 옛날연나라 및 제의 망명자를 복속시켰다,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했다.
기원전 195~180년 한漢나라 효혜, 고후 시절에 처음으로 국경을 정하여 요동태수는 ‘(위)만’을 외신(나라 바깥에 있는 신하, 제후국)으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오만한 표현 투성이다.) 한漢나라 왕이 요동태수의 보고대로 허락을 했고 만滿은 이를 근거로 진번 임둔등을 복속시켜 영토가 방 수천리에 달했다.
만滿의 후손 우거에 이르러 (조선이) 한漢나라 사람들을 유혹하여 교통의 요지인 滋 지역에 한漢나라 도망자 들이 많아졌다.
진번·진국이 한漢나라 왕 천자에게 상소를 올리거나 ‘雍’ 지역에 있는 한漢나라 왕 천자를 직접 만날려고 해도 (조선이) 막았다.
이에 한漢나라는 사신 섭하를 보내어 조선을 회유했으나, 조선이 듣지 않았다. 사신 섭하를 국경인 패수까지 마중한 조선의 비왕을 섭하가 살해하고 패수를 건너 요새에 들어갔다.
2) 이 글만으로는 ‘만滿’이 진번조선의 왕이 되었는지 ‘조선연방’의 왕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글의 제목이 ‘조선(열)전’이고 ‘만滿’이 왕이 되었으니 당연히 조선연방의 왕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3) 한漢나라는 세금을 내는 백성들이 한나라를 버리고 조선으로 가니 이를 필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쟁의 명분으로 조선이 한漢나라 백성들을 유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4) 또한 사신 섭하가 구체적으로 무슨 협상안을 내고 요구했는지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약소국 한漢나라가 강대국 조선에게 부탁하는 형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5) 사신 섭하는 아무런 외교성과 없이 한漢나라에 돌아가면 처벌 받을 것이 두려워 배웅하는 조선비왕을 죽이고 도망치듯이 패수를 건너 요동외요에 들어간 것이다.
6) 조선과 한漢나라는 패수를 경계로 국경이 닿아 있었고, 왕험까지 가는 길목에 진번조선이 있었고 이는 옛날 연나라와 제와 국경을 닿고 있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7) 이 글에서 한漢나라와 조선의 국경은 패수임이 분명하다. 서에서 동으로 요동외요 (한나라 요새) - 패수- 상하장 – 조선의 왕험 (서울) 이다.
8) 기원전 195년경부터 기원전 109년 국경분쟁까지 대략 86년의 역사를 짧게 기록했다. 조선의 영토는 방 수천리였다. 다른 견해도 많지만 방은 정사각형의 한 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 변이 수천리인 정사각형의 땅이면 ‘은허(산서성 안양시)’ 기준 차이나 중원 대륙 대부분이다! 조선이 강대국이었음을 차이나 역사서가 증명해 주고 있다.
3. ‘사기’와 ‘한서’ 조선(열)전 원문 및 필자 번역.
1) 아래는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한서 조선전 원문’이다. 빨간 글씨는 ‘사기 조선열전’ 이다. 번역은 필자가 임의로 수정한다.
燕王 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椎‘魋’ 結 蠻夷服 而 東走出塞, 度 浿水, 居 秦故空地 上下障, 稍伇‘役’ 屬 眞番·朝鮮蠻夷 及 故燕·齊 亡 在‘命’ 者, 王之都 王險.
연나라 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갔다. ‘만’도 망명했다. 무리 천여명을 모아서 상투를 틀고 만이복을 입고 동쪽으로 달려 새(요동외요, 요새, 패수의 서쪽에 있다)를 나와서 패수를 건넜다. 진나라가 옛날 지배했던 공터에 상하로 담장을 치고 살았다. 점차 진번조선만이와 옛날연나라 및 제의 망명자를 복속시켰다,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했다.
① 孝惠·高后(時) 天下初定, 효혜, 고후 때 천하에 처음으로 국경이 생겼다. 효혜, 고후는 기원전 195~180년 임으로 (위)‘만’이 집권하여 정치를 할 때이다.
② 遼東太守 卽 約 滿 爲 外臣, 요동태수가 즉시 ‘만’에게 외신이 되어 아래 사항을 이행하도록 약속했다.
③ 保 塞外 蠻夷, 毋(無) 使 盜邊 (가장자리 변), 새외 (요동외요, 요새 즉 국경의 바깥) 에 있는 ‘만이’ 오랑캐들이 국경을 침략하지 않도록 하라 (‘만’이 최고 권력자다)
④ (諸)蠻夷 君長 欲入見 天子, 勿 得禁止. ‘만이’ 군장들이 한나라 왕 천자를 만나려고 할 때 못하도록 막지 말라
⑤ 以聞, 上許之, 이를 듣고 한나라 왕이 허락했다.
⑥ 以故 滿 得(以) 兵威財物 侵降 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 服屬, 方 數千里.
이고로, (위)만은 병력과 재물을 가지게 되고 그 영역안의 소읍(조선 제후를 비하하는 표현)들을 다스리니, 진번 임둔 모두 와서 복속하여 영토가 방 수천리에 달했다.
(우거에 전해질 때까지 대략 85년간 조선은 힘이 세어 한나라를 능히 제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⑦ 傳子 至孫 右渠, 所 誘 漢亡人 滋多, 아들에 전해져 후손 우거에 이르러, 한나라사람들을 (조선이) 많이 유인하여 한나라에서 도망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다.
⑦ - ① 傳子 至孫 右渠, 所 誘 漢亡人 滋多, 아들에 전해져 후손 우거에 이르러, 한나라사람들을 (조선이) 많이 유인하여 한나라에서 도망하는 사람들이 滋 지역에 많아졌다.
⑧ 眞番·辰國 (旁衆國) 欲 上書 見 天子, 又 雍(擁) 閼 弗(不)通.
(교통의 요지인 滋 지역에 한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사람이 많아져서) 진번 진국이 천자(한나라 왕)에게 상서를 올리거나 ‘雍’ 지역으로 직접가서 알현하고자 했으나 교통할 수가 없었다.
⑨ 元封二年(B.C.109), 漢 使 涉何 譙諭 右渠, 終 不肯 奉詔. 元封 2년(B.C.109) 에 漢나라는 使臣 涉何를 보내어 右渠를 꾸짖고 회유하였으나, [우거는] 끝내 天子의 命을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사기와 글자 비교는 부록 참조)
2) 사기와 한서의 차이가 크게 나는 부분은 眞番·辰國 (旁衆國) 과 雍(擁) 이다. 그 전에 傳子 至孫 右渠, 所 誘 漢亡人 滋多,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가 우선이다.
3) 네이버는 [滋를,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양육(養育)하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兹(자)로 이루어짐. 농작물을 키우는 「비」, 「물」의 뜻. 「우거지다」, 「불다」의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네이버 설명을 따르면 “한나라 도망자들이 불어서 많아졌다” 로 단순하게 해석된다.
사기 주본기. ‘더욱 심해졌다’의 ‘더욱’으로 사용
15 居二年,聞紂昏亂暴虐滋甚,殺王子比干,囚箕子。太師疵、少師彊抱其樂器而奔周。
4) 그러나 이 해석은 이어지는 뒷 문장과의 균형상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뒷 문장을 한꺼번에 보자.
傳子 至孫 右渠, 所 誘 漢亡人 滋多, 眞番·辰國 (旁衆國) 欲 上書 見 天子, 又 雍(擁) 閼 弗(不)通.
뒷문장은 “ 진번진국이 한나라 왕 천자에게 상서를 하고 싶을 경우 또 직접 ‘옹’에 가서 알현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이다.
5) 이렇게 교통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옹’으로 가는 길목이 ‘자’에 한나라 도망자들이 많은데, 그 도망자들이 사실상 한나라로 가는 것을 막기 때문이다. 한나라에서 도망 나온 사람들이 한나라 정부에 진번진국사람들이 들어가서 보고하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다.
특히 고대에는 사람 한 사람이 내는 세금도 중요하지만 군대, 성을 쌓거나 황하 제방을 쌓는 일에 아주 필요한 인력이기 때문에 한나라 관리들이 언제 한나라 도망자들을 찾아와서 붙잡아갈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6) 위 문장의 해석상 ‘雍’ 지역은 漢(한)나라 왕의 대궐이 있는 곳이 분명하다.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일대로 비정된다. 물론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한서지리지에는 군의 이름을 제대로 붙이기 힘든 특별시나 직할시 같은 군이 있었다. 京兆尹(경조윤), 左馮翊(좌풍익), 右扶風(우부풍) 세 곳이다. 그 중 우부풍 군에 옹雍 현이 있다.
右扶風,縣二十一:渭城,槐里,鄠,盩厔,斄,郁夷,美陽,郿,雍,漆,栒邑,隃麋,陳倉,杜陽,汧,好畤,虢,安陵,茂陵,平陵,武功,
7) 한나라, 제나라, 옛날 연나라, 진번조선이 한 군데에서 접경하는 교통의 요지인 ‘滋’ 지역은 지금의 어디일까? 그리고 진번· 진국에서 진국은 도대체 어디일까?(계속)
부록
【補注】 先謙曰, 后下史記有時字, 不可省.
師古曰: 「滿死傳子, 子死傳孫. 右渠者, 其孫名也.」
師古曰: 「滋, 益也.」 又未嘗入見, 師古曰: 「不朝見天子也.」
師古曰: 「辰謂辰韓之國也. 雍讀曰壅.」
【補注】先謙曰, 史記作眞番旁衆國.
校勘 007 『史記』에는 ‘后’ 다음에 ‘時’字가 있다.
校勘 008 『史記』에는 ‘無’로 되어 있다.
校勘 009 『史記』에는 ‘蠻’ 앞에 ‘諸’字가 있다.
校勘 010 『史記』에는 없다.
校勘 011 『史記』에는 ‘旁衆國’으로 되어 있다.
校勘 012 『史記』에는 ‘擁’으로 되어 있다.
校勘 013 『史記』에는 ‘不’로 되어 있다.
燕王 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椎‘魋’ 結 蠻夷服 而 東走出塞, 度 浿水, 居 秦故空地 上下障, 稍伇‘役’ 屬 眞番·朝鮮蠻夷 及 故燕·齊 亡 在‘命’ 者, 王之都 王險.
【補注】先謙曰, 官本, 伇作役.
師古曰: 「燕·齊之人亡 居 此地, 及 眞番·朝鮮蠻夷 皆屬 滿也.」
【補注】先謙曰, 亡在, 史記作亡命.
李奇曰: 「地名也.」
【補注】 沈欽韓曰, 隋書 高麗傳, 都 於平壤城, 亦曰 長安城, 東北六里, 隨山屈曲, 南臨浿水.
[新唐書, 平壤 在 鴨淥水 東南.]
朝鮮國志, 平安道治 平壤府, 東南去 王京 五百餘里.
杜佑云, 平壤, 卽王險城也.
校勘 004 『史記』에는 ‘魋’로 되어 있다.
校勘 005 「南本」·「殿本」『漢書』와 『史記』에는 ‘役’으로 되어 있다.
校勘 006 『史記』에는 ‘命’으로 되어 있다.
①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朝鮮王 滿은 옛날 燕나라 사람이다.
②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처음 燕나라의 全盛期로부터 일찍이 眞番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③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爲其逺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屬燕.
秦이 燕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遼東 外徼에 소속시켰는데, 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燕에 복속시켰다.
④燕王 盧綰 反, 入 匈奴, 滿 亡命, 聚黨千餘人, 魋 結 蠻夷服 而 東走 出塞, 渡浿水, 居 秦故空地 上下鄣,
연나라 왕 노관이 반하여 흉노로 들어갔고 위만은 망명하였다. 1000여 명을 모아 무리를 지어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복장을 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새(塞)를 나와 패수를 건넌 후에 옛 진국(秦國)의 공터인 상하장(上下鄣)에 살았다
⑤ 稍 役屬 眞番朝鮮 蠻夷 及 故燕 齊 亡命者 王之都 王險.
점차 眞番朝鮮 蠻夷 들을 복속하여 거느렸다. 옛날 연나라와 제나라(齊國)의 망명자들의 왕이 되었는데 도읍은 왕험(王險)이다.
⑨元封二年(B.C.109), 漢 使 涉何 譙諭 右渠, 終 不肯 奉詔.
何去至界(上), 臨浿水, 使馭(御) 刺殺 送何者 朝鮮裨王 長, 卽 渡水水, 馳入塞, 遂歸報天子曰 「殺朝鮮將」. 上爲其名美, 弗詰 (卽不詰) , 拜何爲 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發兵攻襲 (襲攻), 殺何.
師古曰: 「譙, 責讓也, 音才笑反.」
師古曰: 「長者, 裨王名也. 送何至浿水, 何因刺殺之.」
【補注】先謙曰, 地理志, 東部都尉治遼東武次縣.
校勘 014 『史記』에는 ‘界’ 다음에 ‘上’字가 있다.
校勘 015 『史記』에는 ‘御’로 되어 있다.
校勘 016 「宋本」에는 ‘度’로 되어 있으며, 『史記』에는 ‘水’자가 없다.
校勘 017 『史記』에는 ‘卽不詰’로 되어 있다.
校勘 018 「宋本」과 『册府』·『史記』에는 ‘襲攻’으로 되어 있다.
校勘 019 『史記』에는 ‘渤海’로 되어 있다.
校勘 020 『史記』에는 ‘萬’다음에 ‘人’字가 있다.
校勘 021 『史記』에는 ‘討’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