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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조선 한 朝鮮 韓 민족과 차이나 지나 한 支那 漢 족간의 황하문명 고대사 쟁탈전. ‘조선’과 전쟁이 끝나고 장군들을 포상하기는 커녕 죽이거나 천민으로 강등시킨 한漢 나라. 누가 승리한 전쟁인가? 다시보는 ‘사기 조선열전’(2)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55)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4.18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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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많이 고치고 삭제했겠지만,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게시한 차이나 역사책 사기 조선열전을 공부하고 다음을 추리할 수 있다.

 

2) ‘코리아 조선 한 민족’ (이하 코리아 라고 한다)와 같은 민족이었던 아니었던 간에 조선의 역사를 현재 황하 유역에서 들어내고 조선의 역사를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등으로 이동시킬려고 노력하는 세력이 (이하 차이나라 한다) 분명히 있다.

 

3) 차이나는 실체가 불분명하며 편의상 화하족’, ‘한족으로 불리며 현대에서는 한족’ ‘중화민족으로 불리기도 한다. ‘차이나는 수십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이고 DNA 검사를 통한 연구를 하지 않았거나, 했어도 차이나를 유지하기에 불리한 정보가 너무 많아 밝히지 않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차이나는 몇 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었는지와 관계 없이 1개의 절대다수 민족으로 모아서 공산당 1당 지배를 유지하기 쉽도록 하는 것이 역사왜곡 동북공정의 기본적인 목적인 것으로 추정한다.

 

2. ‘사기 조선열전비판 요약

 

1)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은 코리아차이나의 황하유역 주도권 쟁탈전이었다. 고대의 대부분의 전쟁은 국경분쟁에서 비롯되었다. ‘사기 조선열전이 기원전 195년 경 지금의 황하 서쪽 지방에 있었던 옛날 연나라에서 조선으로 들어와 조선의 왕이 되고 한나라와 국경분쟁을 하자 한나라조선을 침공한 것이다.

 

2) ‘한나라조선침공 까지는 사실이라고 인정하여도, ‘조선한나라에 패하여 19세기의 식민지수준의 지배를 받았다는 주장은 인정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기조선열전은 한나라와 조선의 전쟁에서 이기고 난 후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을 포상하기는 커녕 죽이거나 천민으로 강등시켰음을 기록하고 있다.

 

전쟁 시작전 을 회유한 요동태수’, 전쟁중에 독전대로 파견되었다가 한나라 왕에게 죽은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면 요동군과 제남군은 기록하고 있는데 전쟁 종료후 설치했다는 4군의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았다.

 

4군의 이름을 기록하기는 커녕 도리어 5 제후를 거명하였는데, 5제후는 원래 조선의 제후였다.

 

3) ‘성기를 죽이고 화친을 맺은 우거의 아들 조선연방의 황제 자리를 내어 놓고 왕험성이 있던 지역의 일개 제후가 됨으로써, ‘조선연방은 분열되어 지명으로만 조선이 남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사기조선열전편찬후 약 200년이 지나 편찬된 한서 지리지에서 낙랑군에 속한 현으로 조선현, 패수현 등이 나온다.

 

우거의 아들 이 제후 왕이 된 지역은 지역이며 이 지역이 왕험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長 爲

 

3. ‘사기 조선열전원문 요약

 

1) 기원전 109년 황하유역에서 한나라는 조선과 국경분쟁 중이었다. 한나라 사신 섭하가 귀국길에 배웅한 조선비왕’ (‘조선의 제후왕) 장을 죽였는데 한나라 왕이 이를 칭찬하고 요동동부도위에 임명하자 조선이 반격하여 섭하를 죽였다.

 

2) 이에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 황하 유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조선을 침공했다. 요동성을 나와 동쪽으로 진군한 한나라 좌장군이 이끄는 5만 군대의 선봉을 조선의 왕 우거가 제후국의 수도 까지 나와서 싸워 물리쳤다. (왕험은 조선연방의 수도, ‘은 제후국의 수도. 左將軍 荀彘 出 遼東, 討 右渠. 右渠 發兵 距 . 左將軍 卒 正多 率 遼東兵 先 縱, 敗散, 多還走, 坐 法 斬.

 

3) 양면작전으로 에서 출발하여 발해를 떠난 한나라 누선장군 7천병력은 열구에 상륙하고 왕험성 부근에서 거의 전멸하였다. 樓船將軍 將 齊兵七千人 先 至 王險.

 

4) 한나라가 위산을 보내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다. ‘조선의 태자가 이끄는 군사들이 항복하기 위해 말5천필과 1만명을 데리고 왔으나 무기를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고 돌아갔다. 한무제는 위산을 죽였다.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이를 “‘조선의 태자가 이끄는 군사 1만명에게 위산의 부대가 패하여 패수 서쪽으로 한나라 군사가 물러갔다.”로 해석한다.

 

5) 한나라가 조선왕험성을 포위하고 항복할 것을 협상하면서 한나라 좌장군누선장군사이에 갈등이 증폭된다.

한나라 무제가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독전한다. ‘공손수누선장군을 체포하자 한나라 왕은 누선장군이 아니라 공손수를 죽인다.

使 濟南太守 公孫遂 [] , (중략) 以報 天子 天子 誅 遂

 

제남태수는 한나라 편일까? ‘조선편일까?

 

6) ‘좌장군이 공격에 성공하고. ‘한음’·‘왕협’· ‘노인’ (조선의 제후 왕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이 한나라에 항복한다. ‘한음’·‘왕협’· ‘노인조선의 제후국이나 승상임으로 항복할 수도 있다.

朝鮮 路人· 韓陰· 尼谿 相 · 將軍 王唊

··路人 皆 亡降 漢.

 

7) 니계상 삼이 우거’ (조선의 왕)을 죽이고 항복했으나 왕험성은 함락이 안 되었다. 니계상은 ()’의 승상이다.

尼谿相 參 乃 使人 殺 朝鮮王 右渠 來降. 王險城 未下

 

8) ‘우거의 아들 , 항복하고 죽은 노인의 아들 가 최후까지 저항한 용사 성기를 죽이고 항복하여 4군을 설치한다. 4군의 이름은 없다. 실제는 5 제후에게 영토를 분할했다. ‘우거왕의 죽음 이외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니계상(예맥의 승상) 삼이 우거를 죽였는데 우거의 아들은 그때 어디 있었고, ‘우거의 아들이 최후까지 저항한 성기를 죽였다는데,

 

성기우거를 죽이고 (쿠데타) ‘우거의 아들이 성기를 죽이고 나서 한나라와 화친한 것 아닐까?

相 路人之子 最 告諭 其民, 誅 成巳, 以故 遂定朝鮮, 爲四郡, 封 參 爲 澅淸侯, 陰 爲 荻苴侯, 唊 爲 平州侯, 長 爲 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 溫陽侯 (5 제후)

 

9) ‘조선은 항복했다. 그런데 승리한 한나라 장군들은 상을 받기는커녕 처벌되었다. 좌장군은 참수당했고 누선장군은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누선장군은 한서공신록 표에는 공신으로 표기되어 있다.

左將軍 徵 至 , 坐 爭功 相嫉, 乖計, 弃市. 樓船將軍 亦 坐兵 至 洌口, 當 待 左將軍, 擅 先縱, 失亡多, 當誅, 贖爲庶人.

 

4. 조선은 전쟁에서 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을 통하여 내분으로 5제후 국으로 분열되었다. 지명은 조선, 예맥, 진번으로 남아서 계속 차이나 역사책에 나온다. 사마천 사기 편찬 200년 후인 기원후 100년경에 나온 한서에 한사군의 4 군 이름이 나오지만 정작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군과 현도군만 나온다.

 

현도군은 군이 설치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지명일 뿐이다. 겨우 3개 현이 있는데 이름이 서개마, 상은대, 고구려 현이다. 사마천 사기에는 이름도 나오지 않는 고구려현이 왜 등장할까? 조작인 것이다. ‘아닌 단순한 지명인 것이다. 후대에 써 넣은 결정적인 증거다.

玄菟郡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上殷台西蓋馬

 

낙랑군은 낙랑이라는 지명이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낙랑군 25개 현 첫 번째가 조선현이고 세 번째가 패수현이다.

 

한서 지리지 다른 군, 가령 낭사군 琅邪郡 에 나오는 사망駟望 현과 같은 사망駟望 현이 있다. 한나라 때 설치되었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대방帶方현이 있다.

 

樂浪郡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縣二十五朝鮮俨邯浿水含資黏蟬遂成增地帶方駟望海冥列口長岑屯有昭明鏤方提奚渾彌吞列東傥不而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琅邪郡戶二十二萬八千九百六十口一百七萬九千一百縣五十一 (중략) 駟望安丘高陵臨安石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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