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
1) 고대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많이 고치고 삭제했겠지만,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가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게시한 차이나 역사책 ‘사기 조선열전’을 공부하고 다음을 추리할 수 있다.
2) ‘코리아 조선 한 민족’ (이하 코리아 라고 한다)와 같은 민족이었던 아니었던 간에 ‘조선’의 역사를 현재 황하 유역에서 들어내고 ‘조선’의 역사를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등으로 이동시킬려고 노력하는 세력이 (이하 ‘차이나’라 한다) 분명히 있다.
3) 차이나는 실체가 불분명하며 편의상 ‘화하족’, ‘한족’으로 불리며 현대에서는 ‘한족’ ‘중화민족’으로 불리기도 한다. ‘차이나’는 수십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이고 DNA 검사를 통한 연구를 하지 않았거나, 했어도 ‘차이나’를 유지하기에 불리한 정보가 너무 많아 밝히지 않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차이나’는 몇 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었는지와 관계 없이 1개의 절대다수 민족으로 모아서 공산당 1당 지배를 유지하기 쉽도록 하는 것이 역사왜곡 동북공정의 기본적인 목적인 것으로 추정한다.
2. ‘사기 조선열전’ 비판 요약
1)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은 ‘코리아’와 ‘차이나’의 황하유역 주도권 쟁탈전이었다. 고대의 대부분의 전쟁은 국경분쟁에서 비롯되었다. ‘사기 조선열전’은 ‘만’이 기원전 195년 경 지금의 황하 서쪽 지방에 있었던 옛날 연나라에서 ‘조선’으로 들어와 ‘조선’의 왕이 되고 ‘한나라’와 국경분쟁을 하자 ‘한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것이다.
2) ‘한나라’의 ‘조선’침공 까지는 사실이라고 인정하여도, ‘조선’이 ‘한나라’에 패하여 19세기의 ‘식민지’ 수준의 지배를 받았다는 주장은 인정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사기조선열전’은 한나라와 ‘조선’의 전쟁에서 이기고 난 후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을 포상하기는 커녕 죽이거나 천민으로 강등시켰음을 기록하고 있다.
② 전쟁 시작전 ‘만’을 회유한 ‘요동태수’, 전쟁중에 독전대로 파견되었다가 한나라 왕에게 죽은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면 요동군과 제남군은 기록하고 있는데 전쟁 종료후 설치했다는 4군의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았다.
③ 4군의 이름을 기록하기는 커녕 도리어 5 제후를 거명하였는데, 5제후는 원래 ‘조선’의 제후였다.
3) ‘성기’를 죽이고 화친을 맺은 ‘우거’의 아들 ‘장’이 ‘조선연방’의 황제 자리를 내어 놓고 왕험성이 있던 지역의 일개 제후가 됨으로써, ‘조선연방’은 분열되어 지명으로만 ‘조선’ 이 남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사기조선열전’ 편찬후 약 200년이 지나 편찬된 ‘한서 지리지’에서 낙랑군에 속한 현으로 조선현, 패수현 등이 나온다.
‘우거’의 아들 ‘장’이 제후 왕이 된 지역은 ‘기’ 지역이며 이 지역이 왕험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長 爲 幾侯
3. ‘사기 조선열전’ 원문 요약
1) 기원전 109년 황하유역에서 한나라는 조선과 국경분쟁 중이었다. 한나라 사신 ‘섭하’가 귀국길에 배웅한 ‘조선비왕’ (‘조선’의 제후왕) 장을 죽였는데 한나라 왕이 이를 칭찬하고 ‘요동동부도위’에 임명하자 ‘조선’이 반격하여 ‘섭하’를 죽였다.
2) 이에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 황하 유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조선’을 침공했다. 요동성을 나와 동쪽으로 진군한 한나라 좌장군이 이끄는 5만 군대의 선봉을 ‘조선’의 왕 ‘우거’가 제후국의 수도 ‘험’까지 나와서 싸워 물리쳤다. (왕험은 조선연방의 수도, ‘험“은 제후국의 수도. 左將軍 荀彘 出 遼東, 討 右渠. 右渠 發兵 距 險. 左將軍 卒 正多 率 遼東兵 先 縱, 敗散, 多還走, 坐 法 斬.
3) 양면작전으로 ‘제’에서 출발하여 발해를 떠난 한나라 누선장군 7천병력은 열구에 상륙하고 ‘왕험’성 부근에서 거의 전멸하였다. 樓船將軍 將 齊兵七千人 先 至 王險.
4) 한나라가 ‘위산’을 보내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다. ‘조선’의 태자가 이끄는 군사들이 항복하기 위해 말5천필과 1만명을 데리고 왔으나 무기를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고 돌아갔다. 한무제는 위산을 죽였다.
太子亦疑使者左將軍詐殺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山還報天子, 天子誅山.
이를 “‘조선’의 태자가 이끄는 군사 1만명에게 ‘위산’의 부대가 패하여 패수 서쪽으로 한나라 군사가 물러갔다.”로 해석한다.
5) 한나라가 ‘조선’ 왕험성을 포위하고 항복할 것을 협상하면서 한나라 ‘좌장군’과 ‘누선장군’ 사이에 갈등이 증폭된다.
한나라 무제가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내어 독전한다. ‘공손수’가 ‘누선장군’을 체포하자 한나라 왕은 ‘누선장군’이 아니라 ‘공손수’를 죽인다.
使 濟南太守 公孫遂 [正] 之, (중략) 以報 天子 天子 誅 遂
제남태수는 한나라 편일까? ‘조선’ 편일까?
6) ‘좌장군’이 공격에 성공하고. ‘한음’·‘왕협’· ‘노인’ (조선의 제후 왕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이 한나라에 항복한다. ‘한음’·‘왕협’· ‘노인’ 은 ‘조선’의 제후국이나 승상임으로 항복할 수도 있다.
朝鮮 相 路人· 相 韓陰· 尼谿 相 參 · 將軍 王唊
陰·唊·路人 皆 亡降 漢.
7) 니계상 삼이 ‘우거’ (조선의 왕)을 죽이고 항복했으나 왕험성은 함락이 안 되었다. 니계상은 ‘예(맥)’의 승상이다.
尼谿相 參 乃 使人 殺 朝鮮王 右渠 來降. 王險城 未下
8) ‘우거’의 아들 ‘장’과, 항복하고 죽은 ‘노인’의 아들 ‘최’가 최후까지 저항한 용사 ‘성기’를 죽이고 항복하여 4군을 설치한다. 4군의 이름은 없다. 실제는 5 제후에게 영토를 분할했다. ‘우거’왕의 죽음 이외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니계상(예맥의 승상) 삼이 ‘우거’를 죽였는데 ‘우거’의 아들은 그때 어디 있었고, ‘우거’의 아들이 최후까지 저항한 ‘성기’를 죽였다는데,
‘성기’가 ‘우거’를 죽이고 (쿠데타) ‘우거’의 아들이 ‘성기’를 죽이고 나서 한나라와 화친한 것 아닐까?
相 路人之子 最 告諭 其民, 誅 成巳, 以故 遂定朝鮮, 爲四郡, 封 參 爲 澅淸侯, 陰 爲 荻苴侯, 唊 爲 平州侯, 長 爲 幾侯. 最以父死頗有功, 爲 溫陽侯 (5 제후)
9) ‘조선’은 항복했다. 그런데 승리한 한나라 장군들은 상을 받기는커녕 처벌되었다. 좌장군은 참수당했고 누선장군은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누선장군은 ‘한서’ 공신록 표에는 공신으로 표기되어 있다.
左將軍 徵 至 , 坐 爭功 相嫉, 乖計, 弃市. 樓船將軍 亦 坐兵 至 洌口, 當 待 左將軍, 擅 先縱, 失亡多, 當誅, 贖爲庶人.
4. 조선은 전쟁에서 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을 통하여 내분으로 5제후 국으로 분열되었다. 지명은 조선, 예맥, 진번으로 남아서 계속 차이나 역사책에 나온다. 사마천 사기 편찬 200년 후인 기원후 100년경에 나온 한서에 한사군의 4 군 이름이 나오지만 정작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군과 현도군만 나온다.
현도군은 군이 설치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지명일 뿐이다. 겨우 3개 현이 있는데 이름이 서개마, 상은대, 고구려 현이다. 사마천 사기에는 이름도 나오지 않는 고구려현이 왜 등장할까? 조작인 것이다. ‘군’ 아닌 단순한 지명인 것이다. 후대에 써 넣은 결정적인 증거다.
玄菟郡,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上殷台,西蓋馬。
낙랑군은 ‘낙랑’이라는 지명이 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낙랑군 25개 현 첫 번째가 조선현이고 세 번째가 패수현이다.
한서 지리지 다른 군, 가령 낭사군 琅邪郡 에 나오는 사망駟望 현과 같은 사망駟望 현이 있다. 한나라 때 설치되었는지 조차 의심스러운 대방帶方현이 있다.
樂浪郡,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縣二十五:朝鮮,俨邯,浿水,含資,黏蟬,遂成,增地,帶方,駟望,海冥,列口,長岑,屯有,昭明,鏤方,提奚,渾彌,吞列,東傥,不而,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琅邪郡,戶二十二萬八千九百六十,口一百七萬九千一百。縣五十一 (중략) 駟望,安丘,高陵,臨安,石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