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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 삶은 시』 ‘염소 선생’ (1)

윤한로 시인
  • 입력 2023.04.1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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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시로 엮은, 내 시를 삶으로 엮은

4부 염소 선생(1)

 

삼수를 했습니다만

겨우 들어간 대학도

시 쓴답시고

술 먹고 놀며 어영부영

한두 학년 다니다 그만 잘렸네나

그래 다시 체력장에다 예비고사를 치곤

딱히 갈 덴 없어라

또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다시금 들어갔습죠

잔뜩 지쳐

잔뜩 쳐져

썩어 문드러진 시

쓴답시고

 

나, 윤 머시기

 

물건도 아니었습니다

괴물도 아니었습니다

폐인도 못 됐습니다

역사와 시대와 진실에

한창 젊음에

욕되지 않으려

머리띠하고 꽃병 던지고

그런 투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술꾼도 아니었습니다

생각하면 부끄럽고 쑥스럽기

이루 말할 수 없으니

 

그렇습니다

그저 중간이나 가얐다

학점이나 따고

졸업이나 해얐다

그럭저럭 학교 꼰대나 되얐다

그게 다인 얼치기올시다

가진 거라곤 조금

화려한 말빨 수수한 외모

이제 시창작 나부랭이나 가르칠 겁니다

허나 뭐랄까

문학은 워낙이 스스로 하는 것

누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니

얼마나 좋습니까 더더군다나

시는 가슴으로 쓴다니

 

뒷모습

 

선생님께서는 평소 버릇처럼 뒤통수를 긁적인다

칠판에 쓰던 시를 멈춘 채

계속 뒤통수를 긁적인다 조금 있다가는

오른손에 잡고 있던 분필을 칠판 선반에 내려놓은 채

우리 손바닥을 때릴 때 쓰는 장구채를 집어 들어

머릿속을 이곳저곳 쑤신다

이렇게 한참을 긁적이던 곳은

더 흉하게 사방으로 뻗친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새치도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하고

까망 양복에는 비듬이 떨어진다

머리카락은 정전기 때문에

잔머리가 삐죽삐죽 선다

이윽고 필기를 마친 선생님께서는 분필 묻은 손을

엉덩이에 쓱쓱 문지른다

까망 바지에 하얀 분필 자국이

손가락 모양으로 선명하게 남는다

분필 자국이 난 곳 바로 옆엔 뒷주머니가 있다

오른쪽 뒷주머니에는

얄팍한 갈색 지갑이 반쯤 꽂혀 있다

이윽고 교실 뒤편에 걸린 반신 거울로 다가가

밤색 슬리퍼를 대충 꾸겨 신은 채

한쪽 발끝을 세워 교실 바닥에 탁탁 소리를 내며

연신 거울을 바라본다

아까 떨어진 하얀 비듬을 툭툭 털어내고

머리를 한 번 쓸어내린다 하지만

뒷머리는 여전히 기역자 모양으로 뻗쳐 있다

엉덩이에 묻은 분필 자국도 그대로 남아 있다

* 뒷모습은 자퇴한 어떤 제자(안타깝게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음)가 쓴 습작품

 

지각도 제일 많고

조퇴도 제일 많고

결석도 제일 많고

귀 뚫고 입 뚫고

염색하고 빠마한 애들도 제일 많고

치마 짧은 애들 제일 많아요

시간 시간 매점에 가 있는 치들

옥상에 가 있는 치들

1번가에 둘셋 돌아다니는 치들

혼내도 혼내도

한이 없겠다 난 혼낼 줄도 모르는데

그래서 그게

 

내 노래는

 

일어서 앉아

일어서 앉아

어쭈 안해

날마다 날마다

밥먹듯

내 노래는 이거랍니다

* 이제는 어린 학생들한테 옛날처럼 이렇게 기합을 주거나 출석부로 때리거나 해선 절대 안 됩니다.

 

윤 선생은 언제가 제일 무서워?

나는 맨날 엎드려 자던 애가

갑자기 눈 반짝 뜨고 수업을 들을 때가

가장 무섭던데

그럼 걔는 자고 있는 게 아니었고나

깊숙이 엎드려 뭔가

슬퍼했겠구나 아파했겠구나

먼먼 이슬아, 구름아, 하늘아

 

이슬이

 

좋아하는 건 뭐냐 고민은 없냐

따위 묻지 마세요

인생이고 가족이고 사랑이고 따위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선배요, 책상 바닥 엎어진 건, 깊숙이 무너진

그건, 엎어졌다 눈 반짝 뜨고 일어난

그건, 가장 무서운 게 아니라

가장 아픈 게 아닐까요

앞으로 해도 이슬이

거꾸로 해도 이슬이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우리

손가락을 물어뜯거나

울긋불긋, 팔뚝에 손대거나

하진 말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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