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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地理志(한서지리지) 103개 군국 중에 한4군에 속한다는 진번군과 임둔군은 없다! (2)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48)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3.25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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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1) ‘상서의 우공9, ‘사기에서 전해지는 지명과 당나라 당시의 지명을 교묘히 섞어 놓은 것이 한서지리지.

 

황하 이북은 당나라의 강역이 아니라 대부분 고구리() 등 동이족의 강역이었다. 당나라로서는 황하 이북에 연고가 있는 것으로 역사를 조작하여야 황하 이북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리()를 침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없던 한4군을 만들어내어야 하고 한4군과 소속 현을 도저히 찾을 수 없도록 마구 뿌려 놓은 것이다.

 

특이하게 한 4군으로 알려진 진번·임둔·낙랑·현도 중에서 한서지리지에 이름이 있는 군은 낙랑군과 현도군이다.

 

진번군과 임둔군은 없다.

 

한서 한무제본기에는 조선침공사실과 진번·임둔·낙랑·현도 4군을 설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역시 안사고가 삽입한 것으로 본다. 이 부분은 다음호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어 본다.

 

2) 한서에 주석을 단 안사고가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는 명분을 세우기 위해 역사책을 대거 고친 것이다. 안사고가 637년 이후에 한서에 주석을 단 것으로 전해 온다. 안사고가 죽은 것은 645년 고구려 침공길이었다. 645년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공하고 대패하여 649년 후유증으로 죽었다.

 

3) 변조한 부분중 하나는 한사군의 설치이다.

기원전 100년경에 편찬된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以故遂定朝鮮(이고수정조선)為四郡(위사군)封參為 澅清侯(봉삼위획청후)陰為 荻苴侯(음위적저후)唊為 平州侯(겹위평주후)[]為 幾侯([]위기후)最 以父死頗有功(최이부사파유공)為 溫陽侯(위온양후)

 

為四郡(위사군) 바로 다음 이어지는 글이 5명의 제후를 봉한 이야기다. 즉 아무런 의미 없는 為四郡(위사군)을 넣은 것이다!

 

수정조선 위45제후에서 4을 넣은 것이 확실하다. 4군의 이름을 넣지 않은 것은 처음 변조할 때 남의 눈을 의식했을 것이라 본다.

 

4) 그러나 반고의 한서는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명이 고친 것이어서 안사고가 주석을 달면서 추가하기가 무척 쉬웠을 것이다. 한서 조선전에는 4군의 이름이 나온다. 순서도 중요하다. 진번·임둔·낙랑·현도이다. 한무제 본기에도 4군의 이름이 적혀 있다.

 

故 遂定朝鮮 爲 眞番·臨屯·樂浪·玄菟四郡. 封參爲澅淸侯, (후략)

 

5) 그러나 정작 한서 지리지 에는 진번, 임둔 2개 군은 없다. 물론 2개 현도 없다!

 

6) 한서지리지는 103개 군과 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은 1,314 개라고 기록하고 있다. 어느 주에 어느 군이 속하는지를 표시하지 않았으며, 경기라는 이름이 잘 쓰이지 않음에도 경기를 제외하면 13, 경기를 포함하면 14개 행정단위인 것으로 연구자들이 스스로 추정하여 기록하고 있다.

 

군과 국을 합하여 103개이며, 현은 1,314개이다. 138 本秦京師 (중략) 凡郡國一百三縣邑千三百一十四道三十二侯國二百四十一(후략. 지리지 하권. 다빈치 원서 기준 문장 138)

 

7) 한서지리지의 기록이 신빙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또 있다. 낙랑군은 25개 현이다. 요동군은 18, 요서군14, 우북평군은 16개이다. 그런데 현도군은 달랑 3개다. 고구려, 상은대, 서개마 3개 현이다. 의도적으로 고구려를 축소하자는 의도가 명확히 보이는 장면이다.

 

8) 1,314개 현을 기록하면서 당나라 왕조의 침략명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적절히 고치는 것은 너무 쉽다. 차이나 역사 연구가들 조차 1,314개 현중 어느 현이 지금 어디인지를 비정하지 못하는 것이 많은 지경이다.

 

9) ‘사기한서의 원문을 집중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책편찬후 수백년 1천년 이상이 지난 사람들이 달아놓은 주석은 믿을 수가 없다. 다만 주석을 달던 시기의 상황을 잘 분석하여 참고해야만 하는 것이다. 모든 왕조는 자신 들의 왕조의 목적으로 지속적으로 사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고쳐 왔으며, 수시로 행정구역의 이름과 위치를 바꾸어 과거 다른 왕조 시절의 역사를 지우도록 노력해 왔다.

 

10) 이런 관점에서 후학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글이 있다. 중요 부분을 첨삭없이 전재한다.

 

한서의 저자 반고와 함께 교서랑에 임명되어 궁중 도서의 교정과 정리를 맡았던 가규(賈逵, 30~ 101)는 조정이 신비주의적 예언과 괴이한 참위를 좋아한 점을 알고 고전을 참우설로 풀이 하여 황실의 신임을 받아다. 한서는 문번 난성(文繁難省)이라, 즉 글이 번잡하여 이해하기 어려워서 황제가 순열(荀悅, 148~ 209)에게 명하여 한서의 내용을 기전체로 개조 해서 만든 책이 전한기다[1].

 

[1]. 後漢書 荀韓鍾陳 列傳: 帝好典籍常以 班固漢書 文繁難省乃令悅依左氏傳體以為漢紀三十篇詔 尚書給筆札

 

후한서 가규열전을 보면 그가 옛 경전에 실린 백여 만자 (百餘萬言)를 바꾸어 어마어마한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 아 슬프다는 기록이 있다.

 

後漢書. 賈逵傳逵數為帝言古文尚書與經傳爾雅詁訓相應. 逵所著經傳義詁及論難百餘萬言學者宗之, 後世稱為通儒.

論曰賈之學行乎數百年中遂為諸儒宗亦徒有以焉爾

 

賈逵能附會文致最差貴顯世主以此論學悲矣哉

 

그러한 사람들이 편술한 한서를 일차 사료로 인용 했다. 출발 부터 사료를 잘못 선택 하고 틀린 사료를 후세 사람들이 다시 인용 했다. 참위설을 앞세웠던 사가들의 영향력이 진수에게도 끼첬다고 본다. 진수가 남긴 이해 하기 오묘한 기록을 후한 말기에 응소(應劭曰)가 주를 붙였다:

 

사마천의 조선 열전에는 우거왕의 방어지나 수도가 강물로 싸였다는 기록이 없다. 물에 둘러 싸였다는 근거를 어디서 구했나 궁금하다.

 

응소는 그러한 근거를 <신찬(臣瓚曰)이 왕험성은 낭랑군 패수 동쪽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에 있다. 이러니 당연히 험독이야.> 라고 했다. 같은 내용을 강희자전에서도 인용 했다[6].

 

신찬(臣瓚)이란 어느 사람을 뜻한 글자다. 그가 누구인가는 학인 해 보았다.

 

중국에서 올린 위키백과에는 수경주에 나오는 서진의 설찬(西晉 薛瓒)을 신찬이라 했다[7]. 그러나 수경주에 설찬이 그러한 예기를 했다는 기록이 없다:

[6].康熙字典: 史記·朝鮮傳都王險。《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前漢·地理志遼東郡險瀆。《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名

 

[7].维基百科: 薛瓒西晋太原人薛瓚即漢書的註解家臣瓚北魏酈道元在水經注十六卷穀水注中明確指出薛瓚 漢書注》。孟森著臣瓚考認為臣瓚為即薛瓚

 

남만주에 나타난 조선(朝鮮)의 위치-5:조선(朝鮮)이 요하 동쪽으로 나타난 사연: 이모솔.

https://www.ancienthistoryofkorea.com/%EB%82%A8%EB%A7%8C%EC%A3%BC%EC%97%90-%EB%82%98%ED%83%80%EB%82%9C-%EC%A1%B0%EC%84%A0%E6%9C%9D%E9%AE%AE%EC%9D%98-%EC%9C%84%EC%B9%98-5-%EC%A1%B0%EC%84%A0%E6%9C%9D%E9%AE%AE%EC%9D%B4-%EC%9A%94/

 

 

2. 지난호에 계속하여 한서지리지 낙랑군을 살펴보자.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

〕 應劭曰:「故朝鮮國也。」師古曰:「樂音洛浪音狼。」

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

有雲鄣縣二十五

 

편의상 25현에 1번 조선() 2번 남감()으로 번호를 붙였다. 과 같은 번호는 지난호에서 밝혔듯이 차이나 원문에 있는 주석 번호이다.

 

1) 朝鮮,〔조선현(朝鮮縣)이 있다.

〕 應劭曰:「武王封箕子於朝鮮。」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나라 무왕(武王),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고 했다].

 

1-1) 응소는 기원후 200년 사람이며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사건은 기원전 1,000년 경 사건이다. 기원후 200년은 위촉오 세 나라가 혈전을 벌이던 시대로서 동쪽으로 옮긴 한나라 동한은 이름뿐인 상태였으므로 낙랑군이 어디인지, 실제 낙랑군이 존재했는지 조차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다.

 

1,200년 후의 응소의 발언을 1,600년 후에 안사고가 옮긴 것인데 응소가 언급한 조선이 낙랑군 조선현이라는 근거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안사고는 당나라가 고구려, 백제를 쓰러뜨리기 전인 645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 태종의 명에 따라 비서성에서 오경의 자구를 바로잡고 정본을 만드는 작업을 하였으며, 정관 7(633)에는 비서소감에 임명되어 전적의 간행과 교정을 전문적으로 맡았다. 정관 11(637)에는 대당의례를 편찬하고, 당시 태자이던 이승건의 명에 의해 반고가 지은 한서의 주석을 달았다. (위키백과 안사고)

 

2) 言冄,〔*(/염 감) 남감현(䛁邯縣)이 있다.

〕 孟康曰:「〈言冄音男。」師古曰:「〈言冄音乃甘反邯音酣。」

[맹강(孟康)이 말하기를, "()의 음()은 남()이다"라고 했다.

안사고(顔師古曰)는 말하기를,"()의 음()은 내()와 감()의 반절(反切) 이며, 의 음()은 감()이다"라고 했다].

 

2-1) 맹강은 기원후 280년 경 사람이다.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본다

2-2) 이 아니라 이라고 읽을까? 안사고는 한단을 감단으로 읽지 않고 한단으로 읽는다. 왜 안사고는 같은 글자를 달리 읽는 것인가? 이는 낙랑군의 위치를 숨기기 위한 의도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고 본다.

 

네이버 한자사전은 으로 읽는다고 표시되어 있다.

’(땅 이름 감, 조나라 서울 한) 뜻을 나타내는 우부방((=) 마을)와 음()을 나타내는 글자 ()이 합()하여 이루어짐.

 

2-3) 바이두(차이나의 네이버)으로만 읽는다. ’으로 읽지 않는다.

’ - 百度汉语 hán

 

2-4) 漢字(한자) 는 차이나의 것이 아니라 코리아의 것이라는 반증이다.

 

2-5) (흥겨울 감, 흥겨울 함) 뜻을 나타내는 닭유(, )와 음()을 나타내는 글자 ()이 합()하여 이루어짐. (네이버)

 

2-6) ‘이 음가 가 서로 교환되고 으로 연음화 되었다고 이론 구성할 수는 있다.

 

2-7) 낙랑군 두 번째 현인 남감현은 남한현으로 읽을 수도 있다. 남한현은 지금까지도 이름을 유지한 한단시鄲市 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2-8) 기원전 1,000년 경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실제 기자가 조선에 갔는지는 알 수 없다) 기자가 다시 은나라 서울을 지나가면서 시를 읊은 것으로 보아 은나라 서울과 조선은 매우 가깝다.

 

은나라 서울로 여겨지는 朝歌조가는 이름도 조선의 조와 기자가 읊은 노래 가가 합쳐진 글자이며, 지금 조가朝歌는 학벽시의 소개에 은나라 도읍지라고 한다. 또다른 은나라의 도읍지라는 이름을 가진 안양시 은도구와 약 50떨어져 있다.

朝歌 河南省鹤壁市中国商朝首都

朝歌zhāo gē),是商朝国都3000多年前的商朝武丁大帝是朝歌城市的奠基者

https://baike.baidu.com/item/%E6%9C%9D%E6%AD%8C/70588?fr=aladdin

 

은허가 발굴된 안양시는 아예 殷都區 (은나라도읍지인 구)가 있다. 은도구에서 북쪽으로 한단시 한산구까지는 약 62이다. 은나라가 학벽시에서 한단시 북쪽까지가 강역이었다고 보면 서쪽은 태행산맥이고 동쪽은 화북평원 논밭으로 살기 좋은 곳이었다. 전호에서 기술했듯이 황하는 기원전 132년에 지금의 학벽시 준현에서 동남쪽으로 물길을 바꾸었다고 한서 한무제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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