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서 한무제 본기 漢書 武帝紀 원광 元光 3년 (기원전 132년) 봄에 하수(황하)가 흐름을 옮겨 元光 三年春 河水 徙 (사)
*돈구(頓丘)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勃海)로 들어갔다. 從*頓丘 東南 流入 勃海。〔一〕
사고가 말하기를 ‘돈구는 언덕 이름으로서 현 이름이 되었다. 본래 위나라 땅이다. 지리지에서는 동군에 속한다. 지금은 (당나라) 위주에 속한다.
〔一〕 師古曰:「頓丘,丘名,因以為縣,本 衛地 也。地理志 屬 東郡,今則 在魏州界也。」 (부록 참조)
2. 돈구를 추적하면 발해를 찾을 수 있다. 우선 한서지리지 동군을 보자. 동군은 인구 약 166만명으로서 당시 (기원전후) 로서는 인구밀집지역이다. 현이 22개 있다. 현 이름이 매우 흥미를 끈다.
濮陽,畔觀,聊城,頓丘,發干,范,茬平,東武陽,博平,黎,清,東阿,離狐,臨邑,利苗,須昌,壽良,樂昌,陽平,白馬,南燕,廩丘。
반관畔觀 은 물가에서 지켜본다는 뜻이다. 발간發干 은 ‘발’이라는 나라의 ‘왕(칸)’을 연상하게 한다. 리黎 는 검은 색으로, 九黎 구리는 동이족을 지칭하며, ‘사기’에 나오는 글자이다. 리호 離狐 는 특이하게 여우 ‘호’ 글자가 들어가 있다. 지명에 동물이 들어가는 경우는 드물다. 南燕 은 남쪽의 연나라를 말한다. 기원전후에 남연이라, 참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조선을 침략하고 5제후를 세운 뒤에 약 200년이나 지나서 4군을 설치했다는 기록 조작을 떠올리게 한다.
3. 일단 발해를 추적하고 있음으로 돈구(현)을 알아보자.
1) 한서지리지 동군 편 ‘돈구’ 에 달린 원문이다.
頓丘,莽曰順丘。〔三〕 돈구를 왕망은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운 사람) 순구라고 불렀다.
2) 한서지리지 동군 편 ‘돈구’ 에 달린 주석이다.
〔三〕 師古曰:「以丘名縣也。丘一成為 頓丘,謂一(成)〔頓〕而成也。或曰,成,重也,一重之丘也。」
사고가 말하기를 [‘돈구’는 언덕 이름으로서 현 이름이 되었다. 언덕(구)는 한번에 만들어져 ’돈구‘ 이다. ’한번‘이고 이루어졌다. 혹은 말하기를 이룬다는 것은 중첩된다는 의미이니 1층으로 이루어진 언덕이다.]
이 설명으로만 보면 굉장히 특이한 언덕 구릉지대이다. 몇 ㎞ 에 걸친 굉장히 큰 하나의 암벽 언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4. ‘돈구’를 바이두 (차이나의 네이버)에서 찾아보자.
顿丘,一作敦丘,春秋时期卫国邑名,在今河南浚县西。 [1
돈구는 한번에 만들어진 돈구로서 춘추시기 (기원전 722~ 기원전 481) 위나라의 도시 이름이다. 지금 하남성 준현 서쪽이다.
史为乐主编.《中国历史地名大辞典》:中国社会科学出版社,2005年:第2110页
차이나 중국사회과학출판사 2005년 판 중국역사지명대사전 제 2110항에
[시경 위풍 맹에 보면 ”그대(子)를 전송하려 기하를 건너서 돈구에까지 이르렀다.] 는 구절이 있다.
https://baike.baidu.com/item/%E9%A1%BF%E4%B8%98/10359906?fr=aladdin
바이두 頓丘
5. 바이두에서 ‘준현’을 찾아보자.
준현은 하남성 학벽시에 속한다. 위하와 기하 (강물)가 남으로 흐른다. 안양, 복양, 신향, 학벽시 등 바퀴살 모양의 중심위치에 있다.
浚县,隶属 河南省鹤壁市,位 于河南省北部,卫河 蜿蜒纵贯全境,淇河 沿西部边界 南流,地处 安阳、濮阳、新乡、鹤壁等市 辐 (바퀴살 복)射带的 中心位置,
은나라때는 준현은 리黎 라고 불렸고 기내 (은나라 서울시내)에 있었다.
殷商时期,浚县地称 黎,为畿内地。
https://baike.baidu.com/item/%E6%B5%9A%E5%8E%BF/1022906?fr=aladdin 바이두 浚县
黎는 한서지리지 동군에 돈구현과 같이 있는 현 이름이다.
6. 한나라 때의 돈구(현), 지금의 학벽시 서쪽에 있는 ‘준현’은 바로 발해로 이어진다. 아득한 고대에는 바닷물이 준현까지 들어서 황하가 발해(황해)로 바로 들어갔을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한서지리지가 편찬되던 시절에는 준현에서 가까운 ‘호수이자 강’인 발해勃海로 황하黃河가 들어갔다. 河水 徙, 從*頓丘 東南 流入 勃海。발해라는 ‘호수이자 강’으로 들어간 황하는 다시 동쪽으로 흘러 지금의 황해로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 부록1 돈구, 준현 관련 바이두 캡쳐
勃,渤 구분없이 썼다.
돈구 동남쪽이 勃海 이니 돈구를 추적하면 된다.
顿丘,一作敦丘,春秋时期卫国邑名,在今河南浚县西 史为乐主编.《中国历史地名大辞典》:中国社会科学出版社,2005年:第2110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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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두 준현
浚县,隶属 河南省鹤壁市,位 于河南省北部,卫河 蜿蜒纵贯全境,淇河 沿西部边界 南流,地处 安阳、濮阳、新乡、鹤壁等市 辐 (바퀴살 복)射带的 中心位置,是中国国家历史文化名城、中国民间文化艺术之乡 [41] 。浚县地处太行山东麓,华北平原南部。早在6000多年前,先民已在这里繁衍生息。
殷商时期,浚县地称 黎,为畿内地。
* 黎 검을 려 (리) 九黎= 고구리? 검을 黑(흑) 검을 玄(현)
西汉高祖 (유방) 年间设 黎阳县,属冀州魏郡,这是 浚县设县之始,治所 在 大伾山东北。王莽时改名黎蒸,东汉 恢复 黎阳县名。
浚县,隶属河南省鹤壁市,位于河南省北部,卫河蜿蜒纵贯(원연총관- 구불구불바로펴고)全境,
淇河 沿西部边界 南流,地 处安阳、濮阳、新乡、鹤壁等市 辐射带的中心位置,是中国国家历史文化名城、中国民间文化艺术之乡 [41] 。
浚县地处太行山东麓,华北平原南部。中部地势略高,两侧较平缓;属暖温带半湿润型季风气候;有卫河、淇河、共产主义渠,是浚县重要地表水资源。浚县总面积954.981平方千米。 [29] 根据第七次人口普查数据,截至2020年11月1日零时,浚县常住人口624728人。 [27]
早在6000多年前,先民已在这里繁衍生息。殷商时期,浚县地称黎,为畿内地。西汉高祖年间设黎阳县,属冀州魏郡,这是浚县设县之始,治所在大伾山东北。王莽时改名黎蒸,东汉恢复黎阳县名
부록 2 원문만 공개하는 다빈치맵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2564&Lang=xxx&Page=6
42
東郡,戶四十萬一千二百九十七,口百六十五萬九千二十八。縣二十二:
濮陽,畔觀,聊城,頓丘,發干,范,茬平,東武陽,博平,黎,清,東阿,離狐,臨邑,利苗,須昌,壽良,樂昌,陽平,白馬,南燕,廩丘。 (다빈치)
부록3 원문과 주를 다 공개하는 国学导航 사이트
http://www.guoxue123.com/shibu/0101/01hsyz/006.htm
東郡,秦置。莽曰治亭。屬 兗州。
戶四十萬一千二百九十七,口百六十五萬九千二十八。縣二十二:
濮陽,衛成公 自楚丘 徙此。故帝丘,顓頊 虛。莽曰治亭。〔一〕
(畔)觀,莽曰觀治。〔二〕
聊城,
頓丘,莽曰順丘。〔三〕
發干,莽曰戢楯。
范,莽曰建睦。
茬平,莽曰功崇。〔四〕
東武陽,禹治漯水,東北 至 千乘 入海,過郡三,行千二十里。莽曰武昌。〔五〕
(千乘을 검색하면 치박시 고청현 황하 근처에 지명이 많이 나타남. 탑수는 현대의 소청하 일 가능성이 매우 높음. 현대 탑하시는 정주시 남쪽 200㎞에 있는 도시로 사하 가 흐르고 있음)
博平,莽曰加睦。
黎,莽曰黎治。〔六〕
清,莽曰清治。〔七〕
東阿,都尉治。〔八〕
離狐 (호),莽曰瑞狐。
臨邑,有((暂缺F5FA))〔泲〕廟。莽曰穀城亭。〔九〕
利苗,
須昌,故 須句國,大昊後,風姓。〔一0〕... 고구려의 구. 山東省東平縣、梁山縣
壽良,蚩尤祠在西北(涑)〔泲〕上。有朐城。〔一一〕
樂昌,
陽平,
白馬,
南燕,南燕國,姞姓,黃帝後。〔一二〕
廩丘。
〔一〕 應劭曰:「濮水 南入 鉅野。」 師古曰:「虛讀 曰 墟。」
〔二〕 應劭曰:「夏有觀扈(호),世祖 更名 衛國,以封周後。」師古曰:「觀音工喚反。」
〔三〕 師古曰:「以丘名縣也。丘一成為 頓丘,謂一(成)〔頓〕而成也。或曰,成,重也,一重之丘也。」
〔四〕 應劭曰:「在茬(치, 사)山之平地者也。」師古曰:「音仕疑反。」
〔五〕 應劭曰:「武水之陽也。」師古曰:「漯(루, 탑)音 它合 反。」
〔六〕 孟康曰:「詩 黎侯 國,今 黎陽 也。」臣瓚曰:「黎陽 在 魏郡,非 黎縣也。」 師古曰:「瓚說是。」
〔七〕 應劭曰:「章帝更名 樂平。」
〔八〕 應劭曰:「衛邑也。有西 故稱東。」
〔九〕 師古曰:「((暂缺F5FA))〔泲〕亦 濟水字也。其後並同。」
〔一0〕師古曰:「句音劬(구)。」
〔一一〕應劭曰:「世祖(父叔)〔叔父〕名良,故曰壽張。」
〔一二〕師古曰:「姞音其乙反。」
부록4 国学导航-漢書 漢書卷六 武帝紀第六
http://www.guoxue123.com/shibu/0101/01hsyz/006.htm
建元 三年 (BC138) 春,河水溢于平原,大飢,人相食。〔一〕
건원 3년(BC 138) 봄, 하수가 평원(平原)지방에 범람하니 큰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
〔一〕 師古曰:「河溢之處損害田畝,故大飢。」
(중략)
元光 元年〔一〕 冬十一月,初令郡國舉孝廉各一人。〔二〕
〔一〕 臣瓚曰:「以長星見,故為元光。」
(중략)
三年春,河水徙,從*頓丘東南流入勃海。〔一〕
원광 3년(BC 132) 봄, 하수의 물길이 옮겨져서, *돈구(頓丘)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渤海)로 들어갔다.
〔一〕 師古曰:「頓丘,丘名,因以為縣,本 衛地 也。地理志 屬 東郡,今則 在魏州界也。」 (부록 참조)
三年 원광 3년(BC 132) 夏五月,封高祖功臣五人後為列侯。
여름 5월, 고조의 공신 5명의 후손을 봉하여 열후로 삼았다.
河水決濮陽,氾郡十六。〔一〕發卒十萬救決河。起龍淵宮〔二〕。
하수의 물길이 터져 16개 군에 범람했다. 군졸 10만 명을 내어 터진 하수의 물길을 다스렸다. 용연궁(龍淵宮)을 세웠다.
〔一〕 師古曰:「濮陽,東郡之縣也。水所氾及,凡十六郡界也。氾音敷劍反。
사고가 말하기를 [복양은 동군의 현이다. 물이 범람하였고 모두 16개 군에 미쳤다. (후략) *決 제방이 터질 결.
한꺼번에 몰아서 보자.
三年春,河水徙,從頓丘東南流入勃海。〔一〕
〔一〕 師古曰:「頓丘,丘名,因以為縣,本衛地也。地理志屬東郡,今則在魏州界也。」
夏五月,封高祖功臣五人後為列侯。
河水決濮陽,氾郡十六。〔一〕發卒十萬救決河。起龍淵宮〔二〕。
〔一〕 師古曰:「濮陽,東郡之縣也。水所氾及,凡十六郡界也。氾音敷劍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