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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燕나라가 낙랑군이고, 낙랑군이 (고)조선이면, 연燕나라가 고조선이다!!!공손 탁(度도)는 부여의 부족장 雄 인가? 한漢나라 요동태수인가? (2)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40)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3.03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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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1) 에 대한 추적은 잠시 중단하자. 원래 이 글은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부여조에 나오는 공손 탁() 을 추적하는 것이다.

 

2) 삼국지 이외 다른 차이나 역사서에는 공손탁()이 생략되고 한나라의 요동태수로 나온다.

 

3) 먼저 한나라의 역사를 빠르게 보자. 왕망이 만든 신나라가 유방이 만든 한나라를 없애는데 그 때 유방이 만든 한나라는 문을 제대로 닫았다. 그리하여 이를 전한 혹은 서쪽에 있었다고 서한이라고 한다.

 

* 전한(前漢: 기원전 202~기원후 8)은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 대륙 쟁탈 뒤에 세운 왕조이다. 수도는 장안이었는데 그 위치가 후에 세워진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 서쪽에 있어서 서한(西漢)이라고도 불린다.(위키백과 전한)

 

4) 후한은 혼란스러울 뿐이다. 수도를 지금의 서안시에서 낙양시로 옮김으로써 상대적으로 서안시 일대의 역사는 부각되지 못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사실상 아무런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삼국지의 위, , 오 특히 위나라의 배경이 되기만 한 이름뿐인 왕조가 된 것이다. 굳이 비유하면 사무라이들이 서로 싸우는 일본의 천왕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주의할 점은 전한 시대와 후한 시대의 행정구역이 차이가 아주 많아, 시대 구분을 잘 해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코리아 역사에 중요한 지명인 상곡, 어양, 요동 현도, 낙랑군이 유주에 속했고 유주의 중심도시는 계에 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키백과 후한의 행정구역)

 

* 후한(後漢, 기원후 25~220)은 전한이 신나라의 왕망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한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 유수가 한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이다. 수도를 낙양에 두었는데 그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위키백과 후한)

 

2. 후한서와 삼국지에 나오는 공손역은 동일 인물인가?

1)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국편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1) 111년 부여왕이 낙랑을 공격했다.至安帝 永初五年, 夫餘王 始 將 步騎 七八千人 寇鈔 樂浪, 殺傷吏民, 後復歸附.

1-2) 120년 부여왕의 후임자 위구태尉仇台가 도장과 금채등을 받아갔고, 永寧元年, 乃 遣 嗣子 尉仇台 ()[] 闕貢獻, 天子 賜 尉仇台 印綬 金綵.

1-3) 167년 부여왕 부태夫台가 현도를 공격하여 현도태수 공손역이 이를 격파했다.

康元年, 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 玄菟太守公孫 擊破之, 斬首千餘級.

集解惠棟 曰, 東觀記 魏志 公孫度 傳, 皆作 .

사기집해에서는 공손역,2명은 동일인물이라고 했다.

 

2) 삼국지 권8 ‘2공손 도 4장전(二公孫 陶 四張傳)’ (2명의 공손씨와 도겸과 4 명의 장씨 전기)

時 玄菟太守 公孫琙子豹年十八歲早死

당시 현도태수 공손역(公孫)의 아들 공손표(公孫豹)는 열여덟 살로 요절했다.

 

3) 공손탁()204년에 죽었다.

후한서에 나오는 현도태수 공손역삼국지 권8 2공손에 나오는 공손역이 같은 인물인지 살펴보자. 일단 글자는 한자로 다르다.

후한서 공손역이 부여왕 부태를 격파한 167년에 25세였다고 가정하자. 142년 생이다. 20세에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들은 162년생이고, 18살에 죽었으니 180년에 죽었다. 공손탁()204년에 죽었음으로 42세에 죽은 것이 된다.

두 공손역이 동일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4) 이제 삼국지 부여조에서 부여왕에게 종녀를 시집보낸 공손탁()삼국지 권8 2공손에 나오는 공손탁()와 같은 인물인지 생각해 보자.

나중에 자세히 보겠지만, 공손탁의 손자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에 취임했다. 이라는 지역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3. 공손 () 과 공손 찬

1) 삼국지 권8 ‘2공손 도 4장전(二公孫 陶 四張傳)’ (2명의 공손씨와 도겸과 4 명의 장씨 전기)이 공손 ()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위키백과 공손도가 잘 정리하였다. 이를 좀 더 요약하여 제시한다.

 

189년에 공손()가 요동을 점거한 이래, 공손연에 이르기까지 3대를 지나, 50년 만에 멸망했다.

 

1-1) 공손탁()(公孫度, ? ~ 204) 유주 요동군 양평현(襄平縣) 사람이다.

아버지 공손연(公孫延), 현도태수 공손역의 아들 공손표(公孫豹)18살에 죽었다. 공손탁의 어릴 적 이름도 공손표였고 그 나이까지 같았다. 공손역이 공손탁을 친애하여 스승을 붙여 공부를 도와주고 장가도 보내주었다. 기주자사까지 되었다가 유언비어로 인해 면직당했다.

 

1-2) 189년 공손()는 요동태수가 되었다. 동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오환도 쳐서 그 위엄을 떨쳤다.

 

1-3) 삼국지 부여조에 나오는 대목이 있다. 時句麗鮮卑彊度以夫餘在二虜之間

부여가 구려·오환이라는 2 오랑캐사이에 있다는 표현을 감안하여, 190년 경 부여·요동·오환·구려의 위치를 보면, 부여는 요동의 남이든 북이든 둘 중에 하나에 위치해야 한다. 다른 기사에서 보면 부여는 후한과도 통교함으로 요동의 남쪽에부여가 있다고 해석함이 타당하다.

 

1-4) 삼국지 부여조는 고구려가 부여의 남쪽에 있었다고 했다. 이는 삼국지가 편찬되기 훨씬 이전인 주나라 시대, 춘추전국시대 위치라고 봄이 타당하다.

 

부여와 고구려가 모두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유목민족인데 (‘사기 주본기’ (기원전 1000년경) 려융은 고구려의 ), 부여·고구려의 위치는 시대에 따라, 역사를 기록한 관찰자에 따라, 남북 동서가 서로 바뀔 수 있다고 본다. 차이나 역사서술자들은 부여나 고구려나 같은 동이(코리아)로 보았을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부여(2)

 

 

 

 

 

 

 

 

 

 

 

오환

 

요동

 

구려

 

 

 

 

 

 

 

 

부여(1)

 

後漢(후한)

 

 

2) 공손탁()와 관련 없는 동시대 인물 공손찬

2-1) 삼국지 권8 ‘2공손 도 4장전(二公孫 陶 四張傳) (이하 삼국지 공손전이라 한다)는 공손찬과 공손() 2명의 공손 씨의 전기를 소개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하나 확인할 기록은 없었다.

 

2-2) 공손찬은 성이 인 태수의 사위가 되어 성장했는데, 어느 지역의 태수인지는 기록이 없다. 공손찬이 요서군 사람이라 하니 요서군 태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기원후 180년 경의 요서군은 요동, 낙랑, 현도군과 같이 유주에 속했다.

 

2-3) 191년 기주, 병주, 청주 모든 군현의 태수, 현령을 모두 자기 사람으로 임명하며 지금의 선서성 동부, 하북성, 산동성 일대의 실력자가 되어 후한 정부에 대립했다.

 

2-4) 195년 하간국 역현에서 저항하였으나 199년 원소 군에게 함락되어 자살했다.

 

4. 공손탁()와 공손찬를 단순히 비교해 보자. 같은 성씨 공손이다. 두 사람은 동 일인물인가?

 

1) 공손찬이 요서 지역이라는 직접적 표현은 없지만 기주, 병주, 청주 모든 군현의 태수, 현령을 모두 자기 사람으로 임명하며 지금의 선서성 동부, 하북성, 산동성 일대의 실력자가 된 것으로 보아, 공손탁()의 요동 지역과 대비된다.

 

2) 공손탁()는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이 소속된 유주가 주된 활동무대였다.

 

3) 공손찬이 자리잡은 하간국 역현은 지금도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공손탁()가 자리한 지역은 정확한 비정이 어렵다.

 

차이나는 공손탁()의 본거지 양평을 지금의 요양시에 비정하는데, 후한의 도읍지 낙양시와 서안시 (잠시 옮기기도 했다) 로부터 요양시까지는 1,450거리로 보병이 하루 30걸으면 낙양까지 빨라도 38일 걸리는 거리이다. 이는 무리이며 양평은 좀더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 한다.

 

4) 동시대를 산 공손찬과 공손탁() 가 서로 교류가 없었다는 것은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생기게 한다. 공손찬의 주무대가 현도, 요서 등이다. 공손탁의 주무대는 현도, 요서와 붙은 요동이다. 공손찬의 주무대는 하간국이다. 지금의 하간시 河间市이다. 당시 황하의 물줄기가 여러 갈래였는데 황하 물줄기 사이의 도시여서 하간국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5) 지금의 요양시가 양평이라고 하고, 양평이 요동의 핵심도시라고 하자. 요동은 맞지 않는 표현이다. ‘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후한의 도읍지 낙양을 기준으로 하면 요북이 맞다.

 

현대 차이나 북경에서는 요양시 일대를 동북 3(요양성, 흑룡강성, 길림성)이라 한다. 차이나는 전통적으로 황하 북쪽 지금의 안양시, 복양시, 유성시 일대를 중국이라 불렀다. 삼국지 권8에서 공손탁()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東伐 高句驪西擊 烏丸威行海外

공손탁()는 동쪽으로는 고구려(高句麗)를 치고, 서쪽으로는 오환을 공격하였으므로 그의 위세는 밖까지 이르렀다.

初平元年度 知中國擾攘語 所 親吏 柳毅陽儀 等曰

漢祚將絕當與諸卿 圖 王耳。」

초평 원년(190)에 공손탁()는 중국지역이 혼란스러운 것을 알고 자신과 친한 관원 유의(柳毅)와 양의(陽儀) 등에게 말했다.

한 왕조의 운명은 끝나려 하므로 나는 제군 등과 왕업을 취하기로 결정했소.”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60cc0001.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001pixel, 세로 887pixel

 

6) 공손찬 역시 요동 지방에 근무한 기록이 있다.

6-1) “공손찬은 효렴으로 추천되고 랑이 되었으며, 요동속국(遼東屬國;유주에 속하여 여섯 개의 성을 관할함)의 장사(長史;부장관)에 임명되었다.”

 

6-2) “ 會 董卓至洛陽遷 虞 大司馬瓚 奮武將軍薊侯

이때 마침, 동탁이 낙양으로 와서 유우를 대사마로 승진시키고, 공손찬을 분무장군으로 임명하고 계후(薊侯)로 봉했다.“

 

공손찬이 임명된 계()를 차이나에서는 지금의 북경시로 본다. 이 역시 잘 살펴보아야 한다.

 

6-3) 필자는 공손찬과 공손탁() 가 동일인물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한다. 비슷한 사례를 어디서 본 듯 하지 않은가?

 

사마천의 사기에 이름도 꼭 같은 韓信(한신) 2명 있으며 열전이 두 개다. 2명의 한신이나 2명의 공손 씨나.

 

차이나는 역사 왜곡을 하되 교묘하게 찾을 길을 숨겨놓은 듯이 보인다.

 

5. ()나라의 시작? ‘이라 일컬은 공손탁()의 손자 공손연!

 

공손탁()의 손자 공손연은 228년경 오나라 왕 손권으로부터 연왕의 칭호를 받는다. 그 무렵 오나라와 경쟁하던 위나라는 공손연을 낙랑공으로 봉한다.

 

明帝 於是 拜淵 大司馬樂浪 (삼국지 권8 공손탁())

 

나라 지역은 낙랑 지역이다. 237년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에 즉위한다! 공손연은 차이나 한나라 사람일까? 코리아 동이족일까? 공손연이 동이족이라면 그의 할아버지 공손탁() 역시 동이족이고, 공손탁()가 부여왕에게 종녀를 시집보냈다는 구절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기원후 200년대의 연나라가 낙랑이고 낙랑이 기원전 200년경의 ()조선 수도였다.” 고 차이나가 주장함으로,

 

나라는 ()조선지역과 상당부분 일치한다! 차이나는 조선과 연나라를 동이족으로 동일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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