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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 탁(度도)는 부여의 부족장 雄 인가? 한漢나라 요동태수인가? (1)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39)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3.01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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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1) 차이나의 정사라는 삼국지를 보자. 흔히 아는 소설 삼국지연의는 정사 삼국지에 허구의 세계를 넣은 것이다.

 

2)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 (이하 부여조라 한다)를 보자.

夫餘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玄菟에서 천 리 떨어져 있다. 남쪽은 高句 (우리가 아는 () 옆에 말 () 가 있다), 동쪽은 挹婁, 서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3)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 仇台更屬遼東. 時 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

夫餘는 본래 玄菟에 속하였다. 나라 말년에 公孫度 雄海東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外夷들을 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은 仇台를 시켜 다시 요동을 정복했다.

 

句麗鮮卑가 강성해졌을 때, [公孫]은 부여가 두 오랑캐(구려와 선비)의 틈에 끼여 있음으로 [부여와 同盟을 맺으려고] 宗女[부여 에게] 시집보내었다.

 

2. 윗 글 2), 3)을 추론해 보자.

 

1) 삼국지를 쓴 285년 경에는 부여는 어떤 이유에서건 현도에서 천 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285년 이전 어느 때에는 현도가 근거지였다.

 

그 때 현도라는 땅에 한나라의 현도군이 설치되었는지는 이 글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현도군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2) 한나라 말년은 西漢(서한)이 기원후 8년에 왕망에게 망하기 전인 기원전·후 연간이다. 기원전·후 연간에 부여의 공손탁() 부족장 이 위세를 해동海東(북남으로 흐르는 황하의 동쪽)으로 확장했다. 이 때 현도는 황하의 서쪽에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3) 북남으로 흐르는 황하의 동쪽 요동遼東을 부여왕이 구태를 시켜 다시 정복했다. 원래 요동遼東은 부여의 땅이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4) 부여가 다시 요동遼東을 지배하고 나서 세월이 흘러 어느 때 구려와 선비가 요동 遼東땅으로 세력을 확대해 왔다. 時 句麗·鮮卑彊 (When 句麗·鮮卑 expand territory)

이에 공손탁()는 종녀(맏딸)을 부여왕에게 시집 보내어 연대를 더욱 굳건하게 했다. 구려·선비는 부여 혹은 공손탁()와 경쟁관계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5) 위 추론을 통하여

 

부여조가 쓰여진 기원후AD 190년 경 은 황하의 동쪽, 태행산맥의 동쪽 지방인 지금의 한단시와 석가장시, 보정시 일대이고, 한단시와 석가장시, 보정시 서쪽 태행산맥 일대가 상곡上谷 이며, 상곡上谷에서 태행산맥을 서쪽으로 넘으면 요동遼東 이다. 지금의 기주시, 삭주시가 된다.

 

기원후 190년 경 요동遼東은 태행산맥과 여량산 사이의 지금의 임분시, 태원시, 기주시, 삭주시로 이어지는 분지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6) 기원전 (BCE Before common era) 100년경 편찬된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은 부여와 연 나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碣之閒 一都會也은 발해와 갈석 사이의 한 도시이다.

通 齊남으로는 제나라 조나라와 통하고

東北 邊 胡동북으로는 호와 붙어 있다.

上谷 至 遼東상곡에서 요동에 닿는다. 상곡이라는 지방에서 요동으로 넘어간다.

 

地踔遠人民希數被寇

大 與 趙

俗相類而 民雕捍少慮有 魚鹽棗栗之饒

 

鄰烏桓夫餘북으로는 오환, 부여와 붙어 있다

 

綰 穢貉朝鮮真番之利동으로는 예맥, 조선, 진번과 남북으로 줄을 이어 붙어 있다.

 

 

 

 

 

 

 

 

오환, 부여

烏桓夫餘

 

 

 

 

 

 

 

 

 

 

 

 

 

 

 

 

 

 

 

 

 

 

遼東 요동

 

上谷 상곡

 

 

예맥穢貉

조선朝鮮

진번真番

 

 

 

 

 

 

 

 

 

 

 

 

 

 

 

 

 

 

 

 

 

 

 

 

 

 

 

 

 

 

 

 

 

 

 

 

 

 

 

 

 

 

 

 

7) ‘사기가 쓰여진 기원전100년과 삼국지 부여조가 쓰여진 기원후 285년간은 약 400년의 시간 차이다. 400년 전의 기록이, 400년 전의 국경이, 전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전해졌을까?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고 각 지역의 지배자 왕조의 이익에 따라 기록은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차이나의 학계는 서동으로 흐르는 황하의 물줄기가 최대 9갈래에서 수차례 합쳐지고 없어진 결과를 발표했다. 발해만이 황하의 퇴적물이 쌓여 점점 육지가 많아지는 것을 발표했다. 천진의 () 은 나루터 진 자이다. 천진은 어느 시기에 바다 옆이었거나 황하 혹은 어느 강 옆의 큰 나루터였던 것이다.

 

지형이 변하는데 역사를 어떻게 안 고쳤을까? 내 왕조, 내 나라의 땅을 조금이라도 넓히고 유리하게 만들어야 되는데.

 

8) 차이나 역사책은 부여의 시작을 쓰지 않는다. 차이나 역사책은 조선의 시작을 쓰지 않는다. ‘사기 조선전은 뜬끔 없이 “ ‘조선왕 만자 고연인야朝鮮王 滿 者故燕人也조선왕 만滿 이라는 사람은 옛날 연나라 사람이다. ”로 시작한다.

 

옛날 연故燕나라는 기원전 100년경의 연나라보다 훨씬 더 옛날에 있던 연나라라는 표현이다. 기원전 100년에 쓴 사기 화식열전은 연나라는 발해와 갈석 사이에 있는 도시로서 한단의 북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 연나라는 사기 화식열전에 나오는 연나라와 같은 위치에 있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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