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夫餘 本 屬玄菟.(중략)夫餘王 尉 仇台 更屬 遼東. 부여의 본거지는 ‘현도’라는 땅, 부여왕은 구태를 시켜 ‘요동’이라는 땅을 복속시켰다.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38)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2.25 01:0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들어가는 말

모든 역사책들이 원래 편찬된 때 그대로 전해져 왔다는 보장은 절대없다.

 

아래는 부여 관련 차이나 역사책 요약표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하 삼국지라 한다)285년 경에 편찬되었으나 450년경 수정되었음으로 후한서 동이전 (이하 후한서라 한다)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지가 그래도 덜 수정되었을 것이라는 기대로 삼국지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세 역사서를 공통하는 것은 현도의 북쪽에 부여가 있고 부여의 북쪽에 약수 (弱水)가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은 매우 중요한 漢字(한자) /혹은 漢文(한문) 해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

진서 4이 열전 부여조

1

430년경 범엽 편찬

285년 경 편찬 (진수), 450년 경 증보(배송지)

648년 방현령 등 편찬

2

夫餘는 본래 玄菟에 속하였으나 獻帝 때에 그 나라의 遼東에 속하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즉 부여는 예전에 현도에 있었다가 요동인지 어디론가 옮겼다.

부여는 본래 현도지방에 있었다. 한나라 말기에 (부여의) 공손탁 부족장이 바다 (황하) 동쪽으로 확장하고 외부의 오랑캐 (外夷)를 복속시켰다.

 

(공손탁 보다 높은) 부여왕 구태가 다시 요동을 복속시켰을 때, (요동은) 구리와 선비의 강역이었다.

의 인장에는 穢王之印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나라 가운데에 옛 穢城이 있으니, 그것은 본래 穢貊의 성이다

3

夫餘國玄菟의 북쪽 千里 쯤에 있다.

夫餘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夫餘國玄菟의 북쪽 천여리에 있는데,

玄菟에서 천 리 떨어져 있다.

 

현도의 북쪽

장성의 북쪽 (장성이 현도의 북쪽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현도의 북쪽

4

남쪽은 高句驪,

남쪽은 高句驪,

남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5

동쪽은 挹婁,

동쪽은 挹婁,

동쪽 없음

6

서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서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서쪽 없음

7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

8

북으로 올라가면서 현도, 부여, 약수 순서

현도의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 수 없음

서쪽은 없으며 선비는 남쪽에 있음.

후한서 삼국지 진서 모두 부여 북쪽에 약수가 있다고 했다. 약수는 어디에 있는 강인가?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5), 이원환 씀 미디어피아 2022.11.21

 

2. 먼저 국사편찬위원회의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조 원문과 번역문을 보면서 제대로 번역해 보자.

 

1)“夫餘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方可二千里.戶八萬, (중략)

 

夫餘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玄菟에서 천 리 떨어져 있다. 남쪽은 高句驪, 동쪽은 挹婁, 서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2천 리가 되며,戶數8만이다.

 

夫餘在長城之北, 去 玄菟 千里, 현도로 가는데 천리이다-> 현도로부터 천리 떨어져 있다.

去 玄菟 千里 의 주어는 당연히 夫餘 이다.

 

2)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 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

夫餘는 본래 玄菟[]에 속하였다. 나라 말년에 公孫度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外夷들을 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尉仇台[소속을] 바꾸어 遼東郡에 복속하였다. 이 때에 []句麗鮮卑가 강성해지자, [公孫]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同盟을 맺으려고] 一族의 딸을 [에게] 시집보내었다.

 

3) 夫餘本屬玄菟. “夫餘는 본래 玄菟[]에 속하였다.” 라는 국편위의 번역은 잘못되었다.

앞 문장에서 부여에서 현도 가는데 천리라고 했음으로, 부여라는 나라 (부족)이 현도라는 땅에서 (현도이 아니다) (일단 북쪽이라고 하자) 천리를 이동했다는 표현이다. 정확히 번역하면 부여는 본래 현도가 근거지였다 가 된다.

 

4)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나라 말년에 公孫度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外夷들을 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라는 국편위의 번역은 잘못되었다.

 

公孫度에서 을 번역하지 않은 것이다. 자연스런 질문이 나온다. 공손탁(도 라고도 읽을 수 있는데 편의상 탁이라고 읽는다) 은 부여의 관리이냐? 아니면 () 나라의 관리이냐?

 

문맥상 공손탁은 부여의 관리임에 틀림 없다. 은 부여의 관리 계급 명칭이고 이는 환웅 등에서 유추하여 최소한 부여라는 연맹체의 한 부족장을 표현한 것이다.

 

번역하면 한나라 말년에 (부여의 장수 ) 공손탁 웅 이 해동으로 (부여의)세력을 확장하면서 (부여외의) ”족들을 굴복시켰다.” 가 된다.

 

5) 夫餘王 *尉 仇台更屬遼東. 時 句麗·鮮卑彊, “부여왕 尉仇台[소속을] 바꾸어 遼東[]에 복속하였다. 이 때에 []句麗鮮卑가 강성해지자,”라는 국편위의 번역은 잘못되었다.

 

5-1) 尉仇台 가 무슨 뜻인지 전혀 고민한 흔적이 없다. 차이나의 다른 역사서에는 부여왕은 尉仇台 가 아니라 仇台 이다. 만약 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면 위 문장은 부여왕은 구태를 시켜 요동을 다시 복속시켰다.” 로 해석할 수 있다.

 

네이버 한자 사전에서 의 뜻에는 시킨다거나 명령한다는 뉘앙스는 없다. 필자는 글자의 제대로 된 해석이나 나아가서 글자 그 자체의 변조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바이두 설명으로는 는 지방을 무력으로 평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고 하며 군사나 법률을 집행하는 관리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최소한 부여왕이자 군사관리인 구태가 요동을 다시 복속시켰다.” 로 번역하거나 나아가서 부여왕은 구태를 시켜 요동을 다시 복속시켰다.”가 되는 것이다.

 

사실 구태는 우태 등의 부여의 관직이름과 비슷하며, ‘하나 만으로 관직이름이 될 수도 있고 우태윗 태즉 높은 라는 관직이 될 여지도 있는 것이다.

 

5-2) 夫餘王 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의 번역을 이어서 할 것이냐, 끊어서 할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국편위는 끊어서 해석한다. “부여왕 尉仇台[소속을] 바꾸어 遼東[]에 복속하였다. 이 때에 []句麗鮮卑가 강성해지자,”

 

“ [公孫]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同盟을 맺으려고] 一族의 딸을 [에게] 시집보내었다. ”

 

다음 문장을 이어서 번역해 보자. 원문에는 당연히 쉼표나 마침표가 없다.

夫餘王 尉 仇台 更屬遼東 時 句麗·鮮卑 彊, 度 以 夫餘 在 二虜之間, 妻以宗女.

 

夫餘王 尉 仇台 更屬遼東 時 句麗·鮮卑 彊,를 이어서 번역하면 부여왕이 구태를 시켜 다시 요동을 복속시켰을 때 구려와 선비의 국경까지 복속시켰다.

 

공손탁은 부여가 이로 (구려·선비)사이에 있음으로 종녀 (종갓집 딸 혹은 공손탁의 딸)(부여왕)에게 시집보냈다.

 

5-3) 국편위의 번역은 공손탁이 마치 한나라의 관리이거나, 최소한 부여와 대립하기도 하고 협조도 하는 다소 독립적인 부족인 것처럼 번역했다.

 

필자의 번역은 글자를 번역함으로써 공손탁이 부여 연맹체의 한 부족장(군장)이라는 점을 밝힌 번역인 것이다.

 

부족장이 자기의 친딸이거나 부족의 맏딸을 연명체의 왕에게 시집보낸 것은 자랑거리이다. 위 문장으로 보면 공손탁은 부여 연맹체의 선봉에 서서 해동으로 진출했으며 그 공으로 부여왕의 장인이 된 것이다!

 

6)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에서 는 북남으로 흐르는 황하를 지칭하는 것이며 부여가 황하를 서동으로 건너 황하의 동쪽 지금의 산서성 여량산과 태행산맥 일대로 진출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미 산서성 일대까지 진출한 구려·선비와 국경을 접하게 된 것이다!

 

삼국지 첫머리에 부여는 남쪽으로 고구려와, 서쪽으로 선비와 접해 있다고 했다.夫餘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

 

공손탁이 동쪽으로 확장했음으로 요동은 공손탁의 진행방향인 동쪽에 있은 듯한 느낌이 든다.

 

요동을 복속시켰을 때 구려·선비와 접하게 되는데 위 글에서처럼 부여 서쪽에 선비가 있다는 기록과는 일치한다. 그러면 구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는 아닌 것이다. 위 글에서 부여는 남으로 고구려와 접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구려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성씨가 ()씨인 구려가 고구려라는 기록이 있다.

 

3. 필자의 이런 해석은 부여가 차이나 흑룡강성 하얼빈시 일대에 있었다고 배워온 많은 분들에게는 허황한 상상으로 들릴 수 있을 것이다.

 

부여의 일족이 차이나 동북 3성에 많이 거주했을 수도 있다.

 

부여는 과연 어디서 왔으며 누구인가?

 

필자는 부여 역시 유목민족이고 기원전 11세기에 주나라에 의해서 망한 것으로 기록된 은나라와 동일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은나라가 망하면서 은나라 마지막 왕의 이복 형 송미자는 은나라 제사를 모시면서 지금의 차이나 강소성 서주시에서 송나라를 이어갔다.

 

역시 은나라 왕족의 친족인 기자는 조선에 봉해졌으나 조선의 왕이 되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본다. 사마천 사기<<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으나 신하가 아니었다.(乃 封 箕子 於 朝鮮 而 不臣也)”고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100년에 쓰인 사마천 사기에 부여를 제대로 쓴 부분은 없다. 고작 지명 설명에서 간혹 나올 뿐이다. 이는 기원후 100년경에 쓰여진 漢書(한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원후 285년 경에 쓰여진 삼국지 부여조는 매우 길다. 처음으로 차이나 역사책에 나타난 것이다. 부여의 시작과 끝은 애매모호하게 쓰여져 있다.

 

다시 한번 기원후 430년 경 쓰여진 후한서 부여조의 기록을 다시 옮긴다.

 

其王 葬用玉匣, 漢朝常豫以玉匣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焉.

그 나라 (부여왕의) 장사에는 玉匣을 사용하므로, 나라 조정에서는 언제나 玉匣을 미리 玄菟郡에 갖다 두어, (부여)이 죽으면 그 玉匣을 취하여 장사지내게 하였다.

 

놀라지 마시라! 국편위의 번역 그대로이다.

 

 

부록 *

바이두의 설명

拼音wèiyùn是汉语一级通用规范汉字常用字[2] 此字始见于战国文字

本义指熨烫的初文다리미질이다.

 

熨烫可以使织物平展引申用于社会政治就有 凭借 武力或法律 使 地方安稳下来的意义옷감을 평평하게 다리는 것을 말하다가 사회정치에 인용되어 무력 혹은 법률로 지방을 평안하게 다스린 것에 비유한다.

 

所以 古代 掌管 军事或刑狱的官员 多 称为 尉自上对下使织物平展的本义引申用于人际关系就引申为通过安抚问候来安定人心的意义即慰问这一意义后作[3-4]

复姓尉迟的读作

https://baike.baidu.com/item/%E5%B0%89/34265?fr=aladdin

 

,울 벼슬 위/위로할 위, 다리미 울

(벼슬 위/위로할 위) 벼슬 벼슬의 이름 편안(便安)히 하다 위로하다(慰勞--)

(다리미 울) 다리미 성()의 하나 본성(本性) 다리다 다리미로 주름을 펴다

(네이버 한자사전)

 

** 고씨의 구려

 

통전(通典)

 

고구려는 후한에 조공하였는데 본래 부여에서 나왔으며 선조가 주몽이라고 한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로 부여왕의 처가 되었는데 햇빛이 비추어 잉태하고 아이를 낳았다. 성장하여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는데 속언에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나라 사람들이 죽이고자 하여 주몽(朱蒙)은 부여(扶餘)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달아나,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러 마침내 정착하여 살았다. 국호를 구려(句麗)라 하고, ()를 성씨로 삼았다.

한무제가 조선을 멸하여서 고구려가 현이 되어 현도군에 속했다 (조선이 고구려다. 고구려의 역사가 900년이다!!!)

高句麗

後漢朝貢, 云 本出 於夫餘 先祖 朱蒙. (중략) 名曰朱蒙, 俗言善射也. 國人欲殺之, 朱蒙 棄 夫餘, 東南 走渡 普述水, 紇升骨城, 遂居焉, 號曰 句麗, 以高爲氏.

 

及 漢武 滅 朝鮮, 以 高句麗 爲 縣, 屬 玄菟郡. (중략) 遂 名 此城 爲 幘溝漊. 溝漊 者, 句麗 名 城也. 王莽時, 發 句麗兵以 伐匈奴. 其人不欲行, 皆亡出塞爲寇盜. 莽 更名 高句麗 王 爲 下句麗 侯. 於是貊人寇邊愈甚. 光武建武八年(32), 遣使朝貢, 帝復其王號.

(通典 卷一百八十六 邊防 二 東夷 下 高句麗 )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