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모든 역사책들이 원래 편찬된 때 그대로 전해져 왔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北史(북사)’ 백제조는 “ 索離國 [‘치’나라]에서 남으로 엄수와 대수를 건너온 동명은 부여의 왕이 되었다. 동명의 후손 구태仇台가 대방고지帶方故地에 만든 나라가 백제” 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방고지, 대방 옛 땅이라는 표현은 ‘北史(북사)’가 편찬된 때 대방이라는 지명은 없어졌거나 있어도 크지 않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대방고지를 부여의 땅으로 추정하기에 충분하다. 부여의 땅 대방고지에서 백제가 만들어졌고, 백제의 시조 구태仇台 는 부여왕 동명의 후손이니 부여가 백제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7세기 차이나 대륙에서 ‘부여’라는 지명은 기원전후 1~2세기의 ‘대방’이라는 지명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배운 온조와 비류의 백제는 잠시 잊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12세기에 편찬된 책이다. ‘北史(북사)’ 는 7세기 (659년)에 편찬된 책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모든 역사책들이 원래 편찬된 때 그대로 전해져 왔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2. 구후九侯와 구목仇牧
1) 네이버 한자 사전을 찾아보니 “ 仇구 원수 구/잔질할 구. 원수, 적이라는 명사와 죽이다, 잔에 술을 따르다는 동사로 쓰인다. ”
2) 仇를 바이두에서 찾아보았다.
현대 차이나 발음은 쵸~우 다. 당나라때 발음은 ‘구’라고 소개하고 있다.
康熙字典
《唐韵》巨鸠切《集韵》《韵会》《正韵》渠尤切,音求。匹也。匡衡引《诗》:君子好仇。同逑。《尔雅·释诂》仇,合也。《注》谓对合也。
3) 성씨로 仇 구 가 있다. 바이두는 仇 성의 기원을
①九라는 姓氏에서 기원
②선비족에서 기원
③子라는 姓氏에서 기원
④侯姓에서 고쳤다는 설
⑤전구지국前仇池国에서 기원했다는 설
⑥남북조南北朝시대의 후구지국后仇池国에서 기원했다는 설
⑦달(체)알(간)이 족 达斡尔族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다고 소개한다.
그 중에서 ①九라는 姓氏에서 기원했다는 소개가 매우 흥미롭다.
4) 은殷나라 말기에 3공(은나라 신분으로 제일 높은 공公) 중에 九 혹은 九吾氏 가 있었다. 은나라 주왕이 九를 죽이자 족속들이 도망치면서 사람인 변을 추가하여 仇 씨가 되었다고 한다.
仇姓源出 殷末 三公之一的 九候(一说 为九吾氏)。夏代时,九吾氏为诸侯,商代为九侯国,取代夏时的部落。商朝末年,纣王杀九侯。其族人避居各地,以国名加“人”字偏旁为仇氏,世代相传至今。
은나라 마지막 왕 주(紂)왕은 서백창(西伯昌), 구후(九侯), 악후(鄂侯)를 삼공으로 삼았다. 주(紂)왕은 구후(九侯)의 아름다운 딸이 음탕함을 좋아하지 않아 그녀를 죽이고 구후도 죽였다. [ 사기 은본기, 스윙,
https://m.blog.naver.com/swings81/221787501486 ]
5) 서백창이 주나라의 시조이고 그의 아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紂왕을 죽이고 은나라를 멸한 사람이다. 은나라가 망하자 은나라 주紂왕의 이복 형 미자가 세운 나라가 송宋 이다. 바이두는 구후(九侯) 후손 仇 씨들이 차이나 대륙 전체로 도망쳤는데, 그 중 일부가 송宋나라에 가서 살았고 그 중의 부분시조 (중시조)가 송宋나라 대부를 지낸 구목仇牧 이다.
지난 글에서 소개했다. 송宋나라가 殷(은)나라의 제사를 이어받았고, 漢(한)나라 유방이 나고 자라서 기틀을 마련한 동네가 지금의 강소성 서주시 패현(송나라 때 풍현. 江苏省 徐州市 沛县. 徐州=彭城)이다.
6) ‘北史(북사)’ 백제 부분에서 기록한대로 백제를 세운 구태仇台의 조상 동명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와 부여왕이 되었다면, 동명의 성씨 역시 구태仇台 와 같아야 한다. 원수 구仇 라는 성은 매우 특이하다. 딸과 아버지를 죽여 젓갈을 담근 은나라 주왕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한 씨족이라면 원수 구仇 라는 성을 쓸 만하다.
3. 구태仇台 의 태台
1) 역사는 구후(九侯)를 죽인 은殷나라 주왕을 피해 달아난 일족이 성씨를 구九에서 구仇로 바꾸었다고 한다. 구태仇台에서 구仇가 성씨이고 태台는 이름이거나 관직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구태 (仇台)를 보면, 집필자 성주탁은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 부여 계통의 인명이나 관명에 많이 붙는 ‘태(台)’는 ‘치’·‘티’로 읽는 것이 옳다는 설도 있다.”
주서(周書)』 백제전(百濟傳)에 의하면 “구태(仇台)가 대방(帶方)지역에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백제사람들은 일년에 네 차례 구태묘(仇台廟)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은 『수서(隋書)』 동이전(東夷傳) 백제조와 『한원(翰苑)』에도 보인다.
구태는 ‘고이’라고도 발음하므로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이 바로 구태라는 설도 있다. 백제 시조 온조(溫祚)를 초기 부락시대의 시조라고 하면, 구태는 그후 건국시대의 태조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즉, 자음상(字音上)으로 ‘구(仇)’는 ‘ku’이고, ‘고(古)’는 ‘ko’·‘ku’이므로 동음이고, ‘태(台)’는 원음(原音)의 ‘以’, 즉 ‘i’로서 ‘이(爾)’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태(仇台)를 ‘구이’로 읽는 데 대하여 이설도 있어서, 부여 계통의 인명이나 관명에 많이 붙는 ‘태(台)’는 ‘치’·‘티’로 읽는 것이 옳다는 설도 있다. → 고이왕
3) 집필자 노중국(계명대학교, 한국사)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고이왕 (古爾王)에서
“ 먼저 『주서(周書)』 및 『수서(隋書)』의 백제전에 나오는 “백제시조구태(百濟始祖仇台)”의 ‘구태’를 ‘구이’로 읽고, 이것은 ‘고이’와 음운상 통한다고 보아 ‘구이=고이’로 해석해 고이왕을 백제 고대국가의 실제적 건국자로서의 시조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고이왕을 “초고왕모제(肖古王母弟)”라고 한 것을 ‘초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해석해, 고이왕은 온조왕계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우태(優台) · 비류계(沸流系)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밖에 『신찬성씨록』에는 고이가 ‘구이(久爾)’ 또는 ‘고모(古慕)’로 표기되어 있다.“ 고 기록하고 있다.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우태(優台) 항목은 (서술자 미상) 우태(于台) 도 소개하고 있다.
백제 시조 비류(沸流) 설화에서 비류와 온조(溫祚)의 아버지로 나오는 인물이다. 그런데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고구려조에 고구려의 관등에는 “상가(相加) · 대로(對盧) · 패자(沛者) · 고추가(古鄒加) · 주부(主簿) · 우태(優台) · 승(丞) · 사자(使者) · 조의(皁衣) · 선인(先人)이 있는데,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비류왕에 나오는 ‘우태(優台)’는 고구려 초기 지배층의 고위 관등 등 가운데 하나로 전하는 ‘우태(優台)’와 같은 글자이다. 『삼국지』의 기사를 중시하면, 원래 비류 등의 아버지가 지녔던 ‘벼슬’로서의 우태가 후대에 ‘인명(人名)’처럼 인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우태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太祖王) 16년에는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가 항복해 오자 우태(于台)로 삼다.”라는 기록과 같이 관직으로 표기되기도 하고, 직명(職名)과 별개의 작위(爵位)의 이름으로도 나오기도 한다. 태조왕 재위 말기에 수성(遂成, 차대왕)에게 왕위 찬탈을 건의한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전하는 비류나(沸流那) 조의(皁衣) 양신(陽神)이 차대왕(次大王) 즉위 후 중외대부(中畏大夫)에 임명되면서 우태(于台)로 ‘가작(加爵)’되었다. 이것은 작위로서의 우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5) 바이두 차이나 위키백과 부태 夫台. 부태가 구태라는 학설도 있다.
夫台,是 东汉后期的 夫餘国 国王。
汉顺帝永和元年(136年),夫余王至洛阳朝见汉顺帝,汉顺帝和夫余王一起观看了黄门鼓吹、角抵戏的表演。汉桓帝延熹四年(161年),夫余王遣使朝贺进贡。
永康元年(167年),王夫台率兵二万余人入侵玄菟郡,玄菟太守公孙域击败了他,斩首千余级。
汉灵帝熹平三年(174年),汉余和好,夫余又来朝贡。夫餘本属玄菟郡,汉献帝时,改属辽东郡。
夫台王 在位 在尉仇台作为太子之后,尉仇台 作为国王之前,名字 相近,而且 只有167年 一条记录,有 学者认为 夫台王 就是 尉仇台。
参考资料
《后汉书·东夷传》
5) 필자는 태台 한 글자 만을 관직이나 부족명칭 등으로 본다. 우태(于台) 나 우태(優台) 는 태台 중에서 높은 태台 즉 위(우, 上)의 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물론 구태에서 ‘ㄱ’ 이 탈락하여 우태가 되고 ‘우’를 차음하여 한자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부록1
부분 시조로 구목仇牧 이 있다. ‘구“ 성은 3천년전 송宋나라 대부 구목의 후예다.
部分始祖
仇牧。仇姓是3000年前 宋国大夫 仇牧的后裔。仇姓的始祖仇牧,是 宋国国君 宋哀公的裔孙,宋哀公 第九子 吾的长孙。
《左传》介绍说,仇牧是 春秋时期 宋泯公的大夫,后来 南宫万(后人讹传为宋万)要杀泯公,他急忙前往救主,可惜已迟,泯公已被南宫万杀了。在宫门正遇南宫万,创新手持长剑,口出叱声,扑杀那个弑君的国贼,可惜寡不敌众,终遭杀害。
仇牧被杀后,他的儿子 仇仲 逃到 宋国的 附庸国 萧国,当时的 萧国国君 大心留 他当 大夫,仇仲 婉言 推辞,过上 隐居的生活,其后 子子孙孙 都姓仇氏。所以 中国姓仇的人,起源 于河南,然后 才逐 渐繁衍到 全国各地。仇牧是中国忠义传统的 最佳 楷模。
有一种说法 仇牧 系出 九吾氏,夏诸侯 在商为九国,纣杀 九侯,其后为仇氏。
부록2 사기 화식열전 부여
夫 燕 亦 勃、碣之閒〔一〕 一都會也。南通 齊、趙,東北邊胡。上谷 至 遼東,地踔遠,〔二〕人民希,數被寇,大 與趙、代 俗相類,而民雕捍〔三〕少慮,有魚鹽棗栗之饒。北鄰 烏桓、〔四〕夫餘,東 綰 穢貉、〔五〕朝鮮、真番之利。〔六〕
주해는 〔一〕1)에서 〔六〕6)까지 달려있다. 주해를 보면 글자가 다른 경우가 많다. 인쇄술이 없을 때 필사했으니 요즘 말로 ‘오타’가 많을 수 밖에 없다.
〔一〕正義 勃海、碣石 在 西北。
〔二〕索隱 劉氏上音卓,一音 敕教反,亦 遠騰貌也。
〔三〕索隱 人雕悍。言 如雕性之捷捍也。
〔四〕索隱 鄰,一作『臨』。臨者,亦 卻背之義,他並類此也。
〔五〕索隱 東綰穢貊。案:綰者,綰 統其要 津;則上云「臨」者,謂卻背之。
〔六〕正義 番音潘。
[ 한단시邯鄲市가 ‘사기’의 한단邯鄲 이라면,
연燕은 한단시의 북쪽 지금의 석가장 시가 되고,
석가장시의 서북쪽이자 북경시 서남쪽인 보정시가 오환, 부여가 되며,
석가장시 동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지금의 산동성 일대가 예맥(穢貉), 조선(朝鮮), 진번(眞番)이 된다!
사마천 ‘사기’로 찾아본 부여.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