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모든 역사책들이 원래 편찬된 때 그대로 전해져 왔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北史(북사)’ 백제조는 索離國 [‘치’나라]에서 남으로 엄수와 대수를 건너 동명은 부여의 왕이 되었다. 동명의 후손 仇台가 대방고지帶方故地에 만든 나라가 백제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방고지는 부여의 땅으로 추정하기에 충분하다. 부여의 땅에서 백제가 만들어졌고, 백제의 시조 仇台 는 부여왕 동명의 후손이니 부여가 백제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索離國에서 남하한 동명을 부여 사람들이 “어서 옵쇼, 왕이 되어 주세요‘ 하여서 원래 있던 부여왕이 자리를 양보했을 가능성은 없다. 동명이 데리고 온 백가 (일백개의 부족)의 위력에 부여가 굴복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물론 동명과 원래 부여 왕족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2. 엄수淹水와 체수滯水
1) 동명은 엄수淹水와 체수滯水를 (합쳐서 엄체수淹滯水 로 번역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건넜다. 체수滯水에서 삼수변을 뺀 글자가 대방고지帶方의 [帶대] 이다. [帶대] 근처를 흐르는 강이 [滯水체수]이다. 滯 의 발음은 ‘체’ 하나이다. 帶 의 발음은 ‘대’ 하나로 네이버는 설명하고 있으나 ‘대’와 ‘체’ 두 가지 로 설명하는 글도 있다. (부록 참조) 차이나 발음은 지(즈) ㄹ 이다.
2) 엄수에 대한 바이두의 설명은 많다. 양자강 상류의 금사강이라고 한다.
3) 엄수와 체수를 구분하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그러나 엄수를 바이두가 비정하듯이 양자강 상류 지금의 곤명시 북쪽으로 비정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무리다. 체수는 어디인지 가름할 길이 없다. 도리어 대방군을 잘 찾으면 체수가 어디인지를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부록참조)
3. 仇台
1)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三國志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 원문과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이다.
1-1)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 張 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 仇台 更屬 遼東.
夫餘는 본래 玄菟[郡]에 속하였다. 漢나라 말년에 公孫度이 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外夷들을 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尉仇台는 [소속을] 바꾸어 遼東郡에 복속하였다.
1-2) 時 句麗·鮮卑 彊, 度 以夫餘 在二虜之間, 妻以宗女.
이 때에 [高]句麗와 鮮卑가 강성해지자, [公孫]度은 부여가 두 오랑캐(구려, 선비를 말함)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同盟을 맺으려고] 一族의 딸을 [그 王에게] 시집보내었다.
2) 북사 백제전을 다시 보자.
2-1) 東明之後 有 仇台, 篤於仁信, 始立國 于 ⑤帶方故地.
東明의 후손에 仇台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信義가 두터웠다. [그가] 처음으로 帶方에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2-2) ⑥漢 遼東太守 公孫度 以女妻之, 遂爲 東夷 强國. 初 以百家 濟, 因號 百濟.
漢의 遼東太守 公孫度는 딸을 [仇台에게]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東夷 중에서 强國이 되었다. 당초에 百家가 건너 왔다(濟)고 해서 [나라 이름을] 百濟라고 불렀다.
3) 부여왕은 尉仇台 인가? 仇台 인가?
삼국지가 쓰여진 기원후 285년경에는 차이나는 오호십육국 시대로 역사 기록자들이 위나라 등 차이나 계열이 동이족 코리아 계열을 계속 축소왜곡시키는 과정에 있었다고 본다. 尉仇台 의 尉는 동부도위 북부도위 등에 쓰이는 관직 이름으로 본다. 즉 仇台 가 늘상 부르는 이름 ( 이름+동이족의 직위 일 수 있다)이고 그 앞에 위나라의 신하라는 의미로 尉를 앞머리에 붙인 것으로 본다.
4) 국사편찬위원회의 틀린 번역
遼東太守 公孫度 이(가) 자기 (부족)의 맏딸 (宗女)를 仇台 에게 시집보낸 것이다. 이는 漢(한) 고조 유방이 공주를 흉노에게 시집보낸 것과 마찬가지이다. 부여가 얼마나 강대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宗女 가 公孫度의 친 딸이거나 최소한 양녀인지, 아니면 公孫度 친척의 딸을 의미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최소한 코리아에서는 宗女 라 하면 그 가문(집안)의 맏딸을 의미한다. 국편위의 삼국지 위서 번역은 그런 점에서 의도적으로 코리아를 낮추는 번역임으로 시급히 정정해야 한다! 북사 백제조 번역자는 정확히 [公孫度는 딸을 [仇台에게] 시집보냈는데]라고 번역했다!
5) 仇台... 이제 겨우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누구인가? (계속)
[부록]
淹水 东汉时期河流
https://baike.baidu.com/item/%E6%B7%B9%E6%B0%B4/16033024?fr=aladdin
金沙江 是 我国 第一大河 长江的上游,东汉 许慎的《说文解字》 及 《汉书·地理志》 中 将 今 雅砻江 以上 部分 称为 淹水,而 以若水(雅砻江)为干流。
砻 갈 롱(농) (lóng)
中文名 淹水 来源出处《说文解字》级《汉书·地理志》类型 东汉时期 河流
金沙江 是 我国第一大河长江的上游,早在2000多年前的战国时期 成书的 禹贡》中 将其称为黑水,随后的 《山海经》中 称之为绳水。!索胡绳 (굴원의 시)
东汉许慎的《说文解字》 及 《汉书·地理志》中 将今 雅砻江以上部分称为淹水,而以若水(雅砻江)为干流。
三国时期,称为泸水,诸葛武侯“五月渡泸,深入不毛”。北魏 郦道元 在 《水经注》中首次 对金沙江 水系 做了详细 描述,但未 能言明 金沙江 与 长江干流的关系。除此以外,金沙江 还有 丽水、马湖江、神川等名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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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롱강은 황하 비슷하게 북남으로 흐르다가 금사강과 곤명 북에서 만나고 ‘L’자로 꺽여 서쪽으로 흘러 중경, 무한을 통과한다. 상류는 황하와 가깝다. 아래쪽에는 하내 라는 지명도 있다.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
아롱강雅砻江
https://baike.baidu.com/item/%E9%9B%85%E7%A0%BB%E6%B1%9F/1209212?fr=aladdin
바이두 滞水로 검색하여서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滞水 [zhì shuǐ] 滞水是 指 土层中暂时 性饱和的 土壤水,常 分布于 黏土层 上方 或 其他半透水 和 不透水土层 上方
滯 체 체(滯)하다.체증(滯症).막힐 체. 물이 흩어지는 모양
滯(막힐 체)는 ❶형성문자로 滞(체)는 통자(通字), 滞(체)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帶(대, 체)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滯자는 ‘막히다’, ‘쌓이다’, ‘정체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滯자는 水(물 수)와 帶(띠 대)자의 결합한 모습이다. 帶자는 고대에 사용하던 허리띠를 그린 것으로 ‘띠’나 ‘띠를 두르다’라는 뜻이 있다. 滯자는 이렇게 묶어두는 역할을 했던 帶자를 응용해 “물(水)을 묶어두다(帶)”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즉 허리띠로 조르듯이 물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다는 뜻이다. [체수유병(滯穗遺秉) 장경식, https://m.cafe.daum.net/jang1338/eRJ0/1678 ]
국편위 한서지리지 낙랑군 [ ] 안은 주석이다.
25개 현이 속해 있다.
조선현(朝鮮), [응소는,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라고 하였다.]
남감현(䛁邯縣), [맹강은, “남(䛁)은 음이 남(男)이다.”라고 하였다. 안사고는, “남(䛁)은 음이 내(乃)와 감(甘)의 반절이다. 감(邯)은 음이 감(酣)이다.”라고 하였다.] 패수현(浿水縣),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增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왕망은 낙선정(樂鮮亭)이라 하였다. [안사고는, “패(浿)는 음이 보(普)와 대(大)의 반절이다.”라고 하였다. ]
함자현(含資縣), 대수(帶水)는 서쪽으로 흘러 대방(帶方)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점제현(黏蟬縣), [복건은, “선(蟬)은 음이 제(提)다.”라고 하였다.]
수성현(遂成縣),
증지현(增地縣), [왕망은 증토(增土)라 하였다.]
대방현(帶方縣),
사망현(駟望縣), 해명현(海冥縣), 왕망은 해환(海桓)이라 하였다.
국편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유사 권제1 주 259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조선열전과 ≪한서≫ 무제기(武帝記)에서는 모두 원봉 3년 즉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이 붕괴되고 한사군이 설정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한서≫ 오행지(五行志)와 지리지(地理志) 낙랑군·현토군 관련 내용을 보면, 한군현은 동시에 개설된 것이 아니라 원봉 3년에 낙랑·임둔·진번의 3개 군이 먼저 설치되고, 원봉 4년(기원전 107)에 현토군이 추가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기≫와 ≪한서≫에 수록된 항한제후표(降漢諸侯表)의 내용 비교를 통해, 왕험성(王險城)의 붕괴 시점이 원봉 4년(기원전 107)이며, 그 직후에 현토군이 개설되었으므로 왕험성은 낙랑군이 아닌 현토군에 속했을 가능성도 있다(조법종, 「위만조선과 한의 전쟁」, ≪고조선 고구려사 연구≫, 신서원, 2006, 246~2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