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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고구려)의 ‘동쪽’에 신라가 있고 其國, 東至新羅, 고리와 신라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與 新羅 每相侵奪, 戰爭不息. 고리(고구려)의 ‘남쪽’이 아니고 ‘동쪽’에 신라가 있다고? 그거 환(한)단고기 아냐? 응. 아니야. 차이나 정규 역사책 ‘北史(북사)’ 고리(고구려) 조에 나오는 거야.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33)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2.02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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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1) 원래 편찬된 때 그대로 전해 왔다는 보장은 절대없다. ‘北史(북사)’는 코리안이 배우기를 고구려와 백제가 망하기 전인 659년 이전에 편찬되었다. ‘北史(북사)’386년부터 618년 사이의 차이나 양자강 이북 지역의 역사이다.

 

北史 : 唐 太宗 貞觀 元年~高宗 顯慶 4(627~659) 사이에 李延壽私撰北朝(北魏···) 233年間(386~618)通史. 本紀 12·列傳 88, 100.

北史南史와 마찬가지로 李延壽夫 李大師의 뜻에 따라 완성하였다. 특히 李延壽家系가 대대로 華北에서 살았던 관계로北史南史보다 먼저 편찬하였는데, 編集에 정진한 까닭으로 記事詳密하여 古來로부터 佳史을 받고 있다. (한국사데이터 베이스 北史(북사)’ 0 01)

 

2) 차이나 웹사이트 国学导航北史 의 고리 (고구려) 문단 원문

北史 卷九十四  列傳 第八十二

高麗 百濟 新羅 勿吉  契丹 室韋 豆莫婁 地豆干 烏洛侯 流求 

 

高句麗其先出夫餘王嘗得河伯女(중략 분량 매우 많음) 改封 高麗王自是歲遣使 朝貢 不絕

 

  其國東至新羅西度遼二千里南接百濟北鄰靺鞨一千餘里人皆土著隨山谷而居衣布帛及皮土田薄瘠蠶農不足以自供故其人節飲食其王好修宮室都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一四隨山屈曲南臨浿水城內唯積倉儲器備寇賊至日方入固守王別為宅於其側不常居之其外復有國內城及漢城亦別都也其國中呼為三京復有遼東玄菟等數十城皆置官司以統攝與新羅每相侵奪戰爭不息(후략)

http://www.guoxue123.com/shibu/0101/00bsf/093.htm

 

3) 코리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북사 고구려 전 원문과 번역

 

其國, 東至新羅, 西度遼, 二千里, 南接百濟, 北鄰靺鞨, 一千餘里.

그 나라는 동쪽으로는 新羅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에 닿으니 [東西] 2천리이며, 남쪽으로는 百濟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靺鞨과 인접하니 [南北] 1천여리이다.

 

人皆土著 隨山谷而居, 衣布帛及皮. 사람들은 모두 토착민으로 산골짜기를 따라 거주하고, 의복은 베옷·비단옷 및 가죽옷을 입는다.

 

土田薄瘠, 蠶農不足以自供, 故其人節飮食. 토지가 척박하여 養蠶과 농사로써 충분히 자급하지 못하므로 음식을 절약하여 먹는다.

 

其王好修宮室, 都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 隨山屈曲, 南臨浿水.

高句麗]宮室을 잘 지어 치장한다. 도읍은 平壤城으로 長安城이라고도 하는데, 동서의 거리가 6리로 을 따라 屈曲을 이루며, 남쪽으로는 浿水에 닿아 있다.

 

城內唯積倉儲器, 備寇賊至日, 方入固守. 성 안에는 군량과 무기만을 저장하여 寇賊이 쳐들어 오는 날에 대비하였다가, [적이 쳐들어 오면] 곧 성 안으로 들어가서 굳게 지킨다.

 

王別爲宅於其側, 不常居之. 은 그 곁에 宮室을 별도로 지어놓지만 평상시에는 거처하지 않았다.

 

其外 復有 國內城 及 漢城, 亦別都也. 其國 中 呼 爲三京. 그 외에 또 國內城 漢城이 있는데, 역시 別都이다. 그 나라에서는 三京이라 부른다.

 

復 有 遼東· 玄菟 等 數十城, 皆置官司 以 統攝.

與 新羅 每相侵奪, 戰爭不息.

遼東[玄菟[] 등 수십이 있는데, 모두 官司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新羅와는 늘 서로 침탈하여 전쟁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2. 해석과 추정

1) 고리(고구려)는 토지가 척박한 산골짜기에 주로 살았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평소에는 주거하지 않는 성 안에 군량과 무기를 저장했다. 이것만 보면 어느 지역일까? 한반도와 만주의 산골일까? 차이나 대륙 지금의 북경 북쪽 산골일까? 차이나 산서성 태행산맥 서쪽 여량산 지역일까?

 

2) 고리(고구려)가 신라와 접하고 늘상 싸우는데 신라가 남쪽에 있지 않고 동쪽에 있다. 차이나 대륙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고리(고구려)와 황하를 사이에 두었던 그렇지 않던 고리(고구려)가 지금의 산서성 산악지역에 있었고, 신라는 태행산맥 서쪽과 남쪽 평야지대에 있어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는 명확한 기록이다!!!

 

3) 고리(고구려)의 남쪽에 백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코리안들이 배워서 기억한 상식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4) 문제는 漢城 이다. 북사는 고리(고구려)3(서울)이 평양, 국내성, 한성이라는데 한성의 한자 漢城을 보면 도저히 한반도에 있을 것 같지 않다. 때문이다.

 

그런데... 차이나는 지금 코리아 서울을 2005'首爾(서우얼)' 로 표기하기 전까지는 漢城 이라 불렀다.

 

한반도 전체가 일찍부터 고리(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고 고리(고구려) 3경중 하나가 한반도 한가운데인 지금의 서울에 있었고 이름이 漢城 이라면 뭐 틀릴 것 있을까?

 

5) 요동 과 현도는 고리(고려)의 영토였다.

復 有 遼東· 玄菟 等 數十城, 皆置官司 以 統攝.

遼東[玄菟[] 등 수십이 있는데, 모두 官司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5)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도 불렀다. 산성이며 (隨山屈曲) 평양성의 남쪽에 패수浿水가 있다. 평양의 지명도 도처에 많이 있지만 패수浿水라는 이름의 강도 아주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이족 혹은 코리안 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패수浿水의 패浿 (공부하고 있지만 발음은 일 가능성이 더 높다)를 아주 좋아한 듯 하다.

 

필자는 평양성의 중요한 후보지로 차이나 산서성 여량시를 꼽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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