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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新唐書 고려 高麗(고려)(리) 열전, “고(구)려(리)는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新羅에 이르고, 남으로는 역시 바다를 건너 百濟에 이른다.” 차라리 차이나의 신당서를 가짜 책이라고 해라! 그럼 고(구)려(리)는 어디인가? 차이나 대륙 황하유역인가? 북만주 일대인가?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30)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1.2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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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지난 글의 연속이다. 신당서 동이열전 고()리 조는 평양성과 마읍산이 붙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마읍()을 추적하던 중 마읍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산서성 삭주시와 진성시 심수현이 평양인지를 검토하고 있다.

 

2. 신당서는 친절하게 고()리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기술해 놓고 있다. 이제 신당서 고()리조 앞부분을 보자.

 

新唐書卷二百二十 列傳 第一百四十五 東夷 高麗

(東夷 高麗) 高麗, 本扶餘別種也.

高麗는 본래 扶餘別種이다.

 

地東 跨 海 距新羅, 南 亦跨海 距百濟, 西北度遼水 與營州接, 北 靺鞨.

국토는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新羅에 이르고, 남으로는 역시 바다를 건너 百濟에 이른다. 서북으로는 遼水를 건너 營州와 접하고, 북은 靺鞨과 접한다.

* 넘을 과, 걸터앉을 고

* 상거하다(相距--: 서로 떨어져 있다), 떨어지다 떨어져 있다

 

其君居平壤城, 亦謂長安城, 漢 樂浪郡也, 去京師五千里而贏,

그 나라의 임금이 살고 있는 곳은 平壤城으로 長安城이라고도 부르는데, 漢代樂浪郡으로 長安에서 5천리 밖에 있다.

 

隨山屈繚爲郛, 南涯浿水, 王築宮其左.

의 굴곡을 따라 外城을 쌓았으며, 남쪽은 浿水와 연해 있다. 은 그 좌측에 宮闕을 지어 놓았다.

* 물가(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 , 한계(限界) 근처(近處)

 

又 有國內城·漢城, 號別都.

國內城漢城이 있는데 別都라 부른다.

 

水有大遼·少遼: 물은 大遼少遼가 있다.

 

大遼出靺鞨西南山, 南歷安市城,

大遼靺鞨의 서남쪽 산에서 흘러나와 남으로 安市城을 거쳐 흐른다.

 

少遼出遼山西, 亦南流, 有梁水出塞外, 西行與之合.

少遼遼山의 서쪽에서 흘러나와 역시 남으로 흐르는데, 梁水塞外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이와 합류한다.

 

有馬訾水 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淥水,

馬訾水가 있어 靺鞨白山에서 흘러 나오는데, 물빛이 鴨頭와 같아서 鴨淥水로 불리운다.

 

歷國內城西, 與 鹽難水 合, 又 西南至 安市 , 入于海.

國內城의 서쪽을 거쳐 鹽難水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남으로 [흘러] 安市[]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 간다.

 

而 平壤 在鴨淥 東南, 以巨艫 濟人, 因 恃以爲塹.

平壤鴨淥江의 동남쪽에 있는데, 큰 배로 사람이 건너 다니므로, 이를 해자(天塹)로 여긴다.

 

3. 몇 가지 생각해 볼 부분이 있다.

1) 차이나의 지명은 대부분 한 글자이다. 동이족 지명으로 추정되는 경우는 두 글자가 대부분이다.

2) 지명을 근거로 ()을 부여한 바가 많았다.

3) 지명에 삼() 변이 붙으면 지명 근처의 ()을 말한다.

4) 지명에 언덕 () 변이 붙는 경우 대부분 사는 마을이 된다.

5) ()대까지 () 은 지금 생각하는 나라가 아닌 마을 정도를 말한다.

6) 한수 한/한나라 한, 신년 탄 두 세 개의 의미로 달리 쓰인다. 은하수를 말하기도 한다. 왜 고리의 서울로 평양 말고 국내성과 한성漢城이 있을까? 한성漢城 은 한수漢水옆의 ()일텐데, 그럼 한수漢水는 어디이며, 고리의 서울 한성漢城은 어디일까?

 

4. “(東夷 高麗) 高麗, 本扶餘別種也. 高麗는 본래 扶餘別種이다.”에서 別種은 고리는 부여와 같은 부족이나 어떤 이유로 떨어져 다른 사회체제를 가지고 있는 부족이라는 설명이다. 원래는 같은 부족이라는 뜻이다.

 

1) 사마천 사기 화식열전에 부여가 나온다.

北鄰 烏桓 夫餘, 東 綰 穢貉 朝鮮 真番之利 ()북쪽으로는 오환(烏桓)과 부여(夫餘)와 이웃해 있고, 동쪽으로는 남북으로 길쭉하게(꿰다, 상투) 예맥(穢貉), 조선(朝鮮), 진번(眞番)과 접하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 글에서 연이 어디에 있든 부여와 조선, 진번은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00년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진실과 관계 없이 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침공하기 전이다.

 

2) 신당서 동이열전 고리 조 [乾封] 三年(668) 二月 문단을 보자.

且高麗祕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滅之.

그리고 []秘記‘9백년이 못되어 80대장에게 멸망한다고 하였는데,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高氏나라때부터 나라가 있은지 지금 9백년이 되고, []의 나이가 또 80입니다. (중략)

 

男建 以兵五萬 襲 扶餘, 勣 破 之 薩賀水上, 斬首五千級, 俘口三萬, 器械牛馬 稱之.

男建이 군사 5만으로 扶餘[]을 습격하자, []薩賀水 위에서 그를 쳐부수어 5千級의 머리를 베고, 3만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器械牛馬도 이에 맞먹었다.

 

 

進拔 大行城. 진격하여 大行城을 탈취하였다.

 

劉仁願與勣會, 後期, 召還當誅, 赦流姚州.

劉仁願[]과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뒤늦게 도착하였다. 召還하여 마땅히 목을 벨 것이나, 용서하여 姚州로 귀양보냈다.

 

契苾何力 會 勣軍 于 鴨淥, 拔 辱夷城, 悉師圍 平壤.

契苾何力[]의 군대와 鴨淥에서 합류하여 辱夷城을 탈취한 다음, 모든 군사를 이끌고 平壤[]을 포위하였다.

 

3) 2)에서 고리의 역사가 9백년이라고 하는 바 당시가 668년 임으로 기원전 230년 경에 고리가 건국되었다는 말이다. 4. 1)에서 사기 화식열전에 부여가 나오는 때는 대략 기원전 200~230년 경이다. 두 문장을 합쳐서 추론하면 기원전 200년 경 고리 (고구려)가 부여의 일족으로서 하나의 나라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부여가 평양 가까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리(고구려)역시 부여와 가까웠다고 하겠다.

 

4) 후한서 등에서 나오는 대로 부여 왕의 죽음에 대비하여 () 나라가 옥갑을 준비하여 현도군에 두었다고 하니 현도군과 부여, 현도군과 고리(고구려)는 매우 가까웠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필자는 현도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쪽에 가깝지만 굳이 현도 라는 지명만 놓고 보면, 옥갑을 준비해 두던 현도 는 산서성 진성시에서 가깝다고 본다. 실제 그 지역에 玄菟(현도) 혹은 () 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미 말했듯이 () () 씨들의 집성촌 가까이 흐르던 강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泫水 로 바이두에서 검색하면 丹河 의 옛이름이라 하고 발원지는 산서성 진성시 고평시이며 진성시와 초작시를 통과한다.

 

丹河黄河北岸支流沁河的支流古称源泽水泫水丹水等主要发源于山西省晋城高平市赵庄丹朱岭流经晋城市城区郊区泽州县和河南省焦作市沁阳市

 

丹河是晋城境内的第二大河被誉为晋城和焦作人民的母亲河

 

丹河主要支流 有 巴公河塔水河白水河石盆河等

https://baike.baidu.com/item/%E4%B8%B9%E6%B2%B3/4808182?fromtitle=%E6%B3%AB%E6%B0%B4&fromid=24072025&fr=aladdin

 

5) 2)문장을 보자. 부여扶餘와 살하수薩賀水 가 매우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하수薩賀水 는 살수薩水 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로 발음이 되어서 을 같이 표현한 음가가 살하수薩賀水 일 것이다.

살하수薩賀水를 기준으로 부여는 평양으로 진격하는 사이에 있다. 이는 그 아래 문장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契苾何力[]의 군대와 鴨淥에서 합류하여 辱夷城을 탈취한 다음, 모든 군사를 이끌고 平壤[]을 포위하였다.”

 

6) 2)문장은 鴨淥을 강 이름이 아니라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평양으로 가는 길에 욕이성 (() 임을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이 있고, 그 전에 鴨淥 이라는 지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차이나는 욕이성을 현재 한반도 평양 인근으로 비정하고 있다.

 

* (새길 록())의 한자 유래 : ()의 약자(略字). 두레박 우물의 도르레 근처(近處)에 물이 넘치는 모양.

** 은 물 중에서도 맑은 물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鸭渌府名渤海国置并建号西京治所在神州故址一说即今吉林浑江市西南鸭绿江南岸长城里

https://baike.baidu.com/item/%E9%B8%AD%E6%B8%8C/7892029?fr=aladdin

 

5. 이 글 2.문장이다.

地東 跨 海 距新羅, 南 亦跨海 距百濟, 西北度遼水 與營州接, 北 靺鞨.

국토는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新羅에 이르고, 남으로는 역시 바다를 건너 百濟에 이른다. 서북으로는 遼水를 건너 營州와 접하고, 북은 靺鞨과 접한다.

1) 地東 跨 海 距新羅에서 를 어디로 볼 것인가? 차이나 역사서에서 는 반드시 바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강을 가리키기도 하고 벌판을 가리키기도 한다. 바다와 강을 동시에 표현할 경우는 확실히 구분하여 사용함을 알 수 있다. 본 문장에서는 가 강인지 바다인지 헷갈릴 수 밖에 없다.

1-1) 를 지금의 발해로 보고 고리(고구려)가 산동반도 북쪽 어디에서 요동반도 대련 쪽으로 건너가면 新羅 에 이른다고 보는 추론이 가능하다.

1-2) 를 황하로 보고 당시 황하가 서남에서 동북으로 흐름으로 동쪽으로 황하를 건너면 지금의 제남시 등이 신라의 영토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1-3) 를 황하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이 다음 문장에서 남으로 또 를 건너면 ( 로 떨어져서) 백제가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고리(고구려)가 지금의 복건성에 있어 남으로 바다를 건널 수는 없다.

 

굳이 차이나의 동해 연안을 따라 남쪽 바다로 떨어져 있다는 표현을 한다면, 고리(고구려)는 지금의 천진, 산동반도 연안을 지배하고 있어서 남으로 해안을 따라 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라는 단어는 떨어져 있다는 표현이고 연안을 따라 떨어져 있다는 표현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억지스럽다.

 

1-4) 황하가 거의 정동으로 흐르고 동북으로 틀어서 흐르는 동안 남쪽으로 백제가 떨어져 있다는 표현은 그다지 무리가 아니다.

 

백제는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 우주시 인근에 있어 남쪽으로 떨어져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이 지역은 지난 글에서 코리아()나라가 있다가 한 고조의 명령으로 태원 위 마읍까지 올라간 곳이다. 이 지역이 馬韓(마한) 지역이었다고 하면 앞 뒤가 잘 들어 맞게 된다. 백제 시조 온조의 첫 도읍지는 河南(하남) 위례성 아닌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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