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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 쓰는 감정]우울감과 샤워

이진성
  • 입력 2023.01.17 02:38
  • 수정 2023.01.17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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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7.01:39

우울감, 우울감이 느껴지는 날이 있다.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우울감. 오늘이 그런 날은 아니다. 그런 날은 몸이 축축하게 늘어져서 100g 정도 되는 펜이 마치 10 kg처럼 느껴지고 글을 적겠다는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대략 한 달 정도 우울감이 왔다 갔다 하는 과정을 겪었다.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것도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겠거니 하고 넘겨짚는다. 그렇게 좋아하는 촬영장에 갔다가 와서도 그렇게 기쁘지가 않은 것이다.

 

더운물로 몸을 덥힌다. 많이 추운 촬영이었었다. 처음엔 거울이 뿌옇게 습기로 흐려진다. 멍청한 표정의 내가 보이지 않는다. 계속 뜨거운 물을 틀어둔다. 이제는 거울과 나 사이에 습기가 가득해서 아까의 거울도 보이지 않는다. 물값이 많이 나오겠구나 생각한다. 가스비도 많이 나오겠구나 생각한다. 그래도 물을 잠그지 않는다. <우리들의 블루스>에 나오는 신민아 배우가 연기한, 비 오지 않는데 몸이 축 늘어지듯 젖는 장면이 이해가 된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몸을 물에 적시거나 담그고 싶다는, 일종의 갈증 같은 마음이 든다. 젖었는데 더 젖을 것도 없는데 참 이상한 감정이다. 오래 서있었더니 다리가 아파서 욕실 바닥에 앉는다. 계속 물을 뿌리면서 욕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욕조를 살 수는 없지. 화장실이 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고 느낀다. 그런 상상을 한다. 차츰 얼었던 몸은 노곤해지고 아까 느꼈던 알 수 없는 우울감도 한결 좋아진다.

 

밖에서 아버지께서 문을 두드리신다. 왜 이렇게 오래 씻냐고. 얼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환기를 시킨다. 욕조에 물이 빠지듯, 화장실의 수증기가 빠르게 사라진다. 거울과 나 사이에 만들었던 상상의 수족관이 사라진다. 수건으로 거울을 닦는다. 물자국이 남으며 멍청하게 표정을 짓고 있는 내가 나타난다. 감정은 사라지고 나만 남았다. 따뜻한 물에 녹아서 흐르는 돼지기름처럼 몸에서 떨어져서 하수구로 갔나 보다. 자취방에선 문 두드려 주는 사람이 없어서 아쉽지만, 어쨌든 한결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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