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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作豐邑(이작풍읍),自 岐下 而 徙 都豐(자기 하 이 사 도풍)。 풍읍(豐邑)을 건설하다. 기하에서 도읍을 풍으로 이사하다. 주周 부족이 서울을 옮긴 풍읍(豐邑)은 어디인가? 西安(서안) 市(시)인가, 835㎞ 떨어진 徐州(서주) 市(시)인가.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26)

이원환 전문 기자
  • 입력 2023.01.0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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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1) 본 연재물에서 특별히 인용된 서적이나 기록을 표시하지 않으면 사마천의 사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지난 번 글에서 서백西伯 (= 문왕. 주나라 무왕의 아버지)이 정복활동을 하고, 풍읍을 건설하여 기하岐下(섬서성 기산岐山현으로 비정)에서 풍으로 이사한 기록을 소개했다. 而作豐邑(이작풍읍)自 岐下 而 徙 都(자기 하 이 사 도풍)

 

2) 차이나에서는 풍을 섬서성 장안현( = 서안시 장안구)로 비정하는 견해와, 강소성 서주시 풍현으로 비정하는 견해 두 가지가 있음을 소개한 바 있다. 서안시 장안구와 서주시 풍현은 대략 835이상 떨어져 있다. 자동차 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가는 경우의 거리로 검색된다. 대략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거리와 비슷하다. 결국 두 가지 견해 중 하나는 틀리거나, 서안시에서 서주시로 옮겨진 경우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아니면 제3의 지역을 풍으로 비정해야 한다.

 

2. 부족의 유랑 기

1) 사마천 사기는 누구를 출신 고향의 우두머리로 임명하면서 봉한다고 기록한다. 순 임금이 기를 태에 봉했다. [封棄於(봉기어태)號曰后稷(호왈후직)別姓姬氏(별성희씨)]

 

1-1)거인의 발자국을 보고 임신한 의 어머니는 유태씨 강원이다. (其母 有邰氏 女(기모유태씨녀)曰 姜原(왈강원)그의 어머니는 유태씨()족으로 강원(姜原)이라 하였다.)

 

1-2) ‘사기 주(나라) 본기는 주 부족의 시조인 = 후직에 대해서 = 후직이 차이나의 본류 오제 중의 하나인 제 곡 (帝 嚳 곡 임금)의 핏줄이 아니지만 핏줄로 포장하기 위해 난생설화와 비슷한 발자국 설화로 포장한다. 제 곡 (帝 嚳 곡 임금)의 정비인 강원씨가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 임신하여 낳은 아들이 주 부족= 나라의 시조 = 후직이라고 기록한다.

 

1-3) 결론적으로 기는 족보의 아버지 5제 중 하나인 제 곡 (帝 嚳 곡 임금)의 핏줄이 아니라 어머니 유태씨()족의 핏줄이고, 즉 아버지는 거인의 발자국이고, 어머니의 고향인 유태 씨()족의 근거지 로 돌아가서 부흥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사기 주본기)

 

2) 주나라 시조 기는 요임금 때 농사=농림부 장관이 되고 순임금 때 에 봉지를 받고 제후가 되었으나, 하후씨 때 농사= 농림부장관자리가 없어져 아들 부줄은 융적의 땅으로 유랑하고, 4대손 공류가 위수 근방까지 왕래하다가, 5대손 경절이 빈에 근거지를 잡았다. (사기 주본기)

 

2-1) = 후직 (에 봉했다.) 부줄 (융적의 땅으로 유랑) 공류 (융적 땅에서 살면서 칠수(漆水)와 저수(沮水)에서 위수(渭水)를 건너서 목재를 벌채하여 사용) 경절 (()에 나라를 세웠다.)

 

2-2) 사기 주본기 원문

 

公劉卒(공류졸)子慶節立(자경절립)國於豳(국어빈)

공류가 죽자 아들 경절(慶節)이 이어받아 ()에 나라를 세웠다.

 

公劉 雖 在 戎狄之間(공류수재융적지간)復修后稷之業(부수후직지업)

공류(公劉)는 비록 융적의 땅에서 살았지만 후직의 업을 다시 일으켜서

 

務耕種(무경종)行地宜(행지의)(자칠저도위)取材用(취재용)

밭을 갈고 씨 뿌리는 일에 힘쓰고 농사에 적합한 땅을 찾아다녔으며, 칠수(漆水)와 저수(沮水)에서 위수(渭水)를 건너서 목재를 벌채하여 사용하도록 하니,

 

行者有資(행자유자)居者有畜積(거자유축적)民賴其慶(민뢰기경)

돌아다니는 사람은 재물이 생겼고, 정착해서 사는 사람은 재산이 쌓였으며 백성들이 그의 은덕에 의지하게 되었다.

 

3. ‘사기내에서의 기록의 모순

3-1) 사기 주본기에서는 위 2-2) 에서 보다시피 공류는 융적의 땅에 살고 질수, 저수, 위수를 왔다갔다 하며 세력을 키웠고, 아들 경절이 빈에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3-2) 사기 화식열전에서는

 

而公劉適(이공류적빈)大王(대왕)王季在(왕계재기)

공류(公劉)는 빈() 땅으로 이주했고, 주 태왕(周 太王 ; 고공단보(古公亶父).)과 왕계(王季; 주나라 태왕의 서자였던 계력으로 주 문왕의 아버지)는 기() 땅에 살았으며,“ 라고 기록하고 있다.

 

3-3) “ 공류는 융적의 땅에 살고 질수, 저수, 위수를 왔다갔다 하며 세력을 키웠고 공류의 아들 경절(慶節)이 이어받아 ()에 나라를 세웠다.”고 사기 주본기는 기록하고 있는 바

 

3-4) =() 이라고 해석하며, 글자도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논리의 비약이라고 본다. 와 글자가 아주 닮아 있다. 과는 완전히 다르다. 필사 과정에서 고쳐졌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사기 주본기에 쓰여진 대로 공류는 융적의 땅을 유랑했는데, 그 땅은 공류의 4대 할아버지 주나라 창업자 기의 어머니의 고향 로 비정한다.

 

4. ‘주나라 서울= 근거지의 이동

 

1) (=후직后稷은 태에 봉해짐)-> 하나라서울? (‘농사= 농림부장관자리가 없어져 아들 부줄 때 부터 융적의 땅으로 유랑 -> 융적의 땅 (공류公劉) -> (경절) -> 기하岐下(古公亶父 ) -> ( 西伯 曰 文王(서백왈문왕) 而作豐邑(이작풍읍)自 岐下 而 徙 都 豐(자기하이사도풍)(주본기) -> (=?, 文王 作 豐,⑯武王 治 鎬 화식열전)

 

1-1) -> 5대손 경절이 (=혹은 와 가까운 곳)에 근거지를 잡았다. ->

 

1-2) -> 古公亶父 고공단보가 칠수, 저수를 건너고 양산을 넘어 기하岐下에 자리 잡았다.乃 與私屬 遂去 豳(내여사속수거빈)度 漆(도칠)()踰 梁山(유 양산)止於 岐下(지어기하)->

 

1-3) -> 古公卒(고공졸),⑭季歷立(계력립)是為公季(위시공계)

고공이 죽고 계력이 즉위했으니 이 사람이 바로 공계(公季)이다. ->

 

1-4) -> 公季卒(공계졸),⑮子昌立(자창립)是為 西伯(시위서백)

공계(公季)가 죽자 아들 창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바로 서백(西伯)이다.

西伯 曰 文王(서백왈문왕) 서백이 바로 문왕(文王)이며, (중략)

 

5. 계속되는 의문

1) 伯夷(백이)叔齊在孤竹(숙제 재 고죽)聞西伯善養老(문서백선양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고죽국(孤竹國)에서 서백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중략). 고죽은 주나라 근처에 있어야 한다.

 

2) 帝紂乃囚西伯於羑里(제주내수서백어유리)

()왕이 이에 서백을 유리(羑里)에 있는 감옥에 가뒀다.

 

차이나는 유리를 지금의 안양시로 비정하고 있다. 河南省 安阳市 汤阴县 北4.5公里的 羑里城 遗址 (유적지)

 

3) (중략) 乃求有莘氏美女(내구유신씨미녀)驪戎之文馬(여융지문마)有熊九駟(유웅구사)

이에 유신씨(有莘氏)의 미녀와 여융(驪戎)의 준마와 유웅(有熊)의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 아홉 대를

 

-> 유신씨有莘氏는 유웅씨有熊氏, 주나라시조 기의 어머니 유태씨有邰氏, 유호씨有扈氏, 有戶氏 등과 같이 앞에 붙는 유 는 같은 종족을 의미하는 발음기호, 즉 차음문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4) 乃赦西伯(내사서백)賜之弓矢斧鉞(사지궁시부월)使西伯得征伐(사서백득정벌)이에 서백을 사면하는 한편 활과 화살,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하사하였으며, 서백이 제후를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서백 문왕을 풀어주면서 권한을 엄청나게 주는데, 이는 서백문왕이 반란을 일으키고 적절하게 타협한 것이 아닐까 하는 해석이 가능하다.

 

5) (중략) 西伯乃獻洛西之地(서백내헌락서지지)以請紂去炮格之刑(이청주거포격지형)紂許之(주허지)

서백이 이에 낙수의 서쪽 땅을 바치며 주왕에게 포락이란 형벌을 없애도록 청하니 주왕이 이를 허락했다.

 

->여기서 洛西之地 는 어디일까? 洛水() 혹은 洛河 는 두 군데이다. 지금의 서안시 옆과 낙양시 옆!

西周初期, 孟津县 西部的 元庄村一带 由 商纣王 赐给了 周文王, 史称 孟津西部一带为洛西之地”(见史记.周本纪)洛西之地

https://www.sohu.com/a/433465666_680051

 

6) (중략) 於是虞(어시우)芮之人有獄不能決(예지인유옥불능결)乃如周(내여주)이때 우()나라와 예()나라 사람이 해결하지 못하는 송사가 있어서 주나라로 왔다.

 

->순 임금 부족 우나라 와 예나라가 주나라 가까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7) (중략) 明年(명년)犬戎(벌견융)明年(명년)密須(벌밀수)

이듬해 견융(犬戎)을 정벌했다. 그 다음해에는 밀수(密須)를 정벌했다.

明年(명년)耆國(패기국)

또 그 다음해에는 기국(耆國)을 무찔렀다.

(중략)

明年(명년)(벌우)明年(명년)崇侯虎(벌숭후호)

이듬해는 우()를 정벌했다. 그 다음해에는 숭후호(崇侯虎)를 정벌했다.

 

->이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융과 주나라가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 대해서는 별도로 연구해 보고자 한다. 3) 驪戎에서 와 관련하여, 高句麗(고구리)高句驪 로 표기한 사례를 소개한 바 있다. 결국 고구리는 융족과 같은 차이나 서북방지역의 유목민족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8) 而作豐邑(이작풍읍)自岐下而徙都豐(자기하이사도풍)

그리고 풍읍(豐邑)을 건설하였으며 기산 아래에서 풍읍으로 도읍을 옮겼다.

 

明年(명년)西伯崩(서백붕),⑯太子發立(태자발립)是為武王(시위무왕)

이듬해 서백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 발()이 즉위했으니 이 사람이 곧 무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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