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1) 5제중 1번 누런 임금 황제黃帝는 ‘사기 5제 본기’에 ‘소전少典 씨족’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같은 책에서 4번 5제인 요堯 임금은 어느 씨족인지 ‘사기’에 기록이 없다. 같은 책에서 마지막 5번 5제인 순舜 임금은 누런 임금 황제黃帝의 8대 손자이면서 이상하게도 요堯 임금 두 딸을 한꺼번에 아내로 맞는다.
2) ‘사기’ 만으로 쉽게 추론하면 순舜 임금은 누런 임금 황제黃帝의 8대 손자로, ‘같은 소전少典 씨족’으로서, ‘소전少典 씨족’이 아닌 요堯 임금으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았다고 하겠다.
3) 그러나 맹자는 “순舜 임금은 동이족”이라고 명확하게 써 놓았다. 맹자는 기원전 300년 대 사람이다. 맹자가 쓴 혹은 맹자의 제자들이 편철한 ‘맹자’라는 책도 기원전 300년 경이라고 본다. ‘사기’는 기원전 100년경에 편찬된 것으로 본다. 두 책은 200년의 차이가 있다.
사마천은 ‘맹자’를 보았을 텐데 순舜 임금이 누런 임금 황제黃帝의 8대 손이라고 서술한 것은 ‘맹자’를 무시한 결과인가, 아니면 알고서도 ‘맹자’의 기록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아니면 ‘맹자’의 순舜 임금 해당 기록이 ‘사기’가 편찬된 이후에 끼워 넣어진 것일까?
‘사기’를 쓴 사마천은 한나라의 역사를 공고히 해야 하고 한나라가 차이나의 정통임을 어떻게든 ‘창의적으로’ (사기적으로) 서술해야 했었다.
4) ‘사기’가 후대에 왜곡되었든 처음부터 사마천이 잘못 기록하였든 순舜 임금 관련은 그 자체로 문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禹) 임금이 결부되면서 사마 천의 기록이 정교하지 않음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우(禹) 임금은 누런 임금 황제黃帝의 4대 손이다. 누런 임금 황제黃帝의 8대 손인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 주었다. 진 나라의 선조인 대비大費 역시 누런 임금 황제黃帝의 4대 손인데 우(禹) 임금과 같이 일했다. 순舜 임금이 누런 임금 황제黃帝의 8대 손이라는 기록을 믿을 수 있을까?
2. 진시황이 8가지 신성한 것 (8신) 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중 세 번째가 치우다!
1) 한자로 기록된 역사를 오늘날 인식할 수 있는 수준으로 된 것은 빨리 잡아도 기원후 100년 경 사마천의 ‘사기’가 편찬되면서이다. ‘사기’는 그 전의 기록과 전승을 옮겨서 종합하여 기록한 책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기원전 100년 경에 사마천이 붓글씨로 쓴 기록이 2,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원본 그대로 필사되어 전해졌으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나마 기록되어 전해진 것을 가지고 추론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2) 사마천 ‘사기’ 처음은 ‘5제 본기’로 시작한다. 복희 씨는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보통명사 皇帝(황제)가 아닌 고유명사 누런 임금 황제黃帝가 神農(신농) 씨와 싸운 이야기가 ‘5제 본기’ 초반부에 나온다. 그 대목에 ‘치우(蚩尤)’가 나온다. 누런 임금 황제黃帝가 이겼음으로 ‘치우(蚩尤)’와 神農신농 씨는 더 이상 기록에 나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치우(蚩尤)’는 ‘사기’ 곳곳에서 기록이 나온다. 어쩌면 ‘치우(蚩尤)’가 ‘神農신농 씨’보다 더 강한 집단이었거나 더 오래된 씨족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3) ‘사기 봉선서封禪書’ 를 보자.
3-1) 봉선서封禪書를 읽어 보면 禪 은 익숙한 말로 ‘제사’ 이고 봉선(封禪)은 제사지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네이버 한자 사전도 그렇게 설명한다. [봉선(封禪: 산천에 제사 지내던 일)]
3-2) 禪자는 示(보일 시)자와 單(홀 단)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單자는 사냥도구의 일종을 그린 것으로 ‘홀로’라는 뜻을 갖고 있다. 禪자는 본래 고대왕가에서 산천의 신에게 지내던 제사를 뜻했던 글자였다. 제례를 뜻하는 글자에 單자가 쓰인 것은 왕이 홀로 지내던 제사였기 때문이다. (네이버 한자사전 禪)
선은 좌선, 참선에서 보듯이 ‘도 닦는다’는 의미가 있는데, 제사 지낼 때의 엄숙함과 경건함을 생각하면 충분하다.
3-3) 봉선서封禪書에서 진시황이 명산대천과 팔신(八神)에게 제사를 올리는 기록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팔신(八神) 이다. 天·地·兵·陰·陽·月·日·四時 팔신이며 四時 는 사계절을 말한다. 천지인 이 아니라 천지병天·地·兵 에게 제사를 지내며 병兵의 신이 치우다!
三曰 兵主, 祠 蚩尤. 蚩尤 在 東平陸 監鄕, 齊之西境也.
셋째는 병주신(兵主神)으로 치우(蚩尤)에게 제사지낸다. 치우(蚩尤)를 제사 지내는 곳은 동평륙(東平陸)의 감향(監鄕)에 있는데 제나라 서쪽 변경에 있다.
4. 진시황이 치우(蚩尤) 제사를 지낸 동평륙(東平陸)은 어디인가?
1) 동평륙(東平陸)은 東平國 즉 옛날 양국故梁國을 말하고 현 河南省 상구시商丘市 수양구睢阳区 (睢 물 이름 수, 부릅떠 볼 휴)로 비정하고 있다. 상구시는 하택시 직남, 서주시 직서에 있다. 근처 강이름이 睢河(수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2) 상구시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송(宋)나라의 땅으로 비정하고 있다. 기억을 되살려 보자. ‘사기 송宋미자세가’에서 은나라 마지막 왕 주의 이복 형 미자가 송(宋)에 도읍하고, 은나라 제사를 이어갔다고 했다. 기원전 11세기 중반의 일이다. 상구시 망탕산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玉匣(옥갑) (옥의)가 출토되었다.
3) 지난 글에서 은나라 마지막 왕 주가 옥의 (玉匣옥갑)을 입고 녹대에 올라가 불타 죽었음에도 주나라 무왕이 목을 베었다는 사마천 ‘사기 은본기’를 소개한 바 있다. 망한 은나라 제사를 모시는 송나라 지역에서 옥의 (玉匣옥갑) 가 발견된 것이다.
4)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와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조 등에서 부여의 역사를 상당히 길게 기록하였다. 우리 국민이 배우는 한국사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내용이 대부분일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후한서는 부여 왕이 죽을 때를 대비하여 한나라가 옥의(玉匣옥갑)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고 기록하였다. 반대로 부여가 한나라 왕이 죽을 때를 대비하여 옥의(玉匣옥갑)을 준비한 것이 아닌 지 해서 두 번 세 번 읽어본 부분이다. 역사 조작을 밥 먹듯이 하는 차이나와 대한민국 역사학계가 모른 척하고 강조를 하지 않아서 아직까지 삭제나 변경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5) 차이나의 해괴망칙한 玉匣옥갑 관련 행동을 보자. 玉匣옥갑의 의미를 모르니 혹은 모른 체하니 파리에 원정 전시를 하는 것이다. “ 대한민국 국민의 조상인 부여왕이 죽을 때를 대비하여 차이나의 본류인 한나라가 玉匣옥갑(옥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는 말을 누가 했더라면 과연 원정 전시를 갔을까?
차이나는 프랑스 수교 50주년을 맞아 ⑦ 1994~5년 서주 사자산 초왕릉 출토, 국보 “ 금루옥의玉匣 ‘ 등 여러 문화재를 파리에 가지고 가서 전시했다. 金缕玉衣 在巴黎展出(图).网易[引用日期2014-10-24]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