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1) 차이나의 역사서는 편찬시기의 선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증보 삭제 변경된 경우가 많아 먼저 출간된 역사서를 최우선하지만 항상 비교분석하여야 한다.
2) 일곱 번째 글 “ 하북성 보정시와 하북성 정주시에서 나온 옥갑. 부여와 은나라(은허)의 관계는? 차이나 역사책으로 찾아본 부여. 부일사학 국사편찬위원회 (7)”에서 세 역사서를 비교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삼국지)는 285년경 발간되고 450년경 증보되었다. 후한서 동이전 부여조(후한서)는 430년경 발간되었다. 진서 4이열전 부여조(진서)는 648년경 발간되었다.
3) 후한서 및 삼국지에는 부여왕의 장례에 옥으로 만든 수의를 사용했는데 이를 한나라가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漢時, 夫餘王葬用玉匣, 常豫以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
漢나라 때에는 夫餘王의 장례에 玉匣을 사용하였는데, 언제나 [玉匣을] 玄菟郡에 미리 갖다두었다가 王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 장사지냈다.
4) 진서에는 ①순장殉葬, ②곽椁은 있으나 관棺은 없는 묘제의 특징, ③상을 지내는 사람은 흰옷을 입는 점, ④상을 지내는 사람은 옥으로 만든 패물은 차지 않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진서와 ‘사기 은본기’를 비교해 본다.
(椁 덧널 곽, 지금 사용하는 관보다 매우 큰 사각형의 나무 상자. 매장시설은 시체를 직접 넣는 널〔棺〕, 이를 안치할 수 있는 보호시설로서의 덧널, 곽의 외부시설로서의 묘실(墓室)이 있다.널과 덧널은 쉽게 구분된다. 즉, 널은 시체를 직접 넣는 상자로서 이동이 가능한데 비해 덧널은 부동의 시설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덧널)])
2. ‘사기 은본기’ 부여관련 검토
1) ‘사기’ 권3 은본기(殷本紀) 제3 의 순서
1 은본기(殷本紀)
1.1 은(殷)나라의 선조
1.2 탕(湯)
1.3 외병(外丙), 중임(中壬), 태갑(太甲)
1.4 옥정(沃丁), 태경(太庚), 소갑(小甲), 옹기(雍己), 태무(太戊)
1.5 중정(中丁), 외임(外壬), 하단갑(河亶甲), 조을(祖乙), 조신(祖辛), 옥갑(沃甲), 조정(祖丁), 남경(南庚), 양갑(陽甲)
1.6 반경(盤庚), 소신(小辛), 소을(小乙), 무정(武丁)
1.7 조경(祖庚), 조갑(祖甲), 늠신(廩辛), 경정(庚丁), 무을(武乙), 태정(太丁)
1.8 제을(帝乙), 주(紂)
1.9 사마천의 논평
2) “ 1.1 은(殷)나라의 선조”는 고구리, 부여의 익숙한 난생설화卵生說話 로 시작한다. 은나라가 동이족(한민족)임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은(殷)나라의 선조 “ 은(殷)의 (시조인)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으로 유융씨(有娀氏)의 딸이며 제곡의 둘째 비였다. 세 사람이 목욕을 갔다가 현조(玄鳥)가 떨어뜨린 알을 보고는 간적이 주워 삼키고는 임신하여 설을 낳았다. 설은 장성해서 우의 치수에 공을 세웠다.
제순이 이에 설에게 말하기를 “백성이 친목하지 않고 오품을 가르치지 않으니 그대가 사도(司徒) 벼슬을 맡아 오교를 가르치되 경건하고 너그럽게 하시오”라고 명했다. 상(商) 땅에 봉하고 자씨(子氏)라는 성을 내렸다. 설은 당(요), 우(순), 대우 때 흥하여 백성들에게 공업을 드러내니 백성이 평안했다. (위키문헌 번역을 필자가 일부 수정
https://ko.wikisource.org/wiki/%EB%B2%88%EC%97%AD:%EC%82%AC%EA%B8%B0/%EA%B6%8C003 )
殷契,〔一〕母曰簡狄,〔二〕有娀氏之女,〔三〕為帝嚳次妃。三人行浴,見玄鳥墮其卵,簡狄取吞之,因孕生契。〔四〕契長而佐禹治水有功。
帝舜乃命契曰:「百姓不親,五品不訓,汝為司徒而敬敷五教,五教在寬。」封于商,〔五〕賜姓子氏。〔六〕契興於唐、虞、大禹之際,功業著於百姓,百姓以平。
( 国学导航-史記 http://www.guoxue123.com/shibu/0101/00sj/003.htm )
3) 은의 선조가 설(契) 임에 주목하자. 契丹 이라 쓰고 ‘거란’이라 읽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네이버 사전을 보자 契 은 자그마치 네 가지로 읽힌다. 그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① 맺을 계 : 계약서를 연상하면 된다. 거란의 ‘거’와는 발음상 거리가 멀다.
② 애쓸 결 : 거란의 ‘거’와는 발음상 거리가 멀다.
③ 부족 이름 글 : 부족이름이라는 것으로 보아 원래 발음이 ‘글’에 가까웠을 것이다. 5,60년전에는 ‘거란’을 ‘글안’으로 표시한 역사책도 있었다.
④ 사람 이름 설 : 거란의 ‘거’와는 발음상 거리가 멀다.
⑤ 契 옆에 붙은 부수에 따른 발음이 모두 ‘설’임을 보면 원래 발음이 ‘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偰 설 : 맑을, 이름
楔 설 : 문설주.기둥
褉 설 : 속옷 설
猰 설 : 짐승이름 설, (짐승 이름 알, 얼룩개 갈, 무자비할 결)
⑥ 契를 파자해 보자
丰 에 대한 네이버 사전의 설명이다. “ 예쁠 봉, 풍채 풍. 상형문자 초목(草木)이 잘 우거진 모양을 본뜬 글자.”
그런데 양 羊을 丰 로 쓰기도 했다. 丰 옆에 칼 刀(도), 아래에 큰 大(대) 이다.
‘양(풀)을 베는 칼을 찬 큰 사람’ 혹은 ‘양(풀)을 베는 큰 칼’의 의미가 된다. 은나라 선조 契 (설) 은 양을 모는 유목민족으로 이름이 ‘설’이었을 것이다.
⑦ 契丹 의 丹은 붉을 단, 붉을 란(난)이다.
⑧ 契丹 은 설란(단) 으로 읽어야 하며, 契(설)부족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거란이라 읽고 황하강 변 ‘중원’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오랑캐 부족이라는 인식은 철저히 속은 결과라고 본다. ‘사기’는 ‘賜姓子氏’라고 기록하여 契(설)에게 子(자) 라는 성씨를 준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契(설)과 子(자) 둘 다 혹은 어느 하나가 계속 이어졌는 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참고로 契丹은 영어로 ‘키타이’ (Khitay) 현재 차이나는 ‘치단’으로 읽는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