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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쓰는감정] 열전도 높은 열전도사

이진성
  • 입력 2022.12.06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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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9. 지하철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데 내 앞에 중년 이상의 백발이 성성한 분께서 서셨다. 나는 보통의 80년대생으로 커서 도덕적인 의무감에 일어나 자리를 내어 드렸다. 그런데 할저씨께서 본인이 앉으시지 않으시고 멀리 뒤쪽에 누군가를 불러서 앉히셨다. 아마도 부인이신 것 같았다. 내 눈엔 앉으셔야 할 분이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다. 더 노쇠한 다리로 서 계셨고 그래서인지 더 지긋하다고 여겼나 보다. 여하튼 아주머니께서 앉으셨다. 할저씨께서 연로해 보이셔서 딸을 앉힌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딸을 앉히려고 본인이 서 계시는 것도 극적으로 보인다는 공상을 해봤다.

자신은 무게를 견디고 다른 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양보를 왜 하는 걸까. 내가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어릴 때 기억 때문인 것 같다. 9살 정도였을 때, 외할머니께서 편찮으셔서 신촌 세브란스에 모셨고, 어머니와 나는 가끔 신촌을 갔다. 서울 태생이신 어머니께선 뭔가 보일 때마다 내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해주셨다. 한강을 건너면서 '우와 저거 참 예쁘지 한강' 대략 이런 대화였다. 그러면 앞에 앉은 분께선 자리를 양보해주거나 나를 자기 무릎에 앉히셨다. 어떤 날은 대학생, 어떤 날은 할아버지, 또는 군인, 아줌마, 할머니.

내가 익명, 혹은 무명의 양보를 처음 받은 것은 그때였던 것이다. 사소한 양보라도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받은 양보가 지하철 자리 양보다. 그 사소한 온도가 청년 또는 대학생 시절의 내 엉덩이를 들게 하고 다시 남을 앉힌다. 열전도랄까. 엔트로피 열역학 법칙이랄까. 지하철 시트 열선만큼은 아니라도 내 온도가 또 어디론가 스며들어서 전해지면 좋겠다. 오늘은 열전도가 높은 청년, 열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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