玄菟郡을 읽어보자. 현도군인가? 현토군인가? 菟 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뜻이 있다. 토끼를 부르는 말이기도 하고, 호랑이를 부르는 말이며, 풀(식물)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토’로 읽던 ‘도’로 읽던 세 가지 의미를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사전도 있다.
네이버는 호랑이 도, 토끼 토, 풀 토로 구분하였다.
이왕이면 호랑이 ‘도’로 읽자. 현도의 뜻이 ‘검은 호랑이’가 되는데, 검은 호랑이는 전설로도 동화로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면 玄菟 현도 는 뜻으로 기억해야 하는가 아니면 발음으로 기억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고대사 연구에서 사람이름이나 지명, 강 등을 한자로 표현하여 뜻이 매우 이상하거나 전혀 맥락이 맞지 않을 경우 읽는 대로인 음가 (音價)를 잘 복원하여야 하는 경우가 많다.
玄菟 는 현도 (토) 혹은 쉬앤뚜 정도로 발음된다.
1) “夫餘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方可二千里。戶八萬”
“ 夫餘는 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玄菟에서 천 리 떨어져 있다. 남쪽은 高句驪와, 동쪽은 挹婁와, 서쪽은 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방 2천 리가 되며, 戶數는 8만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三國志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
이 구절만 놓고 보면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놓고 서술한 것인지 차이나 대륙을 놓고 쓴 것인지 헷갈릴 수 밖에 없다.
원문은 高句麗(고구리) 인데 번역문은 高句驪 로 표시했다. 실수로 볼 수는 없다. 한국의 역사학자가 高句麗 글자를 기억하지 못할 리는 없는 것이다. 驪와麗는 다르다. 이제부터는 최고 권위 국사편찬위원회 발표 역시 글자 한 자 한 자 검증해야 한다.
한서지리지에는 현도군에 3개 현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高句驪 라고 했다. 한글 번역문에서 驪 라고 표시한 것은 부일역사관 즉 한사군은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거짓말에 세뇌되어 차이나 역사서 마저 한민족에게 더욱 불리하게 번역하는 태도의 결과이다.
후한서 동이열전은 高句驪 와 高句麗를 같은 것으로 보고 쓰는 듯 하다.
2) “ 濊 北與高句驪·沃沮, 南與辰韓接, 東窮大海, 西至樂浪. 濊及沃沮·句驪 本皆 朝鮮之地 也.”
“ 濊는 북쪽으로는 高句驪·沃沮와, 남쪽으로는 辰韓과 접해 있고, 동쪽은 大海에 닿으며, 서쪽은 樂浪에 이른다.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朝鮮의 지역이다.”[후한서 동이열전]
3) “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 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
“ 夫餘는 본래 玄菟[郡]에 속하였다. 漢나라 말년에 公孫度이 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外夷들을 威力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尉仇台는 [소속을] 바꾸어 遼東郡에 복속하였다. 이 때에 [高]句麗와 鮮卑가 강성해지자, [公孫]度은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同盟을 맺으려고] 一族의 딸을 [그 王에게] 시집보내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이 구절에서 한나라가 부여 왕이 죽을 때를 대비하여 수의인 옥갑을 준비했다는 기사가 수긍이 될 수 있다. [(5) 참조]
삼국지는 부여가 본래 현도에 속했는데 위구태가 요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국사편찬위원회는 “公孫度雄張海東,”를 “公孫度이 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로 변역했다.
3-1) “度 ”는 도, 탁, 택 세가지로 읽는데 그 중 ‘도’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유독 국사편찬위원회는 ‘탁’이나 ‘택’으로 읽은 것이다.
3-2) “雄張”을 “公孫度이 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로 번역했는데, 張 은 “어떤 일을 벌이다. 넓히다, 크게 하다 ”는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면 “海東에서” 가 아니라 “海東으로”가 된다.
“公孫度이 海東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가 아니라 “公孫度이 海東으로 세력을 확장하여”로 해석하여야 한다. 위치는 현도 (한나라)- 공손도(한나라)- 부여- 요동(한나라) 순서가 되는 것이다. “海東에서” 는 틀린 번역이며 부일역사관 즉 한사군은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거짓말에 세뇌된 결과이다.
3-3) 물론 현도 와 요동 이 반드시 한나라에 속하는 군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한나라의 군현이란 그냥 이름만 붙인 것이지 실제 지배한 곳은 몇 군데 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이다. 원문 역시 “郡군”이 생략되어 있다.
公孫度 이 (동)이를 정벌하자 (동)이인 부여의 왕 위구태는 현도에서 요동으로 소속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혹은 현도에서 요동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즉 현도, 부여, 요동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다.
1) 문장과 합쳐서 보면 1), 3) 두 문장중 하나는 틀린 것이다. 1) 문장은 “夫餘는 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玄菟에서 천 리 떨어져 있다.”고 했다. ‘천 리’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1), 3) 문장을 한국인에게 제일 유리하게 해석하면
“ 부여는 한나라 수도 (지금의)서안과 가까운 현도(군)에 속해 있었는데 어떤 이유로 황하 (바다) 동 쪽에 있는 요동(군)으로 소속을 옮겼다.”
현대 황하유역에서 벌어지는 역사에서 海 는 대부분 황하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황하는 북남으로 흐르다가 지금의 서안- 낙양 연결선 부근에서 서동으로 “L” 자 모양으로 흐른다.
북남으로 흐르는 황하를 기준으로 하면 황하 서쪽인 서안 근처에 현도(군)이 있었고 황하를 건너면 海東 요동이 나오는 데, 부여는 황하 서쪽에 살다가 황하 동쪽으로 옮겼다는 것이된다.
여기서 “유레카” (뜻 밖의 발견을 했을 때 외치는 단어)라고 외칠 뻔 했다.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은 연나라 사람 (위)만이 황하를 건너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아래 4) 문장)
또한 위 2) 문장에서 “ 예 및 옥저·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朝鮮의 지역이다” 라고 했다.
4) “朝鮮王滿,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朝鮮王滿은 옛날 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燕나라의 全盛期로부터 일찍이 眞番과 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秦이 燕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遼東 外徼에 소속시켰는데, 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燕에 복속시켰다.”[사기 조선열전]
결국 1) 문장은 “夫餘는 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玄菟에서 천 리 떨어져 있다.” 는 삼국지 편찬후 후대에 가필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부여를 만리장성 밖으로 내보낸 것은 명대 이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생각한다.
5) “ 其王 葬用 玉匣, 漢朝 常 豫以玉匣 付玄菟郡, 王死則 迎取以葬焉.
“ 그 나라 王의 장사에는 玉匣을 사용하므로, 漢나라 조정에서는 언제나 玉匣을 미리 玄菟郡에 갖다 두어, 王이 죽으면 그 玉匣을 취하여 장사지내게 하였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부여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