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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 시인의 종묘 이야기 - 창엽문

권순옥
  • 입력 2016.02.2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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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엽문(蒼葉門)

종묘 정문으로
조선 역대 왕들이 종묘 제례를 위해
맨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문

종묘의 정문은 외대문인 창엽문(蒼葉門)이다. 창엽문은 ‘푸른 잎처럼 조선왕조가 영원토록 무궁무진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지어졌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인 삼봉 정도전이 지었다. 정도전은 경복궁, 광화문, 근정전 등 궁궐전각의 대부분의 이름도 지었다. 그 덕분인지 종묘 공원엔 정도전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을 건국하고 경복궁으로 지으면서 종묘를 맨 먼저 완공했을 때 정도전은 아마도 이성계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정도전은 고려의 국력이 현저하게 기울어 갈 때 새로운 계기를 찾아 전국을 떠돌았다. 평양을 거쳐 왜구를 물리친 이성계의 영웅담을 가슴에 새기면서 함경도 함주군 군영까지 가게 되었다. 이때 이성계는 동북면 도지휘사인 무장이었다. 아주 공교롭게 함주군은 이성계의 고향이기도 했다. 정도전이 찾아가보니 군대가 질서정연하고 군기가 엄하여 병졸의 대오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기백이 넘쳐난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이성계와의 첫만남에 대한 소회(所懷)를 시(詩)로 남겼다. 그것도 병영 앞에 당당히 서 있는 노송 한그루가 있어 그 껍질에다 시를 새겨 놓고 표표히 길을 떠났다. 당연히 이성계가 이 시를 읽고는 깊은 감명을 받아 조선을 건국하려고 마음 결심을 할 때부터 정도전을 자신의 오른팔로 삼았다.

까마득한 세월의 한 그루 저 소나무는 蒼茫歲月一株松
첩첩한 청산 속에서 잘 자랐구나 生長靑山幾萬重
잘 있거라 훗날에 또 만날 수 있을런지 好在他年相見否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 남겼구나 人間俯仰便陳蹤

이 시(詩)를 보면 한그루 노송이 까마득한 세월동안 푸르게 살아왔음을 나타내고 있다. ‘훗날에 또 만날 수 있을런지’ 라며 이성계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 이 기대는 거대하고 새로운 나라 건국을 위한 시발점이 될 터였다. 이 시처럼 창엽문 작명도 까마득한 세월동안 조선이 푸른 잎처럼 무성해지고 번영을 구가하기를 바라는 정도전의 믿음이 은연중에 실려 있음을 본다.
이처럼 장대한 뜻이 있음에도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푸를 창(蒼), 잎 엽(葉)’자를 파자하여 보니 스물여덟 획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조선 임금이 28대에서 그 대가 끊기는 것을 정도전이 예언했다’고 억지로 만들어낸 아주 악랄한 소문을 퍼뜨렸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27대에서 대가 끊기었다. 조선의 마지막은 순종 임금으로 끝나야 하는데 영친왕 이은(李垠)까지 포함하여 제28대로 내세웠다. 영친왕 시절은 이미 조선이 망한 한참 뒤였다. 그런데도 일본은 조선의 마지막 숨통까지 움켜쥐기 위해 온갖 추악한 일들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창엽문은 외대문이다. 종묘 외부에 난 ‘가장 큰 대문’이라는 뜻이다. 조선 초에는 창엽문만 있다가 창덕궁하고 가까운 곳에 북신문이 새로 만들어졌다. 북신문이 있었짐나 종묘제례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정문인 창엽문까지 빙돌아 왔다. 하지만 종묘를 돌보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방문할 때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종묘의 담을 헐고 북신문을 만든 것이다.
창엽문은 경복궁의 광화문이나 창덕궁의 돈화문, 창경궁의 홍화문에 비해 작고 초라하기까지 하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구조 형태가 아주 검박하고 단순하게 짜여져 있다. 경복궁의 궐내각사에 출입하는 관원들이 드나들던 유화문(維和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너무 소박해서 종묘의 위엄이 깎이지나 않을까 걱정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늘 백성을 섬기며 검소하고 검박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조선 군왕의 도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저절로 수긍이 간다.
창엽문 전면 중앙에는 삼단(三段)의 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다. 당연히 이 계단에는 소맷돌도 있어서 종묘제례를 위해 종묘를 찾던 역대 왕들은 이 계단을 통해 창엽문 가운데 문을 열고 통과했다. 종묘 제례 때만 가운데 문이 열렸다. 그런데 이 계단은 일제강점기 때 창엽문 앞에 도로를 만들면서 땅 속에 파묻어 버렸다. 조선에서 가장 신성시 여기는 종묘 앞을 아무나 다니도록 만들어버려 조선을 비참하게 깔아뭉개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의 종묘가 백성들로부터 신성시 여겨지고 마음으로 경배를 하는 것조차 철저히 깨부수려 한 것이었다. 그 뒤 이 계단이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발굴을 통해 원형을 되찾았지만 현재는 다시 묻어놓은 상태이다.

창엽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삼문 형식이다. 종묘의 모든 건물처럼 맞배 지붕인 홑처마로 되어 있다. 홑처마는 처마에 처마를 덧댄 겹처마 보다 단순소박한 맛이 있다. 창엽문 안에서 보면 지붕을 떠받치는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만든 연등천장(椽燈天障)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정면에는 나무 둘레를 둥그렇게 깎아 만든 네 개의 두리기둥을 세웠다. 그 두리기둥 위에 마치 새의 날개처럼 튀어나와 있는 익공(翼工)이 두 개가 올라가는 이익공(二翼工) 양식의 공포를 구성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곳의 건물은 이 이익공 양식으로 짓는 게 보편적인 건축 방식이다. 먼저 두리기둥에 연결하는 창방(昌枋)을 얹는다. 이 창방위에 초익공을 얹고 그 위에 기둥을 받치고 있는 부재(部材)인 주두(柱頭)를 얹는다. 이 주두 위에 첨자를 올린 다음 이익공(二翼工)을 올린다. 초익공, 이익공이 올라가 이익공 양식이라 한다. 이 이익공 위에 다시 재주두를 얹고 도리밑을 받치는 모진기둥인 장여를 올린다. 그 위에 대들보를 연결하고 도리를 얹는다. 이게 이익공식(二翼工式) 방식이다.

창엽문 단청은 종묘의 정전이나 영녕전의 단청처럼 가칠단청에 속한다. 단청에는 가칠단청, 긋기단청, 모로단청, 금단청이 있지만 종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 화려한 단청을 피하고 적색과 녹색 두가지만으로 단청을 했다. 이를 가칠단청이라 한다.
건물의 넓은 면에는 적색(赤色)을 칠하고, 좁은 면에는 엷은 녹색(綠色)을 칠하는 채색 법을 사용하였다. 적색은 각종 잡귀들, 악귀, 액운을 몰아내고 천재지변으로부터 종묘를 보호하는 벽사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녹색은 만물이 생성하는 봄의 색이자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색이어서 사용했다. 봄이 되면 산천이 모두 녹색으로 옷을 갈아입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이 기운을 단청에도 적용시킨 것이다.
창엽문도 마찬가지로 넓은 곳은 적색으로 칠하고 공포(栱包)처럼 좁은 부문에는 주로 녹색이 칠해졌다. 창엽문 안과 밖에 적색과 녹색이 칠해져 잡귀, 악귀, 액운, 귀신들로부터 완벽하게 막아냈다.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 문 안쪽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어 잡귀, 액운이 종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그리고 지붕에도 잡상을 세워 흉포한 잡귀들이 근접을 하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도록 했다.
종묘는 외서문과 창엽문 두 개로 있다가 창덕궁하고 가까운 곳에 북신문이 새로 만들어졌다. 지금은 외서문은 아예 없고 북신문은 새롭게 복원이 되고 있다.
“종묘 정문인 창엽문이여! 조선 오백년 동안 수많은 종묘 제례를 지낼 때마다 왕들, 종친들, 신하들이 발이 닳도록 드나들던 문이여! 일제강점기 때는 나라 멸망의 아픔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창엽문 계단까지 도로밑에 깔려 버린 통곡의 역사여! 지금은 수많은 세계인들이 이 세계문화유산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가슴 설레며 달려오누나!”


작 성 자 : 권순옥 margo@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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