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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훈 시인의 종묘 이야기 - 순라골

권순옥
  • 입력 2016.02.2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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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라골

종묘 외곽담을 순찰한 순라군(巡邏軍)
동순라길, 서순라길
순라군에 잡혀 밤새 경을 친 놈

경복궁이나 창덕궁 같은 궁궐에도 외곽담이 있지만 종묘도 한 바퀴를 빙돌아 높은 외곽담이 설치되어 있다. 종묘전도(宗廟全圖)도에 따르면 담의 길이가 1,331보이다. 1보는 6척의 길이로 약 1.87m이므로 2,489m에 달한다. 사람들이 무단으로 종묘에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것이다.
조선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는 종묘에 외곽담이 없었다. 종묘 자체가 조촐한 건물이어서 그랬다. 성종 때 그려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종묘전도를 보면 정전도 7칸 규모였고 부속건물도 간소했다.
그러던 것이 17세기 헌종 때에 이르러 정전 중수가 끝나 외곽담이 완성이 되었다. 이 외곽담과 함께 외대문인 창엽문, 외서문, 북신문이 그려진 종묘전도(宗廟全圖)에 잘 나타나 있다.
종묘 외곽담을 끼고 날마다 순찰 활동을 벌였다. 조선시대 행해진 통행금지시간이 되면 도둑이나 화재 등을 경계하기 위하여 순라군(巡邏軍)들이 순찰을 돌았다. 보통 순라군을 순라꾼이라 불렀다.
종묘 외곽담 다섯 곳에는 군보(軍堡)를 두었다. 하루종일 서서 종묘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수직군이 근무하는 일종의 작은 초소였다. 여기에서 근무하는 수직군들은 저녁내 수직을 서고 해가 뜰 때에 입직관에게 사고 유무를 고했다.
조선전기에는 순라군이 주로 종6품 벼슬인 부장(部將)이 군사 10명을 인솔하고 순찰을 했다. 오위(五衛)의 종2품 벼슬인 위장(衛將)이 군사들과 함께 돌기도 했다. 이렇게 새벽까지 순찰하여 이상 유무를 임금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통행금지 시작은 밤 10시인 이경(二更)이었다. 이때 통행금지를 알리는 인경을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이층 문루에서 쳤다. 한자로는 인정(人定)이다. 큰 북으로 쳤다.
그러다가 조선말기에 들어오면서 종각에 매단 큰 종으로 이경에 28번 치면 한양 4대 성문인 숭례문, 흥인문, 돈의문, 숙정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5경인 새벽 4시에 33번을 쳐 이들 성문을 열면 일반 백성들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이를 파루(罷漏)라고 한다. 일반 백성들을 통행금지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해주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통행금지가 되면 도성안은 그야말로 고요함과 적막만이 흐르는 천지가 되었다. 그 틈을 이용해 도둑들이 날뛰기 쉬워 주로 궁궐과 종묘, 도성 안팎을 순찰하였다. 이때 통행금지 위반자는 잡아다가 다음날 순청(巡廳)에 회부하여 곤장을 쳤다.
정말 재수없게시리 통행금지에 걸리면 2경(二更)에는 곤장이 10대인 곤형(棍刑)을 처벌받았다. 이때에 엉덩이를 까내리고 버드나무로 만든 곤장으로 엉덩이나 허벅지를 맞았다.
한밤중인 3경이나 4경에는 그 수가 불어나 20대에서 30대에 가까운 곤장을 맞아야 했다. 이렇게 곤장을 맞으면 엉덩이가 피떡이 되기 일쑤였다. 엉덩이 살이 너덜너덜해지고 짓물러 평생을 고생해야 했다. 아주 걷지도 못하는 불구가 된 사람도 생겨났다. 이같이 가혹한 형벌이어서 일반인들은 통행금지가 되는 야간에는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야간통행 허가증이 있는 이들만 조심스럽게 오가곤 했다.
세종 때 만들어진 자격루가 시간을 알려주었다. 두 시간 단위로 저녁 8시를 초경, 10시를 2경, 12시를 3경, 새벽 2시를 4경, 새벽 4시를 5경으로 나누었다. 이 경은 북을 쳐서 알려주었다. 이 경을 6등분을 나누어 매20분마다 점(點)을 두어 시간을 알려주었다. 이 점은 꽹과리 쳐 전달했다. 자격루에서 북소리로 인경을 치면 성안의 순청(巡廳)에 그대로 전달되어 여기서도 북으로 경을 쳤다. 순라군들이 머무는 경수소나 순포막까지 도달했다. 여기에서도 똑같이 북과 꽹과리로 경이나 점을 쳤다. 이 경과 점으로 근무자들이 순찰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판단했다.
순포막에서 경을 치지 않으면 이를 감독하는 감순청(監巡廳)에 불려가 문책을 당해야 했다. 그렇기에 이를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밤에 순포막에 통행금지를 어긴 자들이 잡혀오면 이들을 시켜 경을 치도록 했다. 순포막 근무자들이 야간근무에 지쳐 잠에 빠져 있어도 자동적으로 치도록 했다. 그래야 감순청으로부터 순라를 잘 돌았다고 칭찬을 받았다.
저녁 10시 조금 넘은 시각에 잡힌 통행금지 위반자라면 온밤을 꼴딱 세우며 경을 쳐야 했다. 깜박 졸았다가는 포청에 끌려가 곤장을 맞기에 정신 바짝 차리고 쳤다. 이렇게 경을 잘 치면 순포막에서 바로 풀어주었다. 경을 잘 친 상으로 내보내준 것이다. 통행금지 위반자는 밤새워 졸린 눈을 비비거나 살갗을 꼬집으며 곤장을 면하려고 열심히 경을 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렇게 곤욕을 치른 사람을 가리켜 ‘경을 칠 놈’이라고 비하했다.
종묘에는 순청이 있었다. 이 순청을 기점으로 해서 주기적으로 순찰활동을 했다. 순찰 중간 여러 곳에 경수소하고 순포막이 있어 이곳에서 쉬기도 하고 통행금지 위반자를 잡아다 놓았다. 그러다가 순라군들이 배가 출출할 때면 주막에 들러 국밥으로 간단히 요기를 때우기도 했다.
종묘 옆에는 자연 촌락이 여럿 있었다. 이들은 양민들로 종묘제례 때 수복청에서 음식을 만드는데 동원되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순라군들이 자주 들른다고 해서 순라골(巡邏洞)이다. ‘순청이 있는 곳’이라는 뜻도 있다. 서울 종로구 원남동과 훈정동 일원이다. 서울 서대문쪽에도 순청이 있어 이곳도 순라골이다. 순랏골, 술랫골로 불리웠다.
종묘 창엽문을 기점으로 오른쪽으로 동순라길이 있고, 왼쪽으로 서순라길을 따라 담장을 한바퀴 돌면서 순라가 이뤄졌다.
순라군은 순라(巡邏)를 돌면서 도둑이나 도적을 추포했다. 그래서 도둑잡기 놀이인 술래잡기가 생겨났다. 일반인들은 순라를 술래로 발음을 했기에 생겨났다. 도적 역할을 한 아이가 꼭꼭 숨어 있으면 순라군인 술래가 이리저리 헤매며 찾아내야 하는 놀이였다. 도적을 못 찾아내면 밤새워 술래가 되어야 했다.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선 술래가 집으로 들어가 버리면 술래잡기 놀이는 끝이 났다. 그런데 도적 역할을 한 아이가 짚단 속에 숨어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다. 이 술래잡기 놀이는 우리 전통놀이로 지금도 아이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다.
강강술래 민속놀이는 임진왜란 당시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였던 이순신 장군이 수병을 거느리고 왜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생겨났다. 왜군의 군사들에게 해안을 경비하는 우리 군세의 많음을 보이기 위하여 고안한 놀이였다. 캄캄한 한밤중에 공터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손에 손에는 각자 횃불을 들고 원을 돌면서 강강술래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왜군이 해안에 상륙해서 살육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처절하면서도 두 눈 부릅뜨고서 흥겹고 즐겁게 노래를 부른 것이었다. 왜놈들에 대한 골수에 사무친 분노가 수많은 이들의 신명을 북돋우어야 하는 놀이로 결합된 것이다. 이 처절한 노래가 결국 왜놈들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 일대 왜군과 격전을 치루고 있는 전지(戰地) 부근의 부녀자들이 앞장섰다. 마을마다 수십 명씩 떼를 지어 해안쪽 산에 올라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돌면서 강강술래 노래를 목 터지게 불렀다. 여기서 술래는 순라에서 비롯된 말로 ‘사방을 경계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종묘 외곽은 이렇게 순라꾼들이 철통같이 지켜내 도적들이 종묘에 있는 제기들이나 역대 왕들의 신주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했다.
“종묘 외곽을 돌던 순라군들이여! 다들 어느 곳에 잠들어 있는지......그때 순라군들이 먹던 술국이며 국밥은 꿀맛이었는지.......그리고 순라군에게 잡혀 밤새 경을 쳐야 했던 서민들은 어느 곳에 잠들어 있는지......순라골 땅이름만 남아 조선시대 역사의 한 부분이나마 증언해주고 있구나!”




작 성 자 : 권순옥 margo@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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