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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소설 - 미스 지아이

권순옥
  • 입력 2016.02.16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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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지아이

신발장 구석에 놓여있는 검정색 스웨이드 하이힐 한 짝을 보자 J가 떠올랐다.
그날 밤 그녀의 아버지는 정복을 입은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장군은 나를 내려다보았고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가 눈을 부라리자 몹시 위축된 나는 빌려온 차 키를 떨리듯 흔들며 말했다.
-저, 장군님. 따님을 모시고 가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올해 장군 진급대상자인 대령에게는 딸만 셋이 있었다. 특히 막내딸에 대한 사랑과 보호는 지나칠 정도인 장군은 자신의 소신인 금남의 집 원칙을 고수했다. 남자는 그 집에 얼씬거리지 못할 뿐더러 큰딸만 제외하고 딸들의 연애를 금지시켰다. 막내딸인 J는 늘 대령의 원칙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다시 문이 열리자 그녀 뒤에 대령이 버티고 서있었다.
-아버지, 이 분은 미술 실기 선생님이셔.
대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빈 들판을 바라보는 허수아비처럼 서있었다. 대령은 멍한 내 눈을 보자 안심이 되는 듯 문을 닫았다.
-내 정신 좀 봐. 나 지금 치마 안에 아무것도 안 입었어.
차에 타고 나서 J는 입술을 내 귀에 대고 말했다.
-오늘은 도망치는 탈영병놀이 할거야.
J는 웃었다. 나는 장군의 위수지역으로부터 멀리 달아났다. 불 켜진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북악 언덕 후미진 곳에 주차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녀와 나는 서로를 끌어당겨 안았다. 얼굴과 토르소를 빚는 조소실기 수업인 것처럼. 그러나 거침없는 실기시간은 이내 방해를 받았다
경찰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에게 몸을 더욱 낮췄다. 어서 옷을 입으라고 J가 속삭였다. 나는 뒷자리에서 운전석으로 건너갔다. 서늘한 가을밤이었다. 김이 서린 앞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경찰차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윗도리를 걸치자마자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았다. 내 차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경찰차는 들이받을 기세로 달려와서 멈추었다. 아버지에게 빌린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은 5미터도 못가서 날카로운 브레이크 마찰음을 내고 멈췄다. 바람이 숲을 흔들자 새들이 울며 날아올랐다. 바지를 겨우 골반에 걸친 내게로 경찰 한 명이 다가왔다. 서둘러 바지를 올려 입고 차문을 열고 내리자 젊은 경찰관은 신원확인을 요청했다.
-여기는 범죄 발생 지역이라 조심해야 합니다. 어제도 옆 동네에 강도사건이 일어났으니까. 뒤에 계신 분도 신분증 주세요.
-신분증이 없어요.
웃옷을 미처 여미지 못한 J는 브래지어를 쥔 두 손으로 앞가슴을 가린 채 경찰관이 시선을 다른 곳에 주기를 애원하는 눈빛으로 서있었다. 그녀는 절뚝이며 걸었다. J는 오른쪽 하이힐만 신고 있었다. (왼쪽 하이힐은 J가 집에 간 후 앞좌석 밑에서 찾아냈다.) 기울어진 상체는 걸음을 옮길 때 흔들렸다. 결국 J는 최선책을 썼다. 장군님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상황파악을 끝낸 장군은 서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경찰관은 상황을 종료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장군이 그 다음 내게 무슨 짓을 할지 은근히 걱정되었다.
심사숙고한 결과 나는 용감해지기로 했다. 이 상황에서 잠깐 몸을 피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나는 검정색 하이힐과 도망 중이다.

작 성 자 : 권순옥 margo@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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