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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소설 - 얼음공주

권순옥
  • 입력 2016.01.04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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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공주

I는 15센티미터가 넘는 흰색 킬 힐을 신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백화점 명품관이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겨울 저녁이었다. 기상학자에 따르면 조만간 지구에는 소빙하기가 도래할 가능성이 있다. 지구온난화로 북극과 남극 빙하가 녹기 때문에 해수면이 급상승하고 있다. 그 여파로 극지와 저위도 지역 기후 사이에 불균형이 커지고, 고위도 지역의 기온이 크게 하락할 수 있다는 다큐멘터리가 이를 증언하였다. 어디까지나 다큐멘터리일 뿐 현재 진행형이 아닐 수도 있었다. 기상예보는 늘 불신을 사기 마련이었다. 나는 이런 말세적 이야기에는 관심을 가질 형편이 못되는 소시민일 뿐이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삶이 아니던가. 빙하가 녹아 홍수가 나면 배를 타고 다니지 뭐, 나는 심드렁해하였다.
당장 오늘 닥친 강추위는 어쩌란 말이냐. 게다가 여자 친구 하나 없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그제까지 멀쩡하게 흐르던 강물이 얼어붙고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렸다. 아무리 추워도 먹고 살자면 일을 해야 했다.
명색이 배고픈 예술을 하자니 변변한 아르바이트조차 없었다. 간신히 백화점 주차담당 알바를 구했다. 경광등을 들고 차량을 빈자리로 안내하는 일이었다. 벨 보이 재킷에 긴 코트를 입고 수신호를 하며 주차를 기다리는 차들을 통제하는 신호기 역할이었다. 쇼 윈도우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백화점 지하 주차장이어서 일까. 유니폼을 입은 내가 두더지처럼 느껴졌다.
한 달을 못 넘기고 기침이 쏟아졌다. 어린 시절 기흉을 앓은 폐가 하루 종일 자동차 배기가스를 들이마시자 배겨내지 못한 거였다. 결국 나는 팀장에게 사정을 말했고, 임시직 보안요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전기를 들고 매장 구역을 돌며 고객들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처리하는 일이었다. 절도범 감시와 야간 출입 통제는 내 적성에 맞았다. 경찰이나 경호원이 된 기분이랄까.
I는 해외 유명 명품을 고객 품에 안기는 소위 잘나가는 세일즈 매니저였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함께 보낼 여자 친구가 간절했던 나는 백화점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퇴자를 맞을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에 키가 크고 늘씬한 I와 오색 트리가 휘황찬란한 거리를 걸었다. I는 나보다 한 뼘 정도 높이 올려다보였다. 나는 멋진 람보르기니 포스터를 받은 아이처럼 기분이 좋았다. 다만 그녀는 늘 냉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몇 차례 만남이 이어졌다. 우리가 처음 사랑을 나눈 다음에도 I는 거의 미동조차 없이 죽은 듯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얼어붙은 나무토막에 불을 붙이는 꼴이랄까. 분위기를 바꾸려고 농담을 던져도 그녀는 냉담하게 반응했다. 침대에 누운 그녀의 몸은 너무 길었다. 아무리 팔을 뻗어도 그녀의 엉덩이를 만질 수가 없었다. I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내가 I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거지? 나는 의문이 들었다. 이 자식아, 침대가 아닌 심판대에 누워서 뭐하는 짓이냐, 나는 독백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야, 너 내가 작아서 이러는 거야? 싫으면 싫다고 솔직히 말해.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 말았다.
-자기가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그녀는 자신이 무감각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건 큰 문제가 아니지.
나는 I의 얼어버린 몸을 녹이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달려들었다. 그녀는 녹는 척하다가 이내 빙하처럼 굳어졌다.
창밖에는 만년설이 내리고 있었다.

작 성 자 : 권순옥 margo@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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