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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호 칼럼]고르비와 미 국무성

김평호
  • 입력 2022.09.0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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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대통령 사망. 91세. 미소 냉전 체제 종식의 주역, 그 공로로 노벨 평화상 수상. 그는 그즈음 ‘이제 냉전의 바람이 지나고 희망의 바람이 불어온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제2의 냉전이 시작되었으니, 불과 35년 여, 한 세대 만에 그의 기대는 섣부른 것이 되고 말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하나의 실마리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상당부분 망가졌다는 점이다. 망가진 부분의 대표 중 하나가 국무성이다. state department. 이름만으론 뭐하는 곳인지 얼핏 감이 오지 않지만 외교부다. 본래 이름도 외교부였었다. 맡은 임무도 그래서 ‘외교’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국무성은 외교기관이 아니라 국제 갈등조성 기관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국무성은 갈등 기획자, 국방성은 현장 해결사 정도로 나눠 부를 수 있을 만큼... 

2011년 오바마 시절, 국무장관 클린턴이 국방장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저지른 리비아 폭격과 정권교체 사태가 대표적 경우다. 오바마는 후에 그것을 자신의 임기 중 가장 큰 외교실책이라 말했었다. 사실 미국이 만들어낸 국제적 갈등의—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사회적—목록은 끝이 없다. 2019년 카터 전 대통령은 ‘세계 역사상 미국만큼 호전적인 국가는 없다. 250여년 역사 중 평화로웠던 시기는 고작 16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했다.  

그런 국무성이지만 레이건 시절, 미국의 국무성과 G. 슐츠 장관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잘 알다시피 레이건은 소련을 일러 ‘악마의 제국 evil empire’이라 부른 사람이다. 그런 레이건이 악마의 제국과 힘을 합했고, 냉전 경쟁체제를 끝내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것은 레이건 개인의 의식화(?)--소련과의 관계를 포함, 군사대결과 핵무기 문제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다.  

핵무기의 가공할 위기와 그에 대한 문명적 공포로 요약되는 그 의식화의 배경에는 세 가지 정도의 직접적 계기가 있었다. 1. 1983년 소련의 KAL기 격추사건. 2. NATO군과 바르샤바 조약군 사이의 핵전쟁과 그 이후의 대재앙을 그린 1983년 영화 ‘The Day After.’ 3. 그해의 대규모 나토군사 훈련에 대한 소련의 강경한 반응. 지신의 임기 중 벌어진 이 사안들에 대해, 레이건은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고 대재앙으로 이어지며, 무엇보다 특히 그런 종류의 군사훈련을 미국은 훈련이라고 주장하지만, 소련은 훈련이 아니라 미국의 실제적 침략위협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그 때 처음으로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레이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국무장관 G. 슐츠. 레이건 8년 임기 내내 함께 한 슐츠 장관은 소련과의 대화와 외교를 가장 중시했고, 레이건 역시 그를 적극적으로 신임했다. 그는 CIA를 비롯, 군 정보기관과 국방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83년 레이건 대통령과 당시 주미 소련대사인 A. 도브리닌 간의 면담을 성사시켰다. 그 자리가 말하자면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그리고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체제를 해소하는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슐츠는 그렇게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의 정상회담, 그에 이은 냉전 체제 종식과 관련  미국을 실무적으로 이끈 인물이다. 레이건은 나아가 제3세계 국가에서 벌어지는 갈등도 실은 미국과 소련의 대결 때문에 빚어지는 경우가 많다면서 미-소 관계를 푸는 것이 가지는 국제적 중요성에 대해 언급할 정도까지 되었다. 

그런 변화가 냉전체제 종식의 큰 걸음을 내딛는 토대가 되었다. 말할 나위 없이 레이건 시대 역시 남미와 중동에 관한 한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최악의 시기였다. 그러나 냉전 종식이라는 세계사적 업적이 고르바초프 소련의 주체적 노력과 함께, 역량 있는 미국 국무장관의 노력과 그를 경청한 대통령에서 비롯된 것임은 틀림없다. 

신보수주의와 네오콘이 득세하면서 그런 국무성의 시대는 간듯하다. 이제 국무성은 국제 갈등 조성부처로 오히려 국방부보다 더 강경한 조직이 된 양상이다. 그렇게 미국은 상당히 망가졌고 그것이 오늘날 미국 스스로는 물론 세계를 괴롭히는 큰 원인 중 하나다. 

 

2004년 레이건 사망, 2021 슐츠 사망, 그리고 2022년 고르비 사망. 한 시대가 이렇게 흘러간다.(사진 : 양국 정상 첫 회담. 1985 제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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