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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49재 행사, '김지하가 이룬 것과 남긴 것'

권용
  • 입력 2022.06.2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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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이자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염무웅 이사장이 '시인 김지하와의 작별'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염 평론가는 27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김지하 시인의 49재 행사에 대한 소식을 전하며 김 시인에 대한 추도문 '수난과 구도의 삶을 기억하며'를 보완하여 올렸다며 장문의 글을 소개했다.

추도문은 '김지하가 이룬 것과 남긴 것'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염 평론가는 김 시인의 사회활동 시작이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서였고, 시인으로 등단한 것은 1969년 월간지 '시인'을 통해서였다."고 전하며 군사독재 탄압에 맞서 싸우며 겪어야 했던 7년여의 감옥살이, 이 고난의 시간을 통해 획기적인 문학적 업적 산출과 다양한 방면의 학습과 사색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생명 사상'을 구상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김 시인이 민주적 열망을 대표하는 투시로 각인되는 동안 시 자체는 충분한 비평적 조명을 받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21세기들어 김 시인의 정치적 행로가 투사로서 기존 이미지와 달라져 논의 자체가 중단되어 많은 대중들에게 외면 받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 시인은 지난 반세기 한국 역사를 깊이 있게 설명하자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다. 그의 고난에 찬 삶의 과정과 그로부터 태어난 예술적•사상적 결과물이 우리 현대사 자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이자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염무웅 이사장이 '시인 김지하와의 작별'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사진=나무위키 갈무리)

 

염 평론가는 1960년대 중엽 김 시인을 처음 알게 됐을 때 그가 자신에게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나는 박정희 정권의 대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며 궐기한 학생운동 속의 모습이라고 소개했다. 염 평론가가 1964년 봄 학교를 갓 졸업하고 출판사 편집부에서 일을 할 때, 근무가 끝나면 친구들을 만나러 동숭동 농성현장을 찾았는데 "그때 김지하의 쉰 듯한 목소리가 뿜어내는 뜨거움을 부끄럽지만 나는 외곽에서 바라보았을 뿐이다."라고 묘사했다. 이에 염 평론가 자신은 당시 학생운동의 주역들이 외친 민족문제의 심각성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고백도 남겼다.

다른 하나는 미학이론가로서의 김지하라고 밝혔다. 염 평론가는 1964년 5월쯤, 을지로 5가 뒷골목 어느 술집에서 열린 시화전을 통해 김 시인의 시를 처음 접했다고 전했다. 당시 김 시인의 시 뿐만 아니라 대부분 시들이 우리나라 시적 관습에서 벗어난 낯설고 실험적인 것들이었는데 김 시인 본인은 자신이 슈르(초현실주의) 풍의 모더니즘 계열 시를 썼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그 후 김 시인의 박종홍 교수가 철학개론을 강의하던 문리대 대형강의실에서 김 시인의 논문발표를 듣게 됐다고 말했다. 제목은 '추(醜)의 미학'이라는 칸트와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미학 바깥을 더듬는 내용으로 염 평론가에게 낯설뿐더러 적잖은 충격이었다고 회상했다. 김 시인의 후일 고백에 따르면 "그 발표는 헤겔의 제자인 19세기 독일 철학자 칼 로젠크란츠(Johann Karl Friedrich Rosenkranz, 1805~79)의 저서 <추의 미학>(Ästhetik des Häßlichen, 1853)에 근거한 것"으로 "정말 주목할 것은 그가 로젠크란츠라는 서구학자의 이론을 수용하되 단순히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라고 전했다. 김 시인이 "로젠크란츠의 미학을 발판 삼아 우리 고유의 전통예술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이론적 확장을 시도"하고 있었다며, "‘추의 미학’이라는 똑같은 이름으로 로젠크란츠가 서구 근대미학의 몰락의 징후를 보았다면 김지하는 잠들어 있던 한국 전통미학의 새로운 회생 가능성을 읽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염 평론가는 김 시인이 "1960년대 중엽부터 서구 모더니즘에 여전히 한발 담그고 있으면서도 주로 조동일(趙東一) 학형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탈춤이나 풍물 또는 민요나 판소리 같은 우리의 전통예술의 중요성에 눈을 떴고 이용희(李用熙, 1917~1997) 교수의 회화사 연구에 자극받아 조선 후기의 풍속화와 실경산수(實景山水)를 주목"했다고 말했다. 김 시인의 '추의 미학'이 "초현실주의 같은 모더니즘 서구예술로부터 우리 자신의 민족•민중미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론적 초석을 놓는 작업"이라고도 덧붙였다.

염 평론가는 그때부터 김 시인과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고 말했다. 김 시인이 폐결핵으로 요양차 입원했던 역촌동 병원에서 몇 번 갔었고, 특히 김 시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소설가 오영수 선생 댁을 여러 번 동행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1970년은 김 시인 개인에게나 한국시의 역사에서 특별한 해라고 소개했다. 5월에는 담시 '오적'이 문단과 정치·사회를 강타했고 연말에는 시집 '황토'가 출간되어 시단을 흔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선배시인 김수영이 모더니즘에 기대어 자신의 시학(詩學)을 천명한 논문 '풍자냐 자살이냐'가 발표, '농무' 시인 신경림의 문단 복귀,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도 이때였다고 말했다. 또한 이때는 "1960년대 말 김수영•신동엽이 잇달아 세상을 떠난 데 이은 김지하의 눈부신 등장과 신경림•이성부•조태일 등의 새로운 활약은 우리 사회와 문학 내부에서 거대한 전환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움직일 수 없는 신호"였다며 김지하는 시집 '황토' 후기에서 "이 작은 반도는 원귀(怨鬼)들의 아우성으로 가득차 있다. 외침, 전쟁, 폭정, 반란, 악질(惡疾)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숱한 인간들의 곡성으로 가득차 있다. 그 소리의 매체, 그 한(恨)의 전달자, 그 역사적 비극의 예리한 의식. 나는 나의 시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왔다. 강신(降神)의 시로."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염 평론가는 위에 표명된 시인으로 "여기 표명된 시인으로서의 강렬한 사명감이 전통예술인 판소리의 형식을 빌어 표현된 작품이 담시 '오적'"인데 "사실 이 작품은 그 정치적 파장과 사회적 폭발력 때문에 미학적 성취나 시사적(詩史的) 의의가 충실하게 검토되지 못했다."며 김 시인 자신도 그 점을 아쉬워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시인이 “이 작품을 단순한 현실풍자로만 보아넘기는 것은 피상적 판단에 그치기 쉽다. 도리어 그러한 생생한 풍자를 유기적으로 자기 내부에 용해시킨 시형식적 달성이야말로 한국시의 앞날을 밝게 한다.”(동아일보 1970.5.30.)"고 말했다고 밝혔다.

염 평론가는 이를 두고 "단순한 암시에 불과한 촌평"이라 평가했는데, '오적'이 당대 지배계층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강력한 풍자적 비판임은 명백하나 이는 시에 드러난 부분일 뿐이라고 말했다. "근본적인 것은 양자의 생생하고도 유기적인 결합, 즉 박물관에 전시된 박제품 상태의 판소리 형식을 현실비판의 살아 있는 무기로 힘차게 살려낸 사실"로 이것이야말로 김 시인 고유의 진정한 성취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판소리의 현대화는 김지하가 평생에 걸쳐 수행한 여러 고뇌 어린 예술적•이념적 및 실천적 탐색의 일부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며 "김윤수•오윤 등과 함께 시작한 새로운 현실주의 미술운동이 오늘날 한국 미술의 주류의 위치에 올라섰음은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국문학자 조동일의 이론적 지도와 창작자 김지하의 실천적 노력이 결합된 결과로 새로운 현실적 생명력을 얻은 마당극, 마당굿, 탈춤, 풍물, 민요 등의 광범한 민중•민족연행은 알다시피 대학가를 중심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이후 이와 같은 방식의 민중문화운동은 운동권의 활동방식 자체를 바꾸기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사회가 변화면 문화도 달라지지만 1970년대 이후 30년 동안 한국에서는 반대로 문화가 사회의 변화를 선도했다고 말하면서, 그 선두에 선 것이 바로 김 시인이었고, 정치투쟁이 아닌 민중•민족문화운동이 사회변화에 앞장서고 의식혁명을 이끌 거라는 주장이 김 시인의 오랜 신념이었다는 것이다.

 

염 평론가는 "그러나 김지하가 불붙인 새로운 문화운동이 대학가를 거쳐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는 동안 그 자신은 불행히도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며 김 시인이 1980년 12월 석방 뒤에도 집 앞 감시가 계속되고 고문과 감금 후유증으로 병고에 시달려야 했다고 말했다.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번뇌가 그 무렵에 나를 사로잡고 놓지 않았다"는 김 시인의 고백을 언급하며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음을 밝혔다.

이어 김 시인이 학창 시절 술을 좋아해 왕소금에 깡소주를 마시는 일화도 소개했다. 출옥 후 고통을 잊기 위해 심하게 술에 의존하게 된 일, 1980년대 엄 평론가가 사는 대구집에 자면서 소줏잔을 들고 담론을 그치지 않는 김 시인이 버거웠다는 이야기도 꺼내놓았다.

그러면서 "고백건대 당시에 나는 그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며 술에 의존하며 고통받는 김 시인의 회고록 일부를 소개했다.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번뇌가 그 무렵에 나를 사로잡고 놓지 않았다. 밤은 밤대로 끝없는 착종(錯綜)과 불면의 밤이었고, 낮은 낮대로 공연히 들뜨는 환상과 흥분의 나날이었다. 눈만 뜨면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것 같이 좌불안석. 오라는 곳도 많고 갈 곳도 많은 그런 날들이었다. 때론 소음이 음성으로 바뀌어 들리기도 하고, 때론 대낮 천장 위에서 핏빛 댓이파리들의 무서운 춤을 보기도 했다. 번뇌였다.” (김지하 회고록, <흰 그늘의 길 3> 55쪽)

염 평론가는 "오늘 나는 40여 년 지난날을 돌아보며 한없이 아픈 마음으로 시집 <화개(花開)>((2002)에 실린 그의 시 <횔덜린>을 읽는다."며 시를 낭송한 뒤, 휠덜린의 시를 잃고 김 시인을 떠올린다고 고백했다.

 

이어 1980년 김 시인 석방 이후 30여 년 동안 정신착란의 질곡에 유폐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극도의 고통 자체가 김 시인 특유의 도전적 감성을 자극해 번뇌와 방황 속에서 수많은 시와 산문들로 나타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헌신적 투쟁의 이미지로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1980년대 이후의 김지하, 특히 1991년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이후의 김지하는 점점 실망스러운 존재일지 몰랐다."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책들을 읽어보면 그는 젊은 날부터의 수많은 지적•현실적 자극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이를 자기 나름으로 종합하고 극복하여 김지하 고유의 사상적 화엄의 통일체, 그 자신의 용어로 ‘움직이는 무(無)’의 상태에 이르고자 했음이 분명"하다며, "회고록 곳곳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군사정권과의 목숨을 건 투쟁은 그의 ‘적극적 선택’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김 시인을 옹호했다.

 

염 평론가는 "그의 회고록은 태어난 땅 전라도의 역사와 자신의 핏속을 흐르는 동학의 기억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며 구한말 동학에 참여했던 김 시인의 증조부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다.

 

또 김 시인의 일생에 걸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무위당 장일순이라고 소개했다. 장일순이 일찍이 몽양 여운형의 추종자이며 이후 윤길중의 동지로서 혁신계 정당활동을 하다가 5·16으로 3년간의 옥살이 후 카톨릭에 입교하여 지학순 주교와 카톨릭에 기반한 '원주 캠프'를 이끈이라고 전했다. 김 시인은 장일순에 대해 “선생의 사상은 단적으로 말해 좌우의 통합이었고 영성과 과학의 통전이었으며 동서양과 남북의 통일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며 김 시인이 장일순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전했다.

 

이어 김 시인이 내심으로 좋아한 시인은 정지용과 이용악이라고 말했다. 염 평론가는 정지용 시인에 대해 "정지용은 지하와 체질적으로 매우 다르다. 정지용도 가톨릭이고 모더니스트의 훈련을 받아 새로운 감각의 시를 썼으면서도 '고향'이나 '향수'에서 보듯 민족정서를 능숙하게 노래했지만, 그는 무엇보다 언어의 조각가로서 이미지의 표현이 뛰어나다. 단아하고 성찰적"이라고 말하며 반면 김 시인의 시는 역동적이고 음악적이며 자유분방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젊은 날 김 시인에게 본능적 공감을 불러일으킨 시인은 이용악이라고 말했다. 김 시인이 염 평론가에게 시집 '오랑캐꽃'을 여러번 암송하고 격찬한 적이 있다며 "식민지 시절 헐벗은 유랑민중의 구슬픈 자화상을 우울한 가락에 실어 노래한 이용악이야말로 김지하의 내면에 깊은 공명을 일으켰던 것 같다."고 전했다.

 

염 평론가는 "근대시의 맥락 속에서 김지하의 문학사적 위상을 냉정하게 검토하자면 임화(林和, 1908~53), 김수영(金洙暎, 1921~68), 김남주(金南柱, 1945~93)의 흐름 가운데 그를 세워볼 필요가 있다."며 틀림없이 김 시인 고유의 업적과 문제가 있을 것으로 앞으로의 숙제라고도 말했다.

 

이어 2003년에 간행된 회고록 '흰 그늘의 길' 머리말에 김 시인의 “나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는 고백을 언급하며, "이것은 그가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부인한 것이 결코 아니다."고 말한다. 김 시인이 평생에 걸친 자유분방한 언행들, 발표한 수많은 문장들은 그가 특정한 사상이나 이념의 추종자가 아니었음을 웅변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 시인이 "우리 시대의 위기와 혼란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누구보다 큰소리로 문명전환을 주장한다"며 " 서구세력이 이끌어온 오늘의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아버지 세대의 사회주의 혁명으로는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확언"했다고 설명했다.

 

염 평론가는 "생애의 마지막 10여 년에 보인 그의 정치적 행보가 아쉽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며 김 시인에 대한 비난과 외면의 일정한 타당성을 부인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병고에 시달리던 노년의 김지하가 타인의 비판 안에 들어 있는 합리적 핵심을 붙잡아 자신의 인간적 성숙을 위한 거름으로 삼을 힘을 이제는 잃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며 "이 점 김지하를 사랑했던 동료와 후배들을 한없이 가슴 아프게 한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생각건대 김지하는 미지의 존재이다."며 김 시인의 80년 생애와 그가 남긴 방대한 저작들이 아직 제대로 검토 연구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울러 "그러나 오늘 필요한 것은 그의 삶과 죽음 모두를 끌어안는 포용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김 시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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