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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으로 코로나 이기기

김정은 전문 기자
  • 입력 2022.05.10 16:19
  • 수정 2022.05.31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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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 관용인가 포기인가?

 

 코로나가 끝나 간다. 아니 끝났음 좋겠다. 정확히는 코로나19, 코로나는 왕관 모양이란 뜻으로 감기 바이러스에 많다. 일반적으론 문제되지 않지만 사스나 메르스나 이번처럼 치명적일 때 위험하다.
 역병을 물리친 처용가를 번역하면서 그처럼 우리도 물리치고 일상을 되찾았으면 하는 마음과 고전 시도 해외로 뻗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향가를 선택했다.
 향가는 신라시대부터 고려 초중기까지 내려오는 문학이다. 한자에 한글 발음을 더한 복합구성이다. 뜻이 명확한 한자는 내용에 해당하고 뜻 없는 한자는 한글 발음이다.
 전해오는 향가 수는 많지 않으나 《삼국유사》에 14수, 고려 승려 균여가 지은 《균여전》에 11수, 장절공신선생실기에 1수로 총 26수가 남아있다. 양주동이 1944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모든 향가에 대한 주해서인 《고가연구》를 발표했다.
 향가는 4구체, 8구체, 10구체로 발전했다. 4행, 8행, 10행으로 보면 된다. 그래서 4구체인 헌화가나 서동요가 8구체인 처용가보다 먼저고 10구체인 제망매가가 나중 나온 걸로 본다.
 제망매가는 위망매영재가로도 부르며 월명사가 동생의 죽음을 애도한 시다. 우리도 국민누이 영화배우 강수연을 잃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석가탄신일도 얼마 전에 지났는데 부처에 대한 기원으로 코로나도 이겨내길 바란다. 

    
處容歌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兮隱吾下於叱古            
二兮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처용가

동경 밝은 달에          
밤새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보니           
가랑이 넷이러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건가 
본디 내 것이나
뺏긴 것을 어찌하리

Cheoyong Song

Seorabol, under bright moon
playing all night,
I come and look at bed;                 
there is four legs.
Two is my wife's;
two other is?            
She is mine;                            
just all right.             

 모든 향가는 원문을 보고 필자가 시 구조에 맞게 현대어로 고쳤다. 마지막 구절 뺏긴 것을 어찌하리를 그대로 영번역할 수 있지만 영번역에서 보면 all night과 all right을 라임처럼 맞추려 선택했다. 
 동경은 서라벌이며 두 다리는 한 신체라 단수로 했고 외국 시인의 영시도 we is처럼 우리는 하나다 의미로 단수로 하기도 한다.
 원래 내 것이지만으로 바로 번역하면 위에 둘은 누구 것인가? 내 것이다라는 답처럼 돼서 의미와 간결성을 염두해 번역했다.
 이 시는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 왕이 울산으로 놀러갔는데 안개가 피어 길을 잃어 동해 용에게 절을 지어주라고 명하자 용이 안개를 거두었다. 용이 절을 하사한 것에 고마워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을 찬양하는 춤을 주고 왕은 용의 아들인 처용을 대신으로 삼았다. 처용의 아내를 역신이 범했고 처용의 관용에 처용 그림이 있는 곳엔 전염병이 돌지 않는다는 설화가 있다. 
 또한 신라는 아랍과 활발히 무역했고 9세기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가 쓴 ‘왕국과 도로 총람’에 ‘중국의 맨 끝 맞은편에 산이 많고 왕들이 사는 곳이 있는데 바로 신라다. 신라는 금이 많이 나고 기후와 환경이 좋다. 그래서 많은 이슬람교도가 신라에 정착했다.’는 자료로 보아 처용이 아랍인이란 말도 맞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빼앗겼으니 할 수 없다는 관용이 아니라 이민자의 체념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수민으로서 신라에 살던 아랍인들이 자기 주장을 하지 못하고 아내를 뺏겨도 참고 살았던 건 아닐까?                      
 예전에 몽골 여성이 공장에서 일하다 다쳐서 입원한 걸 봤는데 부부가 몽골에서 다 대학원까지 나왔다. 돈 벌러 한국 와서 손을 조금 다쳤는데 공장장이 따라와서 입원을 도와주고 병원비를 다 내주는 걸 보고 감동한 적 있다. 산업재해로 외면 당하는 외국인들도 많은데 우리나라를 도와주는 그들을 외면하면 안 된다. 편견없이 공존하자.

祭亡妹歌

生死路隱
此矣有阿米次肸伊遣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隱枝良出古 
去如隱處毛冬乎丁
阿也 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제망매가

죽고 사는 길이                     
여기 있어 두려워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질 잎처럼
같은 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 모르겠구나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는                  
도 닦으며 기다리겠다

Elegy of Dead Dister

Afraid that to be or not to be                  
is here,                                                        
without saying "I go"                                
you went?
By early fall wind                                 
like leaves falling here and there
we were born on same tree;             
I don't know where you go.
Ah, I who meet you in Pure Land     
will wait for you, seeking truth.                                           

 고 이어령 교수는 생사로를 산스크리트어 samsaro(윤회)를 음차한 거라 하지만 동생의 죽음에 대한 시에 철학적 윤회 사상을 넣지는 않았을 거다. 슬픔에 빠져있는데 이성적일 수 없다. 
 같은 나무에서 떨어질 잎같은 서정적인 묘사를 한 거 보면 감정이 담겨 썼을 텐데 어려운 불교 사상을 굳이 시에 넣을 건 없다.
 이 시는 신라 경덕왕 때 월명사가 동생을 위해 지었는데 재를 올릴 때 불렀더니 노잣돈으로 준 종이 돈이 바람에 날려 서방극락세계 방향으로 사라졌다.
 제와 재는 다르다. 제는 유교 개념으로 음식을 죽은 사람에게 올리는 거고 재는 불교 개념으로 가르침으로 공덕을 쌓는 거다. 음식을 준 후 가르침을 준다는 의미로 음식을 올리기도 한다. 
 월명사 도솔가조에 “월명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부처에게 공양하는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라고 하여 '위망매영재가 (爲亡妹營齋歌)'라고도 부른다.
 월드스타 강수연이 영면했다. 스타라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혼자 외롭게 이불 뒤집어 쓰고 영화 본다라던 예전 말이 기억난다. 최초 월드스타로 부담감, 책임감으로 사셨을 텐데 하늘나라에선 외롭거나 힘들지 않게 지내시길 바란다.   
 어릴 때 할머니가 항상 독경을 틀어놓고 나무아미타불을 다 외워 따라하기도 했다. 나를 데리고 절에도 많이 가셨는데 어느 날은 바느질을 하시다 운다. 왜 우냐 했더니 어릴 때 죽은 두 삼촌이 생각나서라 한다. 
 아직도 기억이 나냐고 했더니 그럼, 우리 아들들이 얼마나 예뻤는데 하신다. 평생을 그 자식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셨던 우리 할머니. 이제는 그 아들들과 극락에서 편히 쉬시겠지. 가족이 해체되서 형제도 남인 세상에 이런 좋은 향가가 널리 보급되서 인성이 돌아오면 좋겠다. 

懺悔業障歌

顚倒逸耶
菩提向焉道乙迷波
造將來臥乎隱惡寸隱
法界餘音玉只出隱伊音叱如支
惡寸習落臥乎隱三業
淨戒叱主留卜以支乃遣只
今日部頓部叱懺悔
十方叱佛體閼遣只賜立
落句 衆生界盡我懺盡
來際永良造物捨齊

참회업장가

잘못된 생각에      
지혜 향한 길 잃어                              
지은 모짐           
법계에 넘쳐    
악습의 삼업    
속죄하는   
오늘 참회        
온 세상 부처 아시길                         
아아, 중생계 다하면 참회도 다하니     
내세 내내 잘못을 버리네

Penitence Song                   
 
By wrong thinking           
I'm lost for wisdom,        
my evil overflows                               
realm of Buddhism.
Atoning for karma of body, 
word and thinking as bad habit
today, my penitence                       
may all world Buddha knows.          
Ah, if world is over, penitence is over;
In next life, I throw away my fault always.                                                                      

 이 시는 고려 초 광종 때 균여대사가 지은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열한 수 중 네 번째 노래로 업보를 참회한다는 내용이다. 마지막 부분 죽으면 참회도 끝나니 더 많은 참회를 해야해서 내세에 태어나도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버리겠다는 의미다. 
 업장은 불도의 수행과 선행을 막는 세 가지 장애 중 하나로 태어나기 전 세상에서 지은 죄로 인해 현 세상에서 장애가 생기는 것인데 굳이 번역하면 제목이 길어져서 생략했다.
 원래 불교에는 환생이 없다. 힌두교 교리인데 불교와 융합하면서 불교에도 환생 개념이 생겼다. 한 두번 참회로 되는 게 아니다. 동물로 태어나지 않으려면 수많은 환생 속에 수많은 참회를 해야한다. 그래야 극락세계로 태어난다. 극락도 많은 환생 속에 마지막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바로 가는 게 아니다.
 전도를 엎어지고 넘어지다로 번역하는 건 틀렸다. 불교에서 전도란 번뇌로 잘못된 생각을 갖거나 현실을 잘못 이해하는 일이다. 불교 용어다. 삼업은 몸이나 말과 생각으로 습관처럼 짓는 세가지 업이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남에게 많이 하는 행동이다. 좋은 업을 지어야 한다. 
 번역을 외국인이 보기에 흥미 생기게 셰익스피어 문구를 넣기도 하고 현대적으로 해보았다. 가벼운 느낌이 있지만 신세대도 와 닿게 노력했다.
 처용가가 고려가요로도 만들어졌는데 고려가요에는 신라 향가의 마지막 두 행은 없다. 
삼국유사 기록에 신라 사람들이 환생을 믿어 법이 필요없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살았고 환생 설화도 많았다고 한다. 미국같은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기부도 많이 하고 사기꾼도 많지 않고 신용 사회다. 종교가 주는 이득이다.
 칸트도 도덕을 위해 신을 요청했다. 설화든 종교든 철학이든 착한 사회가 되서 나쁜 행동들을 바로잡고 하지 않고 덕을 쌓는 사회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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