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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영웅 리더십] 반초(하)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4.1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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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제이(以夷制夷)’로 서역 경략

 

반초는 서역으로 가는 길목의 소륵국·우전국 등을 우군으로 만들어 그들의 군사를 마름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건초 3년(서기 78년) 소륵국과 우전국의 병사들을 징발하여 인근에 있는 고묵국(姑墨國)의 석성(石城)을 쳐서 승리로 이끌었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는’ 이른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법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법으로 자신감을 얻자, 반초는 마침내 황제에게 서역의 여러 나라를 평정하려고 하니 군사를 보내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후한의 황제 장제는 흔쾌히 그의 청을 받아들여 1천이 넘는 사형수들을 지원병으로 차출하여 보냈다.

사형수 출신 지원병들이 서역으로 오기 전에, 당시 사차국은 후한을 배반하고 흉노 세력과 연합전선을 펴서 주변의 소국들을 위협하였다. 또한 반초가 이이제이로 제압한 소륵국의 일부 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마침내 후한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반초는 그들을 이끌고 가서 소륵국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사형수들로 이루어진 지원군은 죽기 살기로 싸우는 병사들이었고, 어떻게 해서든 공을 세워 죄를 씻고 재기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싸움에 임할 때는 저마다 남다른 각오가 서 있었으므로, 반초는 그 심리를 이용하여 소륵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역도들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었다.

이제 반초는 구자국을 공격할 예정으로 있었는데, 그 나라의 군대가 워낙 강해 자신의 휘하 군대만 가지고는 제압하기 쉽지 않았다. 그는 일단 오손국(烏孫國)부터 공략한 후 구자국을 치기 위해 사자를 보내 장제에게 조서를 올렸다. 오손국과의 관계를 회복한 뒤 협력하여 구자국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협공할 수 있는 군대가 필요하다는 요청이었다.

장제는 반초의 의견이 옳다 여겨 위후(衛侯) 이읍(李邑)을 서역으로 출동시켰다. 이읍이 군사를 이끌고 우전국에 도착했을 때, 구자국은 소륵국을 공격하고 있었다. 구자국의 군세 때문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게 된 이읍은 장안의 장제에게 상서를 올렸다. 반초를 돕기 위해 출동했지만, 그는 꾀를 내어 군사를 되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읍의 상서 내용은 반초를 비난하는 글로, 그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서역을 평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야심찬 일이라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반초도 이곳 현지에서 처자식과 지내는 재미에 빠져 나라 생각도 접은 채 하세월하고 있습니다.’

반초는 이읍을 괘씸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예 그는 처자식을 장안으로 보내 살게 하여 자신의 서역 공략 뜻이 굳건함을 보여주었다.

장제도 반초를 믿었다. 그래서 이읍을 질책하여 계속 서역으로 진군해 반초를 도우라는 황명을 내렸다.

결국 이읍은 반초를 만나 자신의 잘못을 사죄하였다. 반초는 오손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잡힌 인질을 묶어 이읍으로 하여금 장안으로 호송토록 하였다.

다음해인 원화 원년(서기 84년)에 반초는 소륵국의 군사들로 하여금 사차국을 공격케 하였다. 사차국은 몰래 소륵국왕 충에게 뇌물을 바쳐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다. 이때 소륵국왕 충은 후한을 배신하고 회군하여 서쪽의 오즉성(烏卽城)에 들어가 반초의 군대가 공격할 것에 대비하였다.

결국 반초는 사차국 공격을 멈추고 소륵국왕 충을 공격했다. 그러나 소륵구왕 충은 강거국(康居國)에 지원군을 요청했고, 이에 강거국은 정예병을 보내 반초의 군대를 쳤다. 앞뒤로 적을 맞은 반초는 반년 가까이 지나도록 오즉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강거국은 월지국과 왕족끼리의 통혼관계로 엮여져 있었다. 반초는 월지국에 후한 선물을 보내 강거국으로 하여금 오손국에서 군사를 철수시키게 만들었다. 강거국의 군대가 철수하자 오즉성은 곧 함락되었다.

그런데도 소륵왕 충은 반초에게 항복하는 모양을 취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배반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는 반초가 완전히 소륵국을 자신이 영향권 안에 묶어놓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장화 2년(서기 88년), 소륵국왕 충은 구자국과 짜고 반초에게 투항서를 보냈다. 반초를 속이기 위한 모략이었다.

그동안 소륵국왕 충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한 반초는 그것이 거짓 투항서임을 알아차리고, 일단 받아들이는 척하며 환영의 뜻으로 그를 초청하였다. 충은 자신의 거짓 투항서가 제대로 먹혀들었다고 생각한 후 일단 초청에 응하여 경무장 기병 일부만 이끌고 반초의 군영으로 갔다.

이때 반초는 소륵국왕 충에게 연회를 베푸는 한편, 그 주변에 자신의 군대를 매복시켰다. 주흥이 무르익을 즈음, 반초가 미리 약속한 신호를 보내자 매복했던 군사들이 일제히 사방에서 튀어나와 소륵국왕 충과 그를 보호하던 경기병들을 가차 없이 살육하였다.

그동안 소륵국은 반초가 서역으로 가는 길을 여는 데 있어서 계륵(鷄肋) 같은 존재였었다. 흉노와 친한 구자국과 후한 사이에서 이쪽저쪽 눈치를 보면서, 어찌됐든 소륵국은 끝까지 면죄부를 얻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초는 충을 제거함으로써 소륵국을 완전히 굴복시켜 마침내 후한의 장안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길을 열게 되었다.

하지만 겨우 숨통 트일 만큼 길이 열렸을 뿐, 아직도 서역으로 가는 대장정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그 노선 상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어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소륵국을 완전히 평정한 뒤 반초는 2만5천여 병력을 동원하여 사차국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흉노와 친연관계에 있는 구자국은 5만의 군사를 보내 사차국을 지원하였다.

이렇게 되자 반초의 군대로서는 중과부적이라 정면대결이 불가능했다. 그는 상대의 허를 찌른 뒤 후퇴하고, 뜻하지 않은 곳에서 출몰하여 일격을 가하는 등 허장성세 전법을 구사하였다. 또한 전투에서 붙잡은 포로들에게 아군의 가짜 군사 정보를 알려줘 도망치게 만들었다. 이처럼 적으로 하여금 오판하도록 하는 치밀한 작전을 통하여, 반초는 자신의 적은 군사를 활용해 배 이상 많은 적군과 싸웠다. 결국 사차국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후한에 투항하였다.

월지국은 타림 분지 지역에서 동서 무역을 독점하던 종족인데, 흉노에게 쫓겨 서쪽으로 간 후 스스로 ‘대월지’라 칭하였다. 그들이 도망간 서쪽 당이 더 크고 기름졌던 것이다.

아무튼 사차국을 제압한 반초는 다음 차례로 월지국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월지국은 한때 반초로부터 선물을 받고 오손국을 도우러 갔던 강거국의 군대를 물러가게 만든 일이 있어, 여전히 오만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전한 시대에 오손국으로 한무제의 딸 유세군(劉細君: 오손공주)을 시집보낸 일이 있었는데, 월지국은 그 사례를 거론하며 반초에게 후한의 공주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반초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러자 월지국왕은 수치스럽고 분하게 생각하여 7만의 군사를 일으켜 반초의 군대를 공격해왔다. 반초는 일순 당황하였다. 적군이 무려 세 배나 되는 병력이었으므로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월지국 병사들은 대군이지만 사막의 길을 원정하면서 매우 지쳐 있다. 보급부대를 동원하기 어려우므로 곧 군량미도 떨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군영을 굳게 지키면 적은 열흘 안에 굴복하게 돼 있다.”

반초는 공격보다 방어를 택하여 철저하게 진영을 지켰다. 그러는 한편 월지국 군대가 군량미 부족으로 구자국에 지원을 요청할 것에 대비하여 그 길목에 군사를 매복시켜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열흘을 넘기자 월지국은 구자국에 군량미 지원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때 길목에 매복해 있던 반초의 후한군은 그 사자 일행을 모조리 처단하여, 그 목을 월지국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월지국의 군기를 저하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구자국의 군량미 지원을 기다리던 월지국 군대는 절망하였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군사들은 싸울 기력조차 잃어버렸다. 이때를 틈타  반초의 군대가 기습을 감행하여 서쪽으로 밀어붙였고, 그 기세를 이용하여 아예 월지국 본토까지 평정해버렸다.

반초의 월지국 평정은 흉노 세력과 가까운 관계인 구자국에게도 위기로 인식되었다. 결국 영원 3년(서기 91년)에 구자국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반초의 군대에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의 소국들이 모두 후한에 굴복하여 반초의 지휘를 받고 있었으므로, 아무리 흉노 세력과 친하다고 하지만 사방에서 호시탐탐 노리는 적들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때 후한 황제는 반초를 서역도호(西域都護)에 임명하였다. 마침내 그는 서역의 남북을 총괄하여 지키는 수장이 된 것이다. 이제 서역에서 반초에게 평정되지 않은 나라는 언기국(焉耆國: 카라샤르)을 위시하여 위수(危須)·위리(尉梨) 등 위성국들 일부였다.

마침내 반초는 영원 6년(서기 94년)에 선선·구자 등지에서 징집한 7만 여 군사를 이끌고 언기국 토벌에 나섰다. 그는 공격하기에 앞서 먼저 사자를 언기에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다. 이때 언기왕은 항복하는 대신 협상의지를 담은 서찰을 자국의 사자에게 들려 보내왔는데, 반초의 수하들은 괘씸죄를 물어 사자를 죽여 버리자고 했다. 그러나 반초는 그 반대로 언기국 사자에게 큰 상을 내려 돌려보냈다.

반초가 군대를 이끌고 국경에 이르자, 언기왕은 갈대에 불을 질러 후한군이 변경을 침범하는 걸 허락지 않았다. 그러자 반초는 급히 날랜 군사를 뽑아 지름길로 언기성 20여 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위협을 가하도록 하였다. 언기왕은 성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반초는 언기왕이 군사들을 이끌고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거처를 수소문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기왕의 수하 중 한 명이 반초에게 와서 그 사실을 누설하였다. 이때 반초는 사실을 누설한 수하를 죽이고, 오히려 언기왕에게 황제가 후한 선물을 보냈으니 하산하여 상을 받으라고 하였다. 언기국의 위성국인 위리와 위수의 두 왕에게도 사자를 보내 후한의 황제가 선물을 보냈다며 같이 상을 받으러 오라고 전하였다.   

이때 언기왕과 위리왕은 반초를 찾아왔으나, 의심이 많았던 위수왕은 오지 않았다. 위리국의 국상도 반초의 심상치 않은 기미를 눈치 채고 어디론가 도망쳐버렸다.

반초는 언기왕과 위리왕을 위해 연회를 열었는데, 한창 주연이 진행될 무렵 휘하 군사들을 시켜 두 왕을 따라온 연회 참가자들을 모두 척살하였다. 그런 연후 언기국을 위시하여 세 나라를 동시에 파죽지세로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반초는 서역 50여 개국으로 하여금 후한 조정에 귀의토록 하였다. 그 공을 인정하여 영원 7년(서기 95년) 화제는 그를 ‘정원후(定遠侯)’에 봉했다.

 

반초는 서역으로 가는 길목의 소륵국·우전국 등을 우군으로 만들어 그들의 군사를 마름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사진=위키백과 갈무리)

 

 

■ 실크로드의 역사

 

흉노 세력과 서역 제국들

 

흉노는 단일 씨족이 아니라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과 주변 부족들을 총 망라한 포괄적인 의미의 유목민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사적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가 역사무대에 처음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221년) 말엽이다. 기마술과 궁술에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흉노(匈奴)’라는 어원은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흉(匈)’은 ‘훈(Hun)’을 음사한 것인데, 퉁구스어로는 ‘훈’은 ‘사람’이란 뜻이다. ‘노(奴)’는 한자에서 비칭으로 쓰는 ‘종’이나 ‘노예’를 말한다. 중국에서 ‘흉노’라고 부른 것은 ‘오랑캐’의 일종으로 취급하여 그들을 한껏 낮춰서 보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흉노를 귀방(鬼方), 험윤(獫狁), 융(戎), 적(狄) 등으로 불렀다. 이러한 호칭 모두 귀신이나 짐승 등을 빗대어 낮춰 부른 것인데, 중국에서는 그렇게 홀대를 할 만큼 흉노 세력이 사납고 껄끄러운 대상이었다.

흉노의 종족적 구분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은데, 지금은 대체적으로 투르크(突厥)족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중국의 서북방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면서, 호시탐탐 중원을 노려 노략질을 일삼아 진시황은 장군 몽염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축조케 했을 정도로 그 세력이 대단하였다.

한(漢)나라 때 고조 유방은 30만 보병군단을 이끌고 평성(平城: 다퉁) 지역으로 흉노를 치러간 적이 있었다. 그때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군에게 포위되어 전멸 위기에 처하였는데, 유방이 흉노 선우의 아내에게 뇌물을 주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한나라는 기원전 198년 흉노와 형제화약(兄弟和約)까지 맺었다.

이와 같이 한나라와의 화친을 계기로 흉노는 마음 놓고 서북 지역의 부족들을 아우르는 정복사업을 단행하였다. 지금의 투르키스탄 북부 지역에 있던 강국인 월지(月氏)와 오손 등을 병합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서역과 초원 지역의 대부분 족속들이 흉노에게 복속되었다. 기원전 176년 흉노 선우 묵돌(冒頓: 모돈)은 당시 한나라 문제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월지를 격파하고 누란(樓蘭)·오손·호게(呼揭) 등 20여 개국을 완전히 평정하였다고 자랑하였다.

그 후 한무제는 흉노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고, 수차례에 걸친 대규모 정벌전 끝에 기원전 57년 동·서 흉노로 갈라지게 만들었다. 그 이후 동흉노는 한나라에 투항하였고, 서흉노는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정령(丁零)·오갈(烏擖)·강거(康居)·대원(大宛: 페르가나)·대하(大夏: 박트리아) 등 서역 제국을 공략하여, 시르다리야강 중류에 이르렀다. 그리고 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에 있는 견곤(堅昆)을 수도로 한 새로운 흉노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서흉노는 이란·아프가니스탄·인도 등 동서 유럽 제국을 겁박하였으며, 그들은 마침내 투르키스스탄 일원에 투르크계 종족들의 정착지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후한(後漢) 시대에 와서 흉노제국은 다시 북흉노와 남흉노로 양분되었다. 남흉노가 후한에 투항하면서 북흉노와 대립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다. 후한의 흉노 정벌이 가열되면서 알타이산에서 북흉노의 잔여부대가 괴멸되어, 그 주력부대가 이리(伊犁)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10만 여 부락에 달했던 북흉노 세력은 원래 흉노 고토였던 지역에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선비(鮮卑)에게 병합되었다.

한편 후한에 투항하여 칭신(稱臣)을 자청했던 남흉노는 후한의 8개 변방군에 편입되었는데, 점차 친흉노 집단을 규합해 마침내 반란을 시도하였다. 이에 후한은 남흉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5개 주로 재분할하여 변방에 편입시켜 각 부족 세력의 단합을 막았다. 결국 남흉노도 216년 멸망하였다.

흉노의 역사는 약 400여 년간으로 잡을 수 있는데, 동아시아의 서북방 지대에서 유목민으로 활동하면서 중국의 진(秦)·한(漢) 제국과 때론 전쟁을 때론 화친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대립관계를 유지해왔다. 흉노가 최강의 세력을 유지했던 묵돌선우 시대에는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로 연변에 있는 거의 모든 족속들을 복속시켰을 정도였다. 동으로는 한반도 북부에서부터, 북으로는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웨수수이(渭水)와 티베트고원까지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기원전 1세기 경 서흉노가 서역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세력을 강화한 이후부터 기원후 4세기 유럽에서 훈족이 출현할 때까지 약 400년간 흉노 세력은 초원로를 중심으로 한 유라시아 북부지대를 주름잡았다. 유럽의 훈족도 아시아의 흉노에서 연유한다는 설과 훈제국을 세운 아틸라가 북흉노 선우의 후예라는 설이 대두된 것도, 그 무렵 흉노 세력이 서역의 주인공 노릇을 하였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도체가 미래의 먹거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일찍이 감지한 사람은 당시 동양방송의 이건희 상무였다.(사진=나무위키 갈무리)

 

■ 경쟁심리를 이용한 놀라운 연구 성과

 

삼성전자의 64KD램 반도체 개발 이야기

 

반초가 실크로드상의 흉노를 견제하면서 서역 제국들을 후한에 굴복하도록 만들 수 있었던 주효한 전략이 ‘이이제이(夷以制夷)’다. 즉 ‘오랑캐로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것인데, 그 이면에는 묘한 경쟁심리를 부추기는 전략이숨어 있다. 서역 제국들은 대개 그만그만한 세력이라 큰 힘을 과시하는 흉노에게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서역을 공략하러 갔을 때 반초의 휘하에는 그다지 군사들이 많지 않았다. 적은 군사로 어떻게 서역 제국들을 후한에게 복속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나온 것이 ‘이이제이 전략’이다. 고만고만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서역 제국들로 하여금 경쟁심리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어 서로 싸우게 함으로써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렇게 서역 제국끼리 싸울 때 반초는 후한군을 이용하여 어느 한쪽을 지원함으로써 결정적으로 한 제국이 이기도록 만들어 우군으로 삼았다. 이렇게 차례차례 공략하여 반초는 서역의 50여 개국을 후한에 복속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기업의 경영에서도 경쟁심리를 작동시키는 전략이 주효하게 활용된다. 삼성전자가 반도체를 처음 개발할 때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연구원들의 경쟁심리를 제대로 활용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도체가 미래의 먹거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일찍이 감지한 사람은 당시 동양방송의 이건희 상무였다.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동양방송이 KBS2로 전환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당시 동양방송의 경영을 맡고 있던 이건희 상무는 삼성전자 경영진들을 만나 부천에 있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삼성전자 경영진들은 모두들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백색가전으로 국내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올려 잘나가고 있던 삼성전자로서는 부도위기에 처한 한국반도체를 인수할 의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건희 상무는 부친 이병철 회장을 찾아가 반드시 삼성전자가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이병철 회장조차 반도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었으므로 그 건의를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이건희 상무는 자신의 삼성 주식을 다 팔아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였다. 거의 부도 직전에 있던 회사였으므로 처음 인수한 직후에는 경영하는데 많은 애로가 뒤따랐다. 그래도 앞으로 반도체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는 끝까지 버텨나갔다.

1982년 2월, 이병철 회장이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명예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게 돼 있었다. 당시 한국반도체를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부로 만들면서 삼성전자 경영진이 된 이건희 부회장은 자원하여 부친을 모시고 갔다.

학위 수여식이 끝난 후 이건희 부회장은 이병철 회장에게 미리 약속해 놓았으니 미국 반도체 공장을 둘러보자고 제안하였다. 아들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 샌프란시스코와 시카고 등지에 있는 IBM·GE·HP 등의 반도체 생산라인을 돌아본 이병철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늦었다. 늦었어!”

이병철 회장의 이와 같은 탄식은, 한국도 진즉부터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어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나온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병철 회장은 일본 도쿄에 있는 오쿠라호텔에 가서 반도체에 대한 새로운 사업 구상에 몰두했다. 이른바 이것이 ‘동경구상’이었다.

“반도체는 나의 마지막 사업이자, 앞으로 삼성의 대들보가 될 것입니다.”

일본에서 동경구상을 마치고 귀국한 이병철 회장이 삼성그룹 경영진들 앞에서 터뜨린 일성이었다.

이렇게 되자 이건희 부회장은 삼성전자 반도체 개발팀의 책임자로 발탁되어 본격적인 사업 전개에 나섰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는 이건희 부회장이 부도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만든 것이므로, 그는 당연히 반도체 개발의 최적임자였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개발을 하겠다고 대외적으로 사업 구상을 밝혔을 때, 기존의 반도체 선진국인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코웃음을 쳤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걸음마 수준에 불과한 삼성전자가 64KD램 개발에 착수하겠다고 공언하자,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기도 했다.

이때 이건희 부회장은 반도체 개발을 위한 연구팀으로 투톱 체제를 갖추기로 했다. 우선 미국의 반도체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맨투맨 작전을 펼치기로 하고, 미국 현지법인 트라이스타의 연구원으로 32명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현지 미국 반도체 회사에서 근무 경력을 쌓은 반도체 전문가들이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삼성전자에 입사한 지 4~5년쯤 되는 과장급 중 머리가 우수한 사원 32명을 뽑아 미국으로 연수를 보냈다. 즉 미국 현지의 반도체 전문가로 구성된 연구원 32명에게 각각 국내 삼성전자 연구원 32명을 붙여 1대 1로 기술을 전수받도록 한 것이다. 미국 연구원들이 선생이 되고 국내에서 간 연구원들이 제자가 되어 강행군을 하는 일종의 도제생활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연수기간 1년이 지난 후, 이건희 부회장은 미국 연구원과 국내 연구원 두 팀에게 공동 주제를 주어 반도체를 개발하도록 했다. 이때 먼저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여 반도체를 개발한 팀에게는 거액의 인센티브를 제공한다고 약속해 스승과 제자 두 팀으로 하여금 경쟁의식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었다.

결과는 국내에 있는 제자팀이 승리를 하였다. 10~15년 반도체를 연구한 베테랑급 경력을 가진 미국의 스승팀보다 불과 1년의 연수를 마친 제자팀이 한 발 앞서 64KD램 반도체를 개발하였던 것이다.

이건희 부회장은 투톱 체제의 연구가 큰 성과를 거두자, 바로 다음에도 미국 스승팀과 국내 제자팀을 상대로 다음 과제로 새로운 반도체 개발을 하도록 했다. 이번에는 미국 스승팀의 승리였다. 먼저 제자들에게 진 것이 억울해 스승팀도 밤을 새워 연구에 잠심몰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 자존심을 극복하면서 크게 인센티브를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삼성전자는 R&D 분야에 다른 기업보다 배 이상의 과감한 투자를 한다. 연구원들 간에 경쟁심리를 부추겨 늘 빠른 제품 개발에 성공하는 것이다. 특히 반도체의 경우 업그레이드된 제품이 출시되면 기존 제품은 반값으로 뚝 떨어진다고 한다. 대만의 전자회사들도 일찍부터 반도체 기술을 반전시켜 왔는데, 항상 삼성전자에 한 단계 밀려 손해를 본다. 제품 개발의 경쟁에서 뒤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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