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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동맹제-2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3.28 11:25
  • 수정 2022.03.2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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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륜성왕

 

편전에서 물러나왔을 때 석정은 마치 하늘에서 은가루를 뿌리듯 부서져 내리는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궁궐의 기와지붕 위에 떠 있는 하늘은 쪽빛 바다처럼 푸르렀다. 거기, 바다 위에 떠 있는 흰 돛배처럼 구름 몇 조각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날씨는 평화롭구나!’

석정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면서 다른 한편으론 긴 한숨이 터져 나오는 걸 숨길 수가 없었다. 

‘과연 평화의 세상은 언제 올 것인가?’

너무도 아득하다는 생각이 석정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개마깃발장식, 개마총(鎧馬塚) 널방 천장고임 부분(모사도)

 

작금의 고구려는 풍전등화(風前燈火)와도 같았다. 이미 백제에게는 고구려가 허약하다는 걸 실전으로 보여준 셈이고, 또한 연나라를 멸망시킨 전진의 부견이 언제 어느 때 고구려 국경을 넘볼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중원의 장강 남쪽에 동진이 있어 함부로 고구려를 탐하기는 어렵겠지만, 화북을 통일한 전진이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동쪽 진출을 꾀할 수 있을 만큼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석정은 대왕 사유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저절로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사님, 태자 전하께서 모시고 오라는 분부십니다.”

태자궁의 내관이 허리를 굽히자, 석정은 하늘에 두었던 눈길을 천천히 거두었다. 

“태자 전하께옵서?” 

“예, 태자궁으로 안내하겠사옵니다.”

내관이 앞장을 섰고, 석정은 두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태자의 거처는 대왕의 편전 뒤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동궁(東宮)이라고도 불렀다. 연못을 끼고 돌아가자 태자궁이 보였다. 연못에는 가을의 푸른 하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물고기들이 수면으로 튀어 오르며 주둥아리로 새털 같은 구름 조각을 자주 건드려대고 있었다. 

때마침 태자는 연못가를 거닐며 물고기들의 유영하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태자 전하! 석정 대사를 모셔왔사옵니다.”

내관의 말에 태자 구부가 돌아섰다. 

“오! 석정 대사, 그동안 고초가 심하셨다 들었소.”

태자 구부가 가까이 다가와 합장을 하는 석정에게 말했다.

“고초라니요? 아니옵니다. 태자 전하 덕분에 모처럼 호강을 누렸사옵니다. 그저 도를 닦는 승려는 잎 떨어진 망초 대궁처럼 비쩍 말라야 제격인데 피둥피둥 살이 올랐으니 심히 부끄럽기 그지없사옵니다. 허허, 헛!”  

그렇게 웃는 석정은 태자의 눈에도 신수가 훤해 보였다. 전에 비렁뱅이 같은 누더기 옷차림과 비교하다 보니, 대왕의 명에 의해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어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보였던 것이다. 전보다 적어도 10년은 더 젊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태자가 문득 물었다. 

“대사께서는 속세 나이로 올해 어떻게 되시오?”

“허허, 헛! 중에게 다 나이를 물으시고? 속세 나이는 잊은 지 오래고,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떠돌다 보니 언제 승적을 얻었는지도 알 수 없나이다. 더구나 파계승이 되어 수염과 머리를 제멋대로 기르고 방탕생활을 한 것이 또한 오래 전 일이니,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나이를 따져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일전에 보았을 때 대사께선 나보다 10년은 연상으로 보였는데, 이제 보니 나와 비슷한 연배 같구려! 여기 이러고 서 있을 게 아니라 들어가십시다. 파계승이라 하시니 곡차로 한 잔 하십시다. 허헛, 흠!”

태자 구부도 말끝에 호쾌한 웃음을 베어 물었다.

태자궁에 들어가 거실에 좌정하자,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던 듯 곧 술과 각종 안주가 차려진 상이 방 한가운데 놓여졌다. 고기 산적부터 산해진미가 안주로 올라와 있었는데, 모두 영양이 풍부한 기름진 것들이었다. 

“중이 못 먹는 것들만 있군요.”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도, 석정은 입맛부터 다셨다.  

“옥고를 치르셨으니, 스님이라 하더라도 기름진 음식으로 보양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대사께선 파계승이니 고기 음식을 마음 놓고 드셔도 무방하지 않겠소이까?”

“저자에서 굶주리는 백성들을 생각하니, 너무 상이 호사스러워 입안으로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사옵니다.” 

석정은 그러면서 힐끗 마주앉은 태자를 바라보았다.

“대사께서 질책을 하시는구려. 실은 나도 소찬 다섯 가지 이상은 상에 올리지 못하게 하나, 오늘만은 특별히 준비하라 일렀소. 대사께서도 몸이 건강해야 백성들 교화에 힘쓸 수 있지 않겠소?”

“하하 핫, 딴은 그렇사옵니다.”

석정도 그런 태자의 속 깊은 마음을 알고, 오늘은 기꺼이 술을 마시고 비릿한 고기도 든든히 먹어두기로 했다. 하기는 기름진 음식을 보니 뱃속에서 얼른 들여보내라고 충동질을 해대는 듯 꼬르륵, 소리까지 나는 것이었다. 

술이 한 순배 돌고 나서 태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백성들 사이에 불도를 닦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소릴 들은 바 있소이다. 허나 과연 불교를 통해 백성들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 지 그것이 의문스럽소. 전진의 부견은 태학을 정비하고 학문을 장려하며, 농경에 힘써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대사는 이 모두가 불교를 통해 백성들을 한마음으로 일치단결하게 만든 덕분이라 생각하시오?” 

태자의 이 같은 말에 석정은 자세를 바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자의 눈빛은 청동거울이라도 꿰뚫을 듯 날카로웠다. 순간 석정은 태자의 눈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았다. 그만큼 그를 바라보는 태자의 눈빛은 뜨거웠다. 

“그보다 먼저 태자 전하께서는 우리 고구려에 불교가 언제부터 들어왔는지 그 내력을 알고 계시옵니까?”

석정 또한 두 눈에서 불길을 뿜어내고 있었다. 활활 탈 듯한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쳐 불꽃을 일으키면서 대화의 열기는 더욱 뜨겁게 달구어지고 있었다.

“아직 들어보지는 못했소.” 

“이미 1백여 년 전에 불교가 고구려에 들어와 민간전승으로 이어져오고 있사옵니다.”

“그렇게나 오래 되었단 말이오?”

“아직 고구려에 사찰은 없지만, 재가불자들의 경우 집안에 불당을 만들어 부처를 모시는 자가 많다고 하옵니다.”

“흐음…….”

태자는 석정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의 일이옵니다. 위(魏)나라 정시(正始) 연간에 아굴마(我掘摩)라는 사신이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녕(高道寧)이라는 고구려 여인과 관계를 한 후 돌아갔는데, 그 여인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굴마는 불교도였던 모양인데, 고도녕은 다섯 살 된 아들을 출가시켰습니다.”

석정은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일을 태자 구부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정시 연간이라면, 우리 고구려는 동천대왕 시절이 아니겠소?”

“맞사옵니다. 중국에선 위․촉․오 삼국의 조조․유비․손권이 자웅을 겨루던 시대를 지나 이미 제갈량도 죽은 이후이옵니다. 고도녕의 아들 이름은 ‘아도(我道)’입니다. 그는 다섯 살에 출가해 고구려 산천을 떠돌다 열다섯 살이 되자 아비를 찾아 위나라로 가서 친부 아굴마를 만났으며, 당시 불법을 강설하던 현창화상(玄彰和尙)의 제자가 되었다 하옵니다. 그러고 나서 4년 후인 열아홉 살 때 귀국하여 고구려에 불법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허나 처음부터 불법을 전하기는 쉽지 않았겠지요. 아도의 어머니 고도녕은 아들에게 다시 신라로 가서 불법을 전하면 후에 그 나라에서 크게 불교가 일어나니, 그곳으로 가라고 일렀다 하옵니다. 아도는 곧 신라로 떠나 서라벌 인근에 자리를 잡았고, 때마침 미추이사금의 딸 성국공주가 병들어 무당과 의원이 아무리 치료를 해도 듣지 않을 때 신통력으로 고쳐주었다 하옵니다. 그러나 신라에서도 불교는 환영을 받지 못해 미추이사금이 절을 지으라고 명했는데도 백성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아도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도는 몰래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문을 닫고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하옵니다.” 

석정은 말을 마치고 잔에 가득 넘치는 술을 단숨에 비워냈다. 

“허허! 실로 재미있는 이야기구려! 허면 우리 고구려나 신라나 모두 백성들이 불교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아니겠소?” 

“세상 이치가 처음에는 낯선 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지요. 거친 황무지에 처음 씨앗을 뿌리는 것은 그처럼 힘든 일이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이 싹을 틔워 무럭무럭 자라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도처에 새로운 씨앗으로 싹을 틔워 황무지를 옥토로 만드는 것이 자연의 이치옵니다.”

“그러하면, 지금 우리 고구려에는 백성들 사이에 불교가 어느 정도 전파되어 있다고 생각하시오?”

태자 구부의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은 석정의 대답을 촉구하고 있었다.

“빈도가 탁발을 하며 백성들의 사는 모습을 두루 살펴본 바로는, 만약 나라에서 불교를 공인해 줄 경우 불길처럼 번져나갈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이미 우리 고구려 백성들 가슴에 불성의 화톳불은 지펴져 있사옵니다.” 

“대사는 불교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태자의 표정은 더욱 진지해져 있었다. 

“불교가 처음 일어선 나라를 천축(天竺)이라 하옵니다. 중원에서 한(漢)나라가 크게 일어날 때 천축에선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왕)이 불교를 숭상하여 나라를 크게 일으켜 주변국을 제압하고 통일제국을 세웠사옵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큰 나라를 세워 평화를 이룩함으로서 아육왕을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일컫기도 했사옵니다.”

“전륜성왕이란 무엇이오?”

“천축의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일·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을 뜻하옵니다.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면 이웃나라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국가가 되어야 하고, 그런 국가에서 덕(德)을 통한 통치력을 발휘하여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전륜성왕 같은 대덕(大德)의 군주가 나와야 하옵니다. 오늘날 부견이 세운 전진을 중화의 중심이라 한다면, 우리 고구려는 동북의 중심이옵니다. 화북을 통일한 전진이 앞으로 강남의 동진을 제압하면, 그 나라에서 중원의 평화를 이룩하는 전륜성왕이 탄생할 것이옵니다. 우리 고구려 역시 서북쪽의 거란, 북쪽의 부여, 동북쪽의 숙신과, 그리고 남쪽의 백제와 신라를 아우르면 저 중원에 버금가는 동북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고구려는 덕의 정치를 이끄는 전륜성왕의 나라로 크게 번창하리라 생각되옵니다. 이처럼 불법으로 평화로운 이상세계를 이룩하는 것을 불국정토(佛國淨土)라 하옵니다.” 

“부견의 세력이 강남의 동진을 제압할 정도로 강하다면 우리 고구려를 넘볼 수도 있지 않겠소?”

“물론이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날랜 호랑이도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어려운 법이옵니다. 먼저 부견은 강남의 동진을 손에 넣어야만 중원을 통일할 수 있사옵니다. 그래서 동북방의 위험 세력인 연나라를 쳐서 먼저 멸망시킨 것이옵니다. 연나라보도 더 동북쪽에 우리 고구려가 있사온데, 저 중원에서 고구려까지 원정군을 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옵니다. 만약 부견이 고구려 원정에 나선다면 강남의 동진이 장강을 건너 화북을 아우름으로써 중원을 통일하려고 들 것이옵니다. 따라서 부견은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고 동진을 치려는 작전을 구사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옵니다. 지금 고구려는 남방의 백제를 경계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신라와 친교를 맺는 것이 중요하옵니다. 그리고 하루 빨리 전진의 부견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저들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로써 나라 기강을 바로잡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정책을 펼쳐야 하옵니다.”

석정은 미리 준비라도 한 듯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토로했다. 

이때 태자 구부는 석정을 두고 전진에서 파견한 보낸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첩자도 때론 이용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석정의 주장을 들어보면 전진은 고구려를 넘볼 의사가 없는 것 같았다. 동진과의 대결구도는 누가 보더라도 팽팽한 관계이므로, 만약 욕심을 내어 고구려를 침공했다가는 앞뒤로 적을 만드는 꼴이 될 것이었다.  

“대사의 고견 잘 들었소이다. 폐하께 주청을 드려 대사를 전진에 사신으로 파견할까 하오.”

태자는 술병을 들어 석정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어느 새 저녁 어스름이 들창에 어른거렸다. 그럴수록 방안에 켜둔 촛불은 더욱 밝아지고, 바야흐로 밤을 향해 달리는 시간의 역주(力走)처럼 술자리 또한 도도하게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취흥은 때로 시간의 흐름을 무색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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