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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동맹제-1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3.2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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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1. 낙타풀

 

수곡성 전투에서 백제군에게 패하고 국내성으로 돌아온 고구려 대왕 사유의 심사는 매우 복잡했다. 두 번이나 백제에게 패하다니, 그런 수모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 욕심이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이번 전투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3만 병력 중 전사자가 3천을 헤아렸고, 백제군에게 포로가 된 고구려 병사도 그와 버금갈 정도였다. 더더구나 농민들 중 차출한 병력의 반 이상은 도망쳐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서 회군할 때의 고구려군은 겨우 절반에 불과했다.

대왕은 오래도록 울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었다. 패자에게도 반드시 교훈이 있었다. 이번 전쟁을 겪으면서 그의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 대왕의 뇌리에 번뜩 스친 것은 괴승 석정의 얼굴이었다. 그는 원정을 떠나기 전에 괴승을 궁궐 감옥에 가둔 사실을 기억해냈다.

‘만약 그 괴승의 말을 들었더라면…….’

후회막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찌할 것인가, 대왕 사유는 지나간 것을 빨리 지워버리고 앞으로의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편전에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뒷짐을 진 채 왔다 갔다 하며 절치부심하던 끝에, 그는 문득 시립해 있는 내관에게 일렀다.   

 

묘주와 ‘왕(王)’ 자 문양 휘장, 감신총(龕神塚) 앞방 서측 감실(모사도)

 

“여봐라! 감옥에 갇혀 있는 석정이란 괴승을 불러오너라.”

“예, 폐하! 분부 받잡겠사옵니다.”

내관이 뒷걸음질로 편전을 나가다가 막 돌아서서 문을 벗어나려고 할 때, 대왕은 그의 등 뒤에 대고 덧붙였다.

“정중히, 예우를 다하도록!”

대왕은 석정을 예사롭지 않은 인물로 보았다. 그는 근엄하게 옥좌에 높이 올라앉아 석정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도,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어 자주 몸을 비틀었다. 좌석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석정은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내관의 안내를 받아 편전으로 들어섰다. 목욕을 시키고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혀 데려오느라 늦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 달여 이상 감옥에 갇혀 있던 수인치고는 멀끔해 보였다.

“석정 대사, 그동안 고생이 많았소이다.”

대왕 사유는 전 같지 않게 석정에게 예우를 차렸다.

“폐하의 은덕으로 몸과 마음이 모처럼 호사를 누렸사옵니다.”

석정은 그러면서 대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호사를 누리다니……?”

대왕은 그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빈도는 원래 동가식서가숙하던 몸이었사옵니다. 인심이 사나워 얻어먹지 못할 때는 굶기를 밥 먹듯이 했는데, 궁궐에서 주는 음식 때 거르는 일 없이 잘 먹고 맘 편히 잠을 잤더니 이렇게 부옇게 살까지 올랐사옵니다.”

듣기에는 빈정거림 같았으나, 이것은 석정의 진심이었다. 모처럼 궁궐 감옥에서 맘 편히 잘 쉬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헛헛, 허! 역시 석정 대사답구려.”

“황공하옵니다.”

“짐이 진작 석정 대사의 도력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소이다. 이번 전쟁을 통해서 대사의 충언이 가슴에 진정으로 와 닿았소. 대사를 감옥에 가둔 것은 내 불찰이었소.”

대왕은 좀처럼 중신들에게도 하지 않던 사과를 석정에게 하고 있었다.

“빈도의 불충을 어찌 갚으오리까?”

“불충이라니, 당치도 않소. 대사의 말을 못 알아들은 짐이 부끄러울 뿐이오.”

“그렇지 않사옵니다. 원정하기에 앞서 빈도가 더욱 강력하게 반대하여 이번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어야만 할 것이었사온데…….”

“지나간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마시오. 이미 저질러진 일, 주워 담을 수 없는 노릇 아니겠소? 그보다 앞으로 이 나라를 어찌 이끌어가야 할지 대사에게 묻고 싶소.”

이것은 대왕 사유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빈도가 중원을 거쳐 저 멀리 서역 가까이까지 간 적이 있었사옵니다. 거친 사막이 펼쳐져 있고, 일 년 내내 찌는 듯한 폭염이 계속되는 열대지방이옵니다. 서역의 상인들이 ‘낙타’라는 짐승의 등에 특산물을 싣고 사막을 건너 중원에 들어와 비단과 바꿔 가는데, 그 짐승이 사막에서 뜯어먹는 가시 많은 풀이 있사옵니다.”

석정은 진지했다.

“허어? 낙타라는 짐승이?”

“낙타는 등에 혹이 나 있습니다. 혹이 봉우리처럼 하나 있는 것을 단봉낙타라 하고, 둘이 있는 것을 쌍봉낙타라 하옵니다. 발굽이 넓적하여 사막의 모래땅을 걷는데 용이할 뿐만 아니라 등에 난 혹이 태양열을 막아주는 양산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웬만한 더위에도 잘 지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낙타를 흔히 ‘사막의 배’라고 하옵니다.”

“사막의 배라? 거 신기한 짐승이구려!”

대왕 사유는 석정의 말에 이끌려 들어갔다.

“사막에는 짐승이 뜯어먹을 마땅한 풀이 없사옵니다. 헌데 소소초(蘇蘇草)라는 가시 많은 풀이 낙타의 먹이로 쓰입니다. 낙타는 허기지고 목이 마르면 그 거친 풀로 배를 채워 생명을 유지하옵니다. 그래서 흔히 소소초를 ‘낙타풀’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낙타는 풀의 억센 가시에 주둥이를 찔려가면서도 허기진 배를 채웁니다. 가시에 찔려 주둥이에 흐르는 피까지 혀로 핥아 먹으며, 주린 속과 갈증을 해소한다고 하옵니다.”

“재미있는 짐승이구려!”

“낙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사실은 그 가시 많은 소소초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옵니다. 사막 같은 열대지방에서는 비가 잘 오지 않사옵니다. 일 년에 몇 번 내리지 않기 때문에 식물들이 잘 자라지 못하옵니다. 그래서 소소초란 식물은 한 번 비가 내리면 그 물을 오래도록 뿌리에 저장했다가 아주 아끼고 아껴가며 줄기로 조금씩 올려 보내 생명력을 유지하옵니다. 땅 위에 나온 소소초의 줄기는 키가 아주 작은데, 뿌리는 그 몇 배 이상 길다고 하옵니다. 다음에 비가 내릴 때까지 땅속에 물을 저장해두려다 보니 생태적으로 그렇게 뿌리가 발달된 것이옵니다.”

“헌데, 왜 짐에게 그 사막의 풀 이야기를 하는 것이오?”

대왕은 낙타가 먹는다는 풀을 비유로 들어 자신에게 무엇인가 말하려는 석정의 의도를 간파했다.

“폐하! 지금 고구려는 사막의 가시 많은 풀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 있사옵니다. 비가 내릴 때 많은 물을 뿌리에 축적해 놓지 않으면 사막의 풀은 말라죽습니다. 지금 고구려는 줄기를 키우기보다는 뿌리에 물을 축적해 놓을 때이옵니다. 사막의 풀이 작달막한 키에 잎도 없이 가시만 있는 것은 내리쬐는 태양열을 적게 받기 위함이옵니다. 만약 사막에 키가 크고 잎이 무성한 식물이 있다면 바람이 불 때 우쭐댈 수는 있으나 곧 고사하고 말 것이옵니다. 지금 고구려는 키를 낮추고 볼품없이 보이도록 하되 뿌리를 튼튼히 하는 사막의 풀처럼 철저히 미래에 대비할 때이옵니다.”

이처럼 말의 흐름이 유장했으나, 정작 석정은 마른 침을 삼켰다. 목이 마른 것은 순전히 긴장한 탓이었다.   

“흐음……. 짐이 너무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우쭐댔다는 것이로군!”

대왕은 침통한 표정으로 석정을 직시했다.

“폐하! 사막의 풀을 예로 들었을 뿐, 빈도는 폐하를 두고 드린 말씀이 아니옵니다.”

“그만하면 알아들었소이다. 헌데, 대사! 앞으로 어찌하면 이 나라를 백잔 같은 무리들이 넘보지 못할 강국으로 만들 수 있겠소?”

대왕 사유는 옥좌를 앞으로 끌어당기기라도 할 듯이 몸을 석정 가까이 들이대며 물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한 마디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이 아니겠사옵니까?”

“사막의 가시 많은 풀처럼 뿌리를 튼실하게 해야 한다, 이 말이오?”

“사막의 풀에게 있어서 가시는 적으로 하여금 함부로 덤비지 못하게 하는 무기이기도 하옵니다. 그래서 낙타가 입을 대고 먹으려고 하자 가차 없이 가시로 찌르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군대를 기르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이오나, 다른 나라를 치기 전에 우선 방어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급한 것이 나라의 재정비이옵니다. 장유(長幼)에는 예의를 갖춘 서열이 있어야 하고, 군신(君臣) 간에는 신의를 바탕으로 한 위계가 서야 하옵니다. 거기에 백성들이 두루 풍요를 누리며 평안해야 나라가 안정되지 않겠사옵니까? 또한 학문을 익혀 인재를 배양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길이옵니다.”

석정의 눈은 한밤중 어둠 저쪽에서 빛나는 짐승의 그것처럼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대사가 믿는 그 불교라는 것은 어떤 종교요?”

대왕 사유는 이제 석정의 말을 신뢰하는 눈빛을 보냈다.

“만백성이 태평성대를 이루는 길이옵니다.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쟁을 없애야 하고, 한 나라의 군주는 덕으로 정치를 해야 하옵니다. 덕은 불심으로 대덕(大德)의 경지에 이르게 되며, 그 불심이 만백성의 마음에 가닿아야만 태평한 세상이 열립니다. 부처님께서 그런 세상을 열어주실 것이옵니다.”

“우리 고구려는 하늘의 백성이오. 하느님과 대사가 말하는 부처님은 어떻게 다르오?”

“크게 다르지 않사옵니다. 다만 하느님은 높으신 분이지만 백성을 계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우매한 백성을 계도하여 하늘에 이르는 길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사옵니다. 우리 고구려 백성은 곰도 믿고 호랑이도 믿지만,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러한 모든 것을 한마음으로 통합하여 국가의 기틀을 굳건히 하는 ‘불국정토(佛國淨土)’의 세계를 열어줄 것이옵니다.”

석정의 말은 활달하고 거침없었다.

“대사께선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겠소? 이웃나라가 쳐들어오면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맞서 싸워야 하지 않겠소?”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당연히 맞서 싸워야지요. 전쟁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 산적이 나그네의 봇짐을 터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나그네가 강해지면 산적이 감히 덤비지 못하지요. 따라서 외침을 막으려면 나라가 부강해지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우선 어느 나라도 감히 넘보지 못할 강한 나라를 만들고, 주변 나라에 부처님의 마음과 같은 덕을 베푼다면 불국정토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옵니다.”

“그러하면, 지금 우리 고구려에선 당장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왕도정치를 하려면 왕권이 바로 서야 하옵니다. 강력한 왕권이 서야 백성들을 한마음으로 모을 수 있는데, 지금 고구려는 그 왕권이 흔들릴 위기에 처해 있사옵니다.”

석정은 그러면서 대왕 사유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왕권이 흔들릴 위기라니?”

“태자 전하에게 후사가 없사옵니다. 이는 훗날 왕권을 두고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 혼란스러워질 우려가 있으니, 그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석정이 근심하는 바를 대왕 사유도 모르지 않았다. 태자 구부는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아직 자식을 생산하지 못했다. 그동안 태자비 이외에도 여러 궁녀를 태자의 후비로 삼았으나, 그 누구에게서도 소식이 없었다. 아무래도 태자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태자 다음에는 이련 왕자가 있질 않소? 우리 고구려는 산상대왕 이후 장자계승 원칙을 고수하려고 했소. 그러나 이미 그 전부터 형제계승도 해왔으므로, 형이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도 큰 흠은 아니라 생각하오.”

“폐하! 이련 왕자 다음은 어찌하시려고 하시는지요?”

“흐음! 그야 앞으로 이련 왕자에게 후사가 생길 것이 아니겠소?”

“바로 그 말씀이옵니다. 이련 왕자의 혼사가 시급한 문제이옵니다. 하루 속히 왕손을 보셔야만 신하들이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옵니다. 왕계를 튼튼히 하는 것이 시급하다 함은 국론 분열을 막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옵니다.”

석정의 말에 대왕은 백제와의 패전 이후 모처럼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감돌았다.

“대사! 참으로 짐이 고민하던 바를 명쾌하게 해결해 주었소. 짐도 바로 이련 왕자의 혼사를 고민하던 중이었소.”

대왕은 한참동안이나 고개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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