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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순풍과 역풍-8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3.16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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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묘주부인과 휘장 장식, 안악3호분(安岳三號墳) 서쪽 곁방 남벽(모사도), 한성백제박물관

 

8. 삶과 죽음 사이

 

수곡성 앞 너른 들판에서는 백제군과 고구려군의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백제의 복병이 고구려 중군을 추격하여 수곡성 앞까지 왔을 때, 성안에 있던 고구려 선봉대장 연수는 급히 군사를 끌고 중군을 돕기 위해 출전했다.

이렇게 되자 백제군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는데, 수곡성 안에서 느닷없이 불길을 치솟자 고구려군은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길이 솟는 것을 신호로 성 밖의 동편과 서편에 숨어 있던 백제군들이 동시에 수곡성을 들이쳤던 것이다. 성 안에 머물고 있던 백제 잔류 병력이 불을 지르고 성문을 여는 바람에 수곡성은 순식간에 주인이 뒤바뀌었다.

선봉대장 연수가 고구려 중군을 돕기 위해 출전하면서 성 안에 경비 병력으로 남겨두었던 고구려군은 백제군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갑자기 건초와 군량미를 쌓아둔 창고에서 불길이 치솟자 성을 경비하는 병력까지도 불을 끄는 데 투입되었다. 이때 백제군은 그 허점을 노려 불시에 성을 공략했던 것이다.

한편 전날 패하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제 장군 막고해가 이끄는 8천에 이르는 백제군은 도하작전을 펴서 강둑을 넘어 수곡성 앞 들판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는 패하를 건너 도주한 후 곧바로 치양성에서 5천의 군사를 지원받아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고해가 이끄는 8천의 백제군이 수곡성을 탈환한 후 다시 고구려 선봉부대를 추격하자, 고구려군은 졸지에 앞뒤로 적을 두고 싸우는 불리한 입장에 처했다.

“장군! 패하를 건너갔던 막고해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고구려 선봉군의 2진으로 막고해의 백제군에게 수곡성을 내주고 뒤늦게 들판으로 나온 두충은, 급히 장군 연수에게 달려가 보고를 했다.    

“막고해에게 속았다! 걸구금척과 두충 두 장수는 군사 5천을 각기 나누어 이끌고 가서 배후의 백제 원군을 치시오.”

결국 연수는 수곡성을 공격할 때 선봉에 섰던 말갈군과 두충이 이끄는 동부군사, 그리고 거기에 3천의 병력을 더 주어 막고해의 백제군을 막게 했다.

연수는 일단 급한 대로 대왕 사유의 안전을 도모해야 했으므로, 걸구금척과 두충에게 떼어준 군사를 뺀 나머지 군사 7천을 이끌고 협공에 나섰다. 그러나 고구려 중군은 기습을 당해 기가 꺾인 상태인데다, 오합지졸의 농민군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기에 바빴으므로 전세는 이미 백제군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었다. 전쟁은 기세의 싸움이었다. 고구려 중군과 선봉군이 협공으로 백제군을 공격하기는 했지만,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는 백제군을 당할 수는 없었다.

한편 막고해가 이끄는 백제군과 맞서기 위해 군사를 되돌린 말갈족장 걸구금척과 동부의 장수 두충은 고구려군 5천으로 백제군 8천을 상대해야만 했다. 군사의 머릿수로는 중과부적이었지만, 두 장수의 용맹은 백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걸구금척은 장창을 사용했고, 두충은 쌍칼을 잘 썼다.

“적장 막고해는 어디 있느냐? 나하고 한 번 붙어보자!”

걸구금척이 장창을 휘두르며 백제군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의 창이 번쩍일 때마다 백제 군사들은 비명 소리 한 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두충도 쌍칼을 휘두르며 백제군 무리 속으로 말을 달렸다. 마치 배가 달릴 때 물살이 좌우로 갈라지듯 백제군은 그렇게 양편으로 흩어졌다.

용맹한 두 장수의 싸움에 용기를 얻은 고구려군은 그 뒤를 따라 백제군을 공격해 짓쳐들어 갔다. 이렇게 되자 막고해가 이끄는 백제군도 한동안 어지러워졌다.

그런데 한창 쌍칼을 휘두르던 두충은 백제군의 무리 속에서 사기를 발견했다. 그는 백제 군복을 입고 있었다.

“아니? 너는 사기가 아니더냐?”

두충이 말 위에서 소리쳤다. 그는 사기를 발견하자 눈이 뒤집혔다. 금세 사태 파악이 되었다. 사기는 백제 밀정이었고, 자신의 곁에 머물면서 군사 기밀을 빼내 달아난 것이었다.    

“아앗! 두충이다! 저 벌레 같은 놈에게 들키다니!”

사기는 말 머리를 돌려 꽁지 빠지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너, 이놈! 네놈이 백잔의 밀정인 줄 몰랐구나. 가만두지 않겠다.”

두충은 사기의 뒤를 쫓아 말을 달렸다. 어금니에서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그는 이를 갈아붙였다. 사기가 고구려군의 정보를 알려주는 바람에 백제군들에게 크게 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뒤늦은 깨달음이 그의 가슴을 쓰리게 했다. 그런 뼈저린 후회는 복수의 칼날을 세우게 만들었다.

“사람 살려요! 저 벌레 같은 두충이 사람 잡네!”

똥줄이 타서 도망치면서도 사기는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럴수록 두충은 더욱 바짝 약이 올랐다.

“네, 이놈! 사기야! 내 오늘 너를 잡아 간을 도려내 씹어 먹고야 말겠다.”

두충은 눈이 뒤집혀 보이는 게 없었다. 좌우에서 달려드는 백제군이 있었지만, 그가 휘두르는 쌍칼에 모두 도륙을 당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앞을 향해 말을 달리면서 거의 느낌으로만 좌우에서 다가드는 적의 그림자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때마다 칼을 맞고 쓰러지는 적의 비명이 말 뒤편으로 바람소리처럼 밀려났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두충은 자신의 뒤를 따르던 고구려 군사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백제군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쫓기던 사기는 백제군의 무리 속으로 감쪽같이 몸을 숨겼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이!”

백제군에게 포위된 것을 안 두충은 뒷골이 써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적진에 너무 깊이 들어와 있었고, 도망칠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이러한 사태를 알아차렸을 때, 이미 백제 장수 두 명이 두충을 향해 칼을 겨누며 접근해왔다. 그 뒤로 백제군들이 두세 겹으로 퇴로를 막고 있어 그는 졸지에 백제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두충은 주춤주춤 뒤로 밀려났다. 그러는 사이 백제군 중 어느 하나가 창을 날려 말의 엉덩이를 찔렀다. 그 순간 말이 펄쩍 공중으로 뛰어올랐고, 그 바람에 그는 땅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달려드는 백제군에게 칼을 휘둘렀다.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공격하려던 백제군이 주춤하는 사이, 두충은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백제군은 포위망을 점점 더 좁혀오고 있었다. 열려 있는 공간은 패하 쪽이었는데, 그의 뒤는 바로 절벽이라 도망칠 곳이 더 이상 없었다.

“고구려 장수는 도망칠 생각 말고 항복하라.”

백제 장수 하나가 소리쳤다.

그때 백제군의 무리 속에 숨어 있던 사기가 앞으로 나서며 고자질을 했다.

“저놈은 고구려 동부의 장수 두충이란 자이올시다. 살려둬서는 안 됩니다. 성질이 사나운 데다 특히 쌍칼을 잘 쓰는데, 살려두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네가 어찌 저 자를 잘 아느냐?”

백제 장수가 여유를 갖고 물었다.

“소인은 태자 전하와 막고해 장군이 고구려에 보낸 밀정이었사온데, 저 자 밑에서 말구종 노릇을 하며 정보를 빼냈습니다요.”

“흠, 네가 바로 사기로구나?”

“네, 맞습니다요. 저 자를 살려두면 소인은 언젠가 저 쌍칼에 도륙당해 죽을 것입니다요.”

사기는 자신의 목에 손을 갖다 대며 죽는 시늉까지 했다.

“사기야, 이놈아! 네가 그렇게 배신을 할 줄 몰랐구나.”

두충의 목에서는 피를 토하는 듯한 소리가 울컥거리며 솟아올랐다. 이젠 마지막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그는 문득 동부욕살 하대곤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넨 이번 전쟁터에서 죽어야 하네. 두충이란 인간은 완전히 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거야. 그리고 전쟁이 끝났을 때 자넨 조환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일세.’

하대곤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전쟁터에서 죽으라는 하대곤의 말은 ‘두충’을 버리고 ‘조환’으로 새롭게 태어나라는 것인데, 이제야말로 진짜 죽게 생긴 것이었다.

‘지금 죽으면 안 돼! 아, 그런데 이제 죽을 수밖에 없구나!’

촌음을 다투는 시각에 두충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몹시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한 갈등이 그의 마음을 더욱 허약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런 위급한 상황일수록 마음이 강해져야 한다고 다시금 자신을 채찍질했다.

“자, 누구든 덤벼라! 내 오늘 반드시 저 사기라는 놈의 간사한 혓바닥을 도려내고 말리라.”

두충의 이러한 외침을 듣고서 잔뜩 겁을 집어먹은 사기는 어느 사이 백제군의 무리 속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죽기로 싸우겠다는 것이로군! 네가 말을 버렸으니 나도 말에서 내려 싸우겠다.”

백제 장수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사실 그는 말을 타고 두충과 상대하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두충 바로 뒤는 절벽이므로 자칫 하면 말을 탄 채로 패하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말고삐를 뒤에 있는 백제 군사에게 넘겼다.

두충은 곧 백제 장수와 맞섰다. 쌍칼의 명수인 그는 백제 장수 하나를 상대하는 것쯤은 가볍게 생각했다.

서너 합을 치를 때 벌써 백제 장수가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백제 장수 하나가 역시 말에서 뛰어내려 쌍칼을 든 두충을 공격했다. 두충이 쌍칼을 들었으므로 칼은 2대 2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2대 1로 두충이 불리한 상황이었다.

백제의 두 장수는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가며, 점차 두충을 절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번뜩 하대곤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두충을 버리고 조환으로 다시 태어나라.’

두충은 그 말의 의미를 ‘하나는 버리고 다른 하나는 살리라’는 뜻으로 재해석했다.

‘그래 한 팔을 내주겠다. 그러나 다른 한 팔은 살려야 한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외친 두충은 왼팔을 번쩍 들어 적장을 향해 뻗으며 헛손질을 하듯 일부러 허점을 보였다. 그러면서 오른손에 쥐었던 칼을 다른 적장에게로 힘껏 던졌다. 순간, 불에 덴 듯 왼팔에 뜨끔한 통증이 왔다. 그와 동시에 그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자신을 느꼈다.

두충은 절벽으로 떨어지면서 자신의 오른손을 벗어난 칼이 적장의 가슴에 정통으로 꽂히는 걸 목격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목격한 그 장면을 기억에서 지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절벽으로 끝도 모르게 추락하면서 이를 악물고 기억의 끈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는 그 기억의 끈이야말로 바로 생명을 이어주는 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몸이 강물로 떨어지는 순간, 그는 깜빡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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