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실크로드 영웅 리더십] 반초(상)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3.08 11:3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랑이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라”

 

《후한서(後漢書)》〈서역전〉에는 ‘서역삼절삼통(西域三絶三通)’이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서기 25~56년) 때부터 안제(安帝, 서기 106~125년) 때까지 약 1백 년에 이르는 동안 서역과 세 번 단절되었다가 세 번 개통된 일을 지칭하는 말이다. 후한 초기에 흉노는 북흉노와 남흉노로 갈라져 서로 상반된 길을 가고 있었다. 대체적으로 남흉노는 후한에 대하여 종속적 관계를 취하였지만, 북흉노는 시시때때로 후한을 공격하여 결과적으로 서역과의 교류를 막는 방해꾼 노릇을 하였다.

 

반초는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班固)의 친동생이었다.(사진=나무위키 갈무리)

이때 후한에서는 북흉노 세력을 제거하고 서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반초(班超, 서기 32~102년)를 파견하였다. 그는 후한 초기의 무장으로 흉노 세력의 지배하에 있던 50여 개의 제국을 복종시켜 중원과 서역 간의 경제와 문화 교류를 촉진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반초는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班固)의 친동생이었다. 《한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이어 고대 중국 역사의 맥을 이어간 중요한 역사서로 알려져 있다. 반고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역사서를 집필하였던 것으로 보아 대대로 이어온 문관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문관 집안에서 태어난 반초는 빈한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형 반고가 교서랑(敎書郞)으로 임용되어 낙양으로 갈 때 그는 어머니와 함께 따갔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으므로 반초는 말직 문관이 되어 관아에서 문서를 베껴 쓰는 일로 힘겹게 살아갔다. 낙양으로 갈 때 이미 그의 나이 30세였으므로,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형 반고의 부양을 받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것이다. 그가 말직 문관이나마 된 것도 교서랑의 벼슬을 하는 형 덕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반초가 한 일은 궁중 도서관에서 주요 저서들을 사서(寫書)하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유교 경전인 경서(經書)나 역사서, 그리고 무술과 관련한 병법서 등을 사경하여 여러 사본을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그는 특히 주(周)나라 때 무제(武帝)의 스승 태공망(太公望)의 병법서 육도(六韜)나 한(漢)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의 책사 장자방(張子房) 장량(張良)의 스승으로 알려진 은둔거사 황석공(黃石公)의 삼략(三略), 춘추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전략가 오자(吳子)와 손자(孫子)의 병법서(兵法書) 등등 중국 고대의 무술 이론을 사경하고 틈틈이 실제 무술 훈련까지 익혀 문무를 겸한 병법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런 연후에 반초는 어느 날 문관에서 무관으로 전직할 것을 결심하였다. 문관은 가난을 면키 어려웠지만, 무관은 전쟁터에 나가 공훈만 세우면 크게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반초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대장부로서 지략이 없다면 어찌 부끄러워 죽어서 조상을 뵐 수 있을 것인가? 마땅히 부개자(傅介子)와 장건(張騫)을 본받아 이역(異域)에 가서 공을 세워 봉후(封侯)의 자리를 얻어야지 언제까지 붓과 벼루 사이에서 문서나 베껴 쓰고 있으랴.”

장건은 한나라 무제 때 두 차례의 서역 착공으로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졌고, 부개자는 소제(昭帝) 때 서역에 사신을 갔다가 한나라 사신단을 공격해 오던 누란국(樓蘭國)의 왕을 죽이고 돌아와서 의양후(義陽侯)가 된 인물이었다. 후한 시절에는 문무를 불문하고 두 사람 모두를 대표적인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반초가 말단 문관 벼슬을 버리고 자원하여 서역 파견 근무를 하는 무관으로 나서면서 외친 ‘붓을 던지고 무인이 되다’라는 뜻은 ‘투필종융(投筆從戎)’이란 사자성어로 후세에까지 남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문인 반초가 서역으로 가서 후한의 변경을 호시탐탐 노리며 주민들을 약탈하고 살상을 일삼는 흉노 세력을 토벌하겠다고 나서자 모두들 비웃었다. 영평 16년(73년) 원정군 수장인 두고(竇固)의 별장(別將)이 되어 서역으로 갈 때, 그는 자신을 향해 비웃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했다.

“소인배가 어찌 대장부의 깊은 뜻을 알겠는가?”

흉노 원정군을 이끌고 서역으로 진군한 봉거보위(奉車都尉) 두고는 북쪽의 천산(天山)에 은거한 흉노 세력을 크게 격퇴하였다. 이때 반초는 가사마(假司馬)가 되어 흉노를 무찌르는데 전공을 세웠고, 수장 두고의 신임을 얻어 종사(從事) 곽순(郭恂)과 함께 서역에 사자로 파견되었다.

반초가 후한의 사자 임무를 띠고 서역으로 가는 도중 타클라마칸 사막 동북쪽에 있는 선선국(鄯善國)에 도착했을 때였다. 선선국의 왕 광(廣)은 처음 후한의 사자가 왔을 때 잘 대해주었으나, 점차 시일이 경과되면서 냉담하게 대하였다.

이상하게 생각한 반초는 짐짓 그 이유를 다 알고 있는 듯이 왕의 거처를 찾아가 시종에게 야단을 쳤다. 그러자 당황한 시종이 때마침 흉노에서 사자가 왔는데 어느 편을 들기 곤란해진 왕이 눈치를 보며 망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선선국 입장에서 볼 때 흉노 세력은 가까우면서 사납고 후한은 멀지만 큰 나라였다.

그날 밤 반초는 사신단의 수하들을 모아놓고 술자리를 열어 사람들이 얼큰하게 취하게 만든 후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그대들이 이곳 사막의 나라까지 와서 고생을 하는 것은 큰 공을 세워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이 아닌가? 지금 흉노의 사자가 이곳에 와 있는데, 선선국 왕이 우리를 접대하는 것이 처음만 못하다. 이는 흉노 사자들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만약 저들이 우리를 흉노 세력에게 인질로 넘긴다면 이 사막에서 뼈도 못 추리고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는 잡을 수 있겠는가? 흉노 사자의 무리가 우리보다 훨씬 많으니 지금 쓸 수 있는 계책은 불을 놓는 일뿐이다. 지금 바람이 흉노 사자들이 묵고 있는 막사 쪽으로 불고 있지 않은가?”

반초의 이 같은 말에, 술 취한 수하들은 너도나도 호랑이굴로 뛰어들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불입호혈 부득호자(不入虎穴 不得虎子)’, 즉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새끼를 잡는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반초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달려가 바람 부는 방향에서 불을 놓아 수백을 헤아리는 흉노 사자들의 막사를 불태웠다. 이때 후한의 사자들은 막사에서 잠을 자다 말고 깜짝 놀라 갈팡질팡하며 뛰어나오는 흉노 사자들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 넘겼다.

마침내 흉노 사자들을 전멸시킨 반초는 그들의 우두머리 목을 들고 선선국 왕을 찾아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제 어찌하겠소?”

처음 선선국 왕은 당황한 얼굴로 눈만 꿈쩍거리며 벌벌 떨었다.

“사태를 이와 같이 만들어놓고 이제 어쩌자는 것이오?”

오히려 선선국 왕은 이렇게 반초에게 되물었다.

“이로써 선선국은 흉노와 적대 관계가 되었소. 우리나라는 대국이니, 선선국이 귀순한다면 흉노도 겁을 먹고 감히 덤비지 못할 것이오.”

이렇게 반초가 귀순을 강요하자, 선선국의 왕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항복했다. 이로서 서역으로 가는 길의 관문을 하나 열 수 있었다.

반초는 원정군 수장 두고에게 돌아와 선선국의 항복을 알렸고, 두고는 곧바로 황제에게 상서를 올렸다. 그러자 후한의 명제는 반초를 군사마(軍司馬)에 임명하여 서역으로 가는 사신단 정사로 삼았다. ‘가사마’는 임시로 원정군 수장 두고가 임명한 임시 직책이지만, ‘군사마’는 정식으로 황제가 내린 벼슬로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일선 총사령관격인 대장군(大將軍)의 지위였다.

반초가 군사마의 지위에 오르자 두고는 그의 수하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걱정하여 군사를 더 내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반초는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수하 기십 명만 이끌고 우전국(于闐國)으로 떠났다.

당시 우전국은 사차국(莎車國)을 격파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이때 흉노 세력은 이 나라와 결맹을 맺고자 사자를 파견하였다. 그 정보를 접하고 두고는 반초를 사신단으로 보내 우전국을 후한의 손아귀에 넣고자 한 것이었다.

이때 우전왕 광덕(廣德)은 사차국까지 접수하여 세력이 크게 강화되자 위세당당하게 후한의 사자로 파견된 반초를 얕잡아보았다. 가까운 곳에 흉노 세력이 있다는 것도 든든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우전국 왕 광덕은 무당에게서 반초가 타고 온 말이 준마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말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자 반초는 무당으로 하여금 직접 와서 말을 가져가라고 했다. 준마에 대한 욕심이 생긴 우전왕은 곧 무당을 보냈다.

그러자 반초는 무당의 목을 잘라 우전왕에게 보내 엄하게 질책하며 항복하라고 권유했다. 소문대로 반초가 선선국에서 흉노의 사신단을 몰살시킨 무서운 맹장임을 알게 된 우전왕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자국에 온 흉노의 사자까지 죽인 후 투항하였다.

 

반초의 서역 이동 경로(사진=나무위키 갈무리)

 

한편 그 무렵, 흉노와 결탁한 구자국(龜玆國)이 그 힘을 믿고 소륵국(疏勒國)을 점령하였다. 구자국은 자국 출신의 두제(兜題)를 소륵왕으로 삼았다. 이때 반초는 수하의 장수 전려(田廬)를 보내 두제를 인질로 삼았다. 소륵국은 후한에 귀순하였고, 반초는 전 소륵왕의 조카 충(忠)을 새로운 왕으로 삼았다.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의 고차(庫車: 쿠처) 지역에 웅거한 구자국은 주변 나라들 중 가장 강했다. 소륵국이 후한에 귀순한 후에도, 구자국은 호시탐탐 소륵국을 넘보았다. 반초가 새로운 왕을 세우고 소륵국을 떠나려고 하자, 그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렸다.

“한나라 사신이 떠나면 우린 곧 구차국에 점령당하고 말 것입니다. 제발 떠나지 말아주십시오.”

실제로 소륵국의 도위 여엄(黎揜)은 칼을 들어 자신의 목을 베기까지 하면서 반초가 남아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반초는 사신의 임무를 마쳤으므로 다시 후한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장안으로 귀환하기 위해 우전국에 도착했 때, 또 그 나라 사람들이 반초의 말을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였다.

결국 반초는 귀국을 포기하고 다시 소륵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사이 이미 구자국은 소륵국의 속국이 되어 있었다. 반초는 휘하에 거느린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가 구자국 군사 6백 명을 죽이고 소륵국을 되찾았다.

 

 

■ 실크로드의 역사

 

타림 분지와 타클라마칸 사막

 

타림 분지(Tarim)와 타클라마칸 사막(Taklamakan Desert)(사진=위키백과 갈무리)

 

한나라 장건이 서역착공을 한 이후에도 중원 제국들은 ‘사막의 바다’에 가로막혀 서역 여러 나라들과 교류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서역에서는 중국의 비단을 구하기 위해 ‘사막의 배’라는 낙타의 등에 특산품을 싣고, ‘죽음의 사막’이라 불리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왔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타림 분지의 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리고 타림 분지는 서쪽으로 파미르고원, 북쪽으로 천산산맥, 남쪽으로 곤륜산맥 등 고산준령에 둘러싸여 중원과 서역을 가로막고 있는 지역이었다. ‘타림’은 ‘물을 모으는 곳’이란 뜻으로, 주변의 만년설이 녹아 땅 밑으로 흘러 분지 곳곳에 오아시스 지대를 만들어놓고 있다. 이 오아시스 지대를 징검다리로 하여 서역의 대상들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중원까지 와서 물물교역을 했던 것이다. 타림 분지의 중앙에 있는 타클라마칸은 선사시대에 내륙호가 말라붙어 형성되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모래 둔덕으로 이루어진 ‘죽음의 사막’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른바 ‘사막의 바다’라고 할 만큼 모래 둔덕들이 마치 파도의 출렁임처럼 구불거리며 펼쳐져 있는데, 그 모래의 파도 위를 ‘사막의 배’라는 낙타에 특산물을 싣고 서역 대상들이 목숨을 걸고 중원까지 내왕했던 것이다.

이처럼 목숨을 건 서역 대상들의 목적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적극적인 상행위에 있었지만, 중원 제국들 입장에서 보면 앉은자리에서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조금은 안이하고 수구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사막과 험산준령이 가로막고 있어 서역까지 왕래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래도록 서북방의 흉노와 적대 적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던 중원 제국들로서는, 그들이 서역과의 소통에 큰 장벽이 되었던 것이다. 한나라 때 서역착공의 영웅으로 알려진 장건도 흉노에게 두 번씩이나 사로잡혀 장기간 인질이 되어 있었다. 그 이후 흉노 세력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서북방 곳곳에서 느닷없이 돌출하는 형국을 보임으로써 중원 제국의 서역사행을 막았다.

타림 분지를 중심으로 하여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에는 흉노를 위시하여 구자국·언기국(焉耆國)·선선국(鄯善國) 등이 있었다. 그리고 타클라마칸 남쪽으로는 우전국과 남서쪽으로는 소륵국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이들 국가들은 모두 오아시스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소륵국에서 더 서쪽으로 가면 오손국(烏孫國)·대원국(大元國)·강거국(康居國)·대월지국(大月氏國) 등 서역 국가들이 줄줄이 포진하고 있었다.

 

 

■ 포연을 뚫고 군수물자를 판 한국의 종합상사맨들     

 

전쟁터는 글로벌 시장의 최전선이다    

 

실크로드의 영웅 반초가 강조한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는 말이야말로 오늘날 글로벌 시장에서 되새겨야 할 경제 금언이 아닐 수 없다. 글로벌 시장이 된 현대는 경제 전쟁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날에는 영토 때문에 국가 간에 전쟁이 자주 벌어졌지만,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어느 나라든 먼저 들어가 시장 패권을 잡는 기업을 일러 ‘다국적 기업’이라고 할 정도로 ‘경제 영토’가 더욱 중요해졌다.

다국적 기업들의 경우 국적도, 국가 간의 경계도 불분명한 것이 글로벌 경제의 시장 구조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그들이 노리는 것은 기술 경쟁력 제고와 저렴한 생산단가로 소비자들에게 질 좋으면서 싼 가격에 제품을 판매하는 데 있다. 따라서 브랜드 1위 기업이 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기업들은 다투어 R&D 분야에 적극 투자하고, 값싼 노동력을 찾아 제3국에 새롭게 공장을 세워 제품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들은 해외 공장 건설과 함께 영업망도 갖추어 현지 생산 제품을 그 주변국으로 수출, 본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긴 항해를 무릅쓰고 배로 실어 나르던 물류비를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해외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판매 수익은 다국적 기업의 몫이지만, 그로 인해 발생되는 세금은 현지공장이 있는 국가에 낼 수밖에 없다. 현지 노동력을 활용하는 대가로 임금을 지불하고, 판매 수입에 따른 세금을 내기 때문에 다국적 기업의 해외공장을 유치한 국가의 경우 취업률 상승과 국고 향상으로,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기업들 중 삼성전자·LG전자 등은 러시아에 현지공장을 건설하여,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에서 독립한 동유럽 국가들을 대상으로 수출 전략을 펼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문학상을 후원할 정도로 문화 마케팅에도 노력을 기울여, 러시아인 중에서는 삼성전자를 자국의 기업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한국 기업들이 이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드라이브 정책으로 해외무역을 통한 외화수입의 극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부터였다. 제품은 기업들마다 큰 공장을 갖추어 생산해내지만, 해외수출은 그룹마다 우후죽순 생겨난 종합상사들이 주도해나갔다. 당시만 해도 해외에 나가기가 힘든 서절에 종합상사맨은 전 세계를 누비는 ‘현대판 노마드’라고 할 수 있었다.

한국에 종합상사가 탄생한 것은 삼성그룹의 무역회사인 ‘삼성물산’이 최초였다. 바로 그 뒤를 현대그룹의 ‘현대종합상사’가 수출 전선에 뛰어들면서 두 회사가 무역회사로서 쌍벽을 이루며 수출액 순위경쟁을 다투었다.

당시 ‘종합상사’라고 하면 ‘라면에서 미사일까지’, ‘이쑤시개에서 인공위성까지’, ‘바늘에서 비행기까지’ 등등으로 표현될 정도로 수출 가능한 모든 품목을 취급하였다. 삼성물산의 경우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수천 가지 취급 품목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발과 편물로 짠 스웨터 종류였다. 당시 삼성물산의 한 해 편물 제품 수출량을 한군데 쌓아놓으면 남산만한 높이가 될 것이라는 말들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현대종합상사는 수출 품목이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단지 현대조선소에서 선박을 수주할 경우 수출액에 가산되면서 삼성물산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러한 경쟁구도 속에서 해외에 파견된 한국의 상사맨들은 전쟁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중동에선 자주 전쟁이 일어나곤 했는데, 세계 각국에선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그 나라에 나가 있는 국민이나 대사관 직월들을 긴급히 철수시키곤 했다. 그러나 한국의 상사맨들은 철수하지 않고 있다가 전쟁이 터지면 포연 속을 누비면서 군수품 거래를 위하여 불철주야로 뛰었다. 다른 나라 상사맨들이 다 철수한 뒤였으므로 한국 상사맨들은 군수품 거래를 독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 것처럼, 한국의 상사맨들은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비며 외화벌이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한 상사맨으로서의 정신은 오늘날 한국을 세계 10위의 경제 강국에 드는 선진국 대열로 올라서게 만든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상사맨 마인드는 저 옛날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을 ‘사막의 배’ 낙타로 건넌 서역 대상들의 필사적인 상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