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순풍과 역풍-6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3.07 10:5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6. 기만전술

 

고구려군 선봉장 연수는 평양성 군사들을 길잡이로 삼아 1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수곡성 인근에 이르렀다. 야트막한 산 하나만 넘으면 너른 들판이 나오고, 그 들판 끝에 높다란 성벽의 수곡성이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희게 보이는 화강암 성벽 위로 황색 깃발들이 나부끼는 가운데, 공성전투에 대비한 백제 방어군의 기세가 자못 날카로웠다.

척후의 보고에 의하면 수곡성을 지키는 백제군은 불과 5천 정도라고 했다. 1만 5천대 5천이면 싸워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여건이지만, 적이 맞서 싸우지 않고 성 안에서 농성을 한다면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무조건 서둘러 공성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아군의 피해가 너무 크다는 것이 선봉장 연수의 생각이었다.

원정에 나설 때부터 대왕 사유는 선봉대가 지름길로 진군하여 곧바로 수곡성을 공격하길 원했다. 그러나 연수의 생각은 달랐다. 적이 농성을 작정했을 경우 10배의 많은 군사로 공성전투를 벌여도 이기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성주로 있는 신성을 비롯하여 서북방 변경의 고구려 성들도 적들이 공격해오면 거의 농성으로 성을 굳건히 지켜냈다. 적들이 현지에서 군량미를 확보하지 못하게 들판의 곡식을 모두 불살라버리고, 백성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곡간을 털어 식량을 짊어지고 산성으로 들어가 농성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른바 들판을 깨끗이 청소한다는 의미에서, 이를 청야작전(淸野作戰)이라 불렀다.

 

팔각기둥, 쌍영총(雙楹塚) 앞방과 널방사이

 

그러나 연수는 대왕 사유의 명을 어길 수 없었다. 어떤 전략을 짜든 속전속결로 수곡성을 공략하는 길밖에 없었다.

“장군! 무조건 쳐들어갑시다. 단숨에 쳐서 적의 예봉을 꺾어놓아야 겁을 먹고 달아날 것 아닙니까?”

말갈족 추장 걸구금척(乞句金尺)은 그러면서 자신을 수곡성 공격의 선봉에 세워달라고 간청했다.

“적이 5천 병력밖에 안 된다면 공성 전투를 벌일 만합니다.”

동부에서 군사 1천을 이끌고 온 두충도 선봉에 나서겠다고 자원했다.

“이렇게 장수들이 서로 선봉에 서겠다고 앞을 다투니 고맙소이다. 그러나 일단 성을 굳게 지키는 적들을 끌어내기 위한 유인작전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오. 먼저 걸구금척과 두충, 두 장군은 휘하 부대를 이끌고 나가 적을 유인토록 하시오. 만약 적들이 아군을 얕잡아보고 성문을 열고 나오면, 그때 두 부대는 맞서 싸우는 척하다 후퇴하면서 좌우로 갈라서도록 하시오. 이때를 기다렸다 개마무사들이 이끄는 기마대를 출동시켜 단숨에 적을 궤멸시키는 작전을 구사할 것이오. 기마대의 급습으로 적들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전군이 공격을 개시하면 쉽게 성을 함락시킬 수 있소.”

이렇게 말했지만 선봉장 연수는 원정을 떠날 때부터 생각해둔 이 작전에 대하여 그다지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농성을 결심한 적이라면 함부로 성문을 열고 나와 맞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적들이 아군의 유인작전에 속아 성문을 열고 나오기만 한다면, 기동력을 이용한 기마대의 급습으로 충분히 승산 있는 싸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대왕 사유의 명을 어기지 않고 적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육지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말갈부대와 동부 군사들로 구성된 선봉대는 먼저 야산을 넘고 들판을 가로질러 수곡성 앞에 당도했다. 성 앞까지 질주하듯 달려가던 고구려군은 성루에서 화살이 날아오자 방패로 막으며 일단 주춤거리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걸구금척이 이끄는 말갈부대는 불과 5백이지만, 태백산과 개마고원의 험한 산세에서 사냥으로 단련된 군사들이라 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호랑이나 곰 등 야생 짐승들을 때려잡던 담력이므로, 사람을 상대로 하는 전쟁은 식은 죽 먹기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사나운 짐승들과 힘겨루기를 하다 보니 그들도 야생에 가까운 기질로 변해 있었다.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그만 치고 들어갑시다.”

걸구금척은 도무지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먹거렸다. 말갈족은 고구려의 보호를 받으면서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그 서두름 속에는 어떻게 해서든 공을 세워 인정을 받겠다는 심리가 깔려 있었다.       

“연수 장군의 명도 있고 하니, 일단 적정부터 살펴보도록 합시다.”

동부 군사를 이끄는 두충은 결코 서두를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고구려 군사들은 백제군의 날아오는 화살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마구 야유를 퍼부었다. 성문을 열고 나와 정정당당하게 맞서 싸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제군은 성루에서 가끔 화살만 날릴 뿐 조용히 고구려 군사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에이 못 참겠다! 시방 저 겁쟁이 놈들하고 말싸움이나 하자는 겁니까? 얘들아, 지금 당장 공격하자. 사다리와 운제를 앞세우고 달려가 성벽을 기어오르자.”

걸구금척은 말갈부대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두충도 휘하 군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말갈부대만 먼저 내보냈다가는 적에게 기습을 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루를 지키는 백제군의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성벽 전방에 촘촘하게 세워놓은 사녹채(死鹿砦)를 넘다 화살을 맞아 쓰러지는 고구려 군사들이 속출했다. 새카맣게 하늘을 덮으며 날아오는 화살 앞에서는 방패도 속수무책이었다.    

“퇴각하라!”

두충은 징을 울려 고구려 군사들을 뒤로 물렸다. 할 수 없이 말갈부대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고구려 선봉대는 서너 번에 걸쳐 돌격과 후퇴를 거듭했다. 이 또한 작전상 적을 성 밖으로 유인하기 위한 허허실실 전략이었다.

한편 백제 장군 막고해는 성루에서 고구려 군대가 돌격과 후퇴를 감행하는 것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1만 5천의 병력이 선봉군이라는데, 불과 1천 5백의 군사로 장난을 치고 있는 거냐? 분명 공성전투로는 승산이 없으니까, 우리 군을 유인해내려는 작전이겠지. 그래 너희들 작전대로 속아주마.’

막고해는 고구려 군사들이 지칠 때까지 놔두었다가 백제 군사들을 이끌고 기습을 하듯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기로 했다. 군사 3천을 동원시켜 고구려군과 맞서되, 후퇴를 알리는 징이 울리면 1천은 성문 안으로, 나머지 2천은 성 밖 좌우로 갈라져 도망치는 작전을 구사하라고 휘하 장수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나머지 성안의 2천 군사는 성루를 굳게 지키는 척하다가 성 밖으로 나간 백제군이 후퇴할 때를 기다려 고구려군 복장을 한 1백여 군사만 놔두고 동문을 통해 빠져나가도록 했다. 그리하여 강변에 미리 대기시켜둔 배를 타고 패하를 건너 도망치는 척하면 고구려군도 깜빡 속아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도망칠 때 오합지졸처럼 보이도록 위장해야 한다. 절대 고구려군과 맞서 싸우면 안 된다. 사상자를 최대한 줄여야만 나중에 다시 성을 되찾을 수 있다. 알겠는가?”

백제 장군 막고해는 성문을 나서기 전에 휘하 군사들에게 일갈했다.

드디어 수곡성의 북문이 열렸다. 3천의 군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자, 고구려 선봉군은 당황했다.

“침착하라. 백잔들과 맞서는 척하다가 후퇴하라는 징이 울리면 군대를 좌우로 물려 중앙으로 우리 기마대가 돌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

두충은 다시 한 번 군사들에게 작전지시를 내렸다.

백제군의 공격은 만만치 않았고, 고구려군도 격하게 몰아붙였다. 수곡성 앞 들판에서 일대 백병전이 벌어졌다. 백제군이 3천인데 반해 말갈군과 동부군으로 이루어진 고구려 선봉의 공격부대 1천 5백은 중과부적이었다. 서서히 고구려군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두충은 징을 울려 고구려군에게 후퇴명령을 내렸다. 그것을 신호로 고구려군은 좌우로 갈라지면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때 둔덕 너머에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 기마대 5백 기가 질풍처럼 백제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 뒤를 이어 보병 1만 3천이 밀물처럼 밀어붙이고 들어와 수곡성 앞 들판을 가득 메웠다.

“후퇴하라!”

백제 장군 막고해도 징을 울려 군사들을 흩어지게 했다. 묘하게도 방금 고구려 선봉의 군대가 둘로 갈라지듯 백제군도 좌우로 갈라져 도망치기 시작했고, 고구려 기마대를 정면으로 맞은 가운데 일부 병력만 성문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성문은 좁았고, 추격하는 고구려 기마대는 빨랐다. 그래서 미처 성문으로 들어가지 못한 백제군은 말발굽 아래 무참하게 짓밟혔다.

“사정을 두지 말고 닥치는 대로 도륙하라!”

말을 탄 개마무사들은 칼과 창을 휘둘러 백제군을 마구잡이로 베고 찔렀다. 말의 머리뿐만 아니라 몸에도 갑옷을 입힌 고구려 기마들은 쓰러지는 백제군을 짓밟으며 성문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다급한 나머지 백제군은 미처 성문을 닫을 겨를도 없이 고구려 기마대에게 추격당했다. 기마대가 성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그 뒤를 따라 고구려 보병들이 성안으로 몰려들었다. 성문이 좁아 미처 입성하지 못한 고구려 군사들은 사다리와 운제를 걸치고 성벽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성루를 지키던 백제군들도 혼비백산하여 동문 쪽으로 달아났다. 막고해의 작전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고구려 기마대에 일부 병력이 짓밟혀 생명을 잃었지만, 적을 속이는 기만전술을 위해서는 그만큼의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예상했던 것보다 손쉽게 수곡성을 탈취한 고구려군은 사기충천해 있었다. 남쪽 패하가 내려다보이는 성루에서 갈팡질팡하면서 도강하는 백제의 패잔병들을 바라보며, 고구려 선봉군을 이끌고 있는 장군 연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곧 중군을 이끌고 오는 대왕 사유에게 수곡성 탈환 소식을 전할 전령병을 불렀다.

“지금쯤 우리 고구려의 중군은 서홍천변을 따라 진군하고 있을 것이다. 대왕 폐하께 수곡성 전투의 승전 소식을 전하라.”

연수는 중군과 후군이 도착하면 고구려 군사를 합쳐 총공격을 감행, 2년 전 고구려가 백제에게 대패한 바 있는 치양성까지 회복할 생각이었다.

저작권자 © 미디어피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