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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소설 광개토태왕] 순풍과 역풍-4

엄광용 전문 기자
  • 입력 2022.02.0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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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꿈 제1부
광야에 부는 바람 제1권
흙비 내리는 평양성

4. 밀정의 정체

 

패하 북변 언덕 위에 높다랗게 솟아오른 수곡성은 강가의 남쪽 방향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요새였다. 그리고 동서북 3면으로는 높다랗게 석성을 쌓아올려 제법 웅장한 위용을 자랑했다. 성 양편에 깊은 계곡을 끼고 있는 데다 패하를 뒤로 하여 강변의 언덕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북쪽으로 열려 있는 너른 들판을 굽어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따라서 성루에서 바라보면 시야가 확 트인 3면의 너른 들판이 한 눈에 들어와 경계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미 고구려 원정군이 수곡성을 치기 위해 군사를 모으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백제 대왕 구(句)는 직접 군사 1만을 출동시켰다. 태자 수(須)는 2년 전 치양 전투 때 크게 반격하여 패하의 요새인 고구려의 수곡성까지 점령한 명장이었지만, 이번에는 정사를 직접 익히게 할 겸 한성(漢城)에 남겨두었다. 신라와는 서로 사신이 오갈 정도로 상호 우호적인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대왕과 태자가 모두 도성을 비워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태자가 먼저 수곡성을 지키기 위해 떠나겠다고 자원했지만, 대왕 구는 이번 기회에 고구려 대왕 사유와 전면전을 치러보고 싶었다. 내심 고구려군의 힘을 몸으로 느껴보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한성의 군사 1만을 이끌고 수곡성에 입성한 대왕 구는, 다시 성벽을 정비하고 군사들을 조련시키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고구려 원정군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2년 전에는 고구려군이 2만의 병력으로 치양성을 쳤으나, 이번에는 원정군이 3만의 대군이라는 정보가 있어 피아간에 만만치 않은 전투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백제는 전쟁에 대비하여 고구려 곳곳에 밀정을 보내 수시로 각종 정보를 접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패하로부터 안개가 피어올라 성곽을 구름처럼 에워싸던 어느 날 새벽, 수곡성을 향하여 급히 달려오는 준마가 한 필 있었다. 말 위에 탄 사내는 고구려군 복장이었으나, 등에 흰 깃발을 꽂고 있었다. 높이 솟은 수곡성의 누각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제 군사 하나가 급히 대왕 구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사냥, 약수리 벽화고분(藥水里壁畵墳) 앞방 서벽, 남벽(모사도), 한성백제박물관

 

“폐하, 고구려에서 사자가 왔습니다. 헌데 등에 백기를 꽂고 있습니다.”

“무엇이? 전쟁도 하기 전에 사자를 보낼 리는 없고, 백기라니?”

의아하게 생각한 대왕 구는 장군 막고해(莫古解)에게 사실 확인을 해보라고 일렀다.

급히 성루로 달려간 막고해가 바라보니 성문 앞에 당도한 것은 태자 수가 파견한 밀정이었다. 그는 바로 고구려에서 두충의 말구종 노릇을 하던 사기였는데, 밤낮으로 말을 달려온 듯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로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땅바닥에 그대로 엎어졌다.

날이 이미 환하게 밝았으므로 막고해는 육안으로도 그가 곧 사기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자는 우리 백제의 밀정이다. 어서 이곳으로 데려오너라.”

막고해의 명을 받은 졸개 하나가 급히 성문을 열고 나가 사기를 부축하여 성루로 데려왔다.

“장군! 사기,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도, 돌아왔나이다.”

허기가 져 눈자위까지 움푹 들어간 사기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한 말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겨우 말을 새겨들을 수 있을 정도로 메말랐고, 혀가 갈라진 듯 발음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막고해가 졸개에게 명령했다.

“이 자에게 물을 갖다 주거라.”

졸개가 물을 한 바가지 갖다 주자 사기는 벌컥벌컥 들이켰다. 거의 한 바가지 물을 다 마시고 나서 겨우 정신을 차린 듯, 게게 풀렸던 그의 눈동자가 점차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 장군!”

사기가 새로 가져온 정보를 전하려고 했다.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 이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한 후 내 처소로 다시 데려오도록 하라.”

막고해는 먼저 성큼성큼 걸어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원래 사기는 백제 왕궁에서 국용마(國用馬)를 기르던 말먹이꾼이었다. 그는 말을 잘 기르기로 유명했는데, 특히 말발굽 가는 데는 명수로 알려져 있었다. 원숭이도 나무 위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그는 어느 날 태자 수가 타는 말의 발굽을 갈다가 그만 큰 상처를 입혔다. 태자 수의 애마는 털빛깔이 눈처럼 흰 명마였다. 말이 발굽에 상처를 입으면 제대로 달리지 못하니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사기는 그 즉시 백제의 국경을 벗어나 고구려 땅으로 도망쳤다. 압록강 중류 하가촌의 종마장으로 흘러든 그는, 자신을 고구려 출신이라고 속인 후 그곳에서 말먹이꾼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2년 전 대왕 사유가 백제를 치기 위해 고구려 원정군을 출정시킬 때, 하대용이 보낸 말 1백 두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아 출전하게 되었다.

이때 사기는 고구려 원정군에서 몰래 탈출하여 태자 수가 이끄는 백제군에게 투항했다. 그는 태자 수와 장군 막고해 앞에 나가 자신이 전날 백마의 말발굽에 상처를 입힌 말먹이꾼임을 고백하고 나서 사죄를 청했다.

“진정 네가 내 애마에게 상처를 입힌 그 말먹이꾼이더냐? 그런데 어찌 고구려군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이냐?”

태가 수는 무서운 눈으로 사기를 쳐다보았다.

“네, 그러하옵니다. 백마에게 상처를 입힌 후 고구려로 도망쳐 말먹이꾼 노릇을 하다가 이번에 고구려 원정군에 차출되어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소인은 백제인으로서 더 이상 고구려인 행세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탈출해 이렇게 태자 전하께 백배사죄를 청하는 것이옵니다.”

“허면 네놈이 그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선물을 가지고 온 것이렷다?”

태자 수는 사기의 당당한 모습에서 이미 그 속내를 짐작하고 있었다.

“네, 그러하옵니다.”

“어서 말해 보거라. 적의 군세는 어떠하더냐?”

장군 막고해가 귀를 세우고 물었다.

“지금 적은 2만 대군이옵니다. 허나 머릿수만 채웠지 급히 모병한 오합지졸들이 대부분이옵니다. 고구려 군사들 중에서 날래고 용감한 부대는 붉은 깃발을 들고 있는 무리뿐이오니, 그들을 먼저 깨부수면 나머지 군사들은 저절로 무너질 것이옵니다.”

태자 수는 사기의 말을 믿었다.

그 날 밤, 태자 수는 장군 막고해와 함께 비밀리에 전략회의를 열었다.

먼저 태자 수가 물었다.

“장군, 사기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의 눈빛으로 보아 사실이 분명합니다. 사기로서는 목숨을 건 모험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그러하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할 것 같소?”

막고해는 대장군을 맡고 있는 태자 수의 군사(軍師)로 지략이 뛰어났다.

“적은 원정길에 지친 몸입니다. 내일 새벽을 기해 기습공격을 하여 적의 예봉을 꺾어야 할 것이옵니다. 사기의 말에 의하면 붉은 깃발을 든 부대가 고구려의 정예군인 모양인데, 그들만 먼저 제압하면 아군은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생각도 그러하오.”

다음날 새벽은 안개가 짙었다. 태자 수는 장군 막고해와 함께 백제군을 이끌고 안개 속으로 뚫고 나가 붉은 깃발을 세운 고구려군 막사를 일격에 짓밟았다. 그러자 사기의 말처럼 나머지 고구려 정예군은 초전에 박살이 났고, 나머지 군사들도 겁을 집어먹고 쫓겨 달아나기에 바빴다. 백제군은 이에 사기충천하여 북진을 계속해 패하를 건너 수곡성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수곡성에 입성한 후 태자 수가 계속 후퇴하는 고구려군을 추격하려고 하자, 장군 막고해가 충언했다.

“태자 전하! 여기서 진격을 멈추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일찍이 도가(道家)에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미 얻은 바가 많은데, 어찌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려고 하십니까?”

이 같은 막고해의 말을 태자 수는 바로 알아들었다.

“장군의 말이 맞소. 전쟁에서 과욕은 금물이지. 여기쯤에서 추격을 멈추고 돌로 비석을 세워 백제가 고구려를 무찔렀다는 표지(標識)를 새기도록 합시다.”

백제군은 수곡성 서북 방면 길목의 말발굽처럼 틈이 난 암석에 글을 새겨 비석을 세웠다. 이때 백제군이 사로잡은 고구려 포로만 5천이었다.

이렇게 2년 전의 기억을 되새기며 처소로 돌아온 막고해는, 이번에도 어쩌면 사기에게 큰 기대를 걸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따라서 그는 대왕 구에게 보고하기 전에 사기가 어떤 정보를 가지고 왔는지 들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막고해가 국내성과 평양성에 보냈던 밀정들의 보고에 의하면 이번 전투에 출정한 고구려 원정군은 3만이라고 했다. 지금 수곡성에 있는 백제군은 1만 5천밖에 안 되었다. 그래서 농성을 하기 위해 성벽을 고치고, 군량을 비축하고, 우물을 파서 식수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식수 문제는 오랜 가뭄으로 인하여 해결하기 쉽지 않았다. 땅을 깊이 파도 샘물이 시원스럽게 펑펑 솟아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농성이 쉽지 않을 거야.’

막고해는 식수 해결을 위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아 며칠째 고심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막고해의 처소로 졸개가 사기를 대동하고 들어섰다.

“그래, 요기는 좀 했느냐?”

막고해는 사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백지장 같았던 얼굴에 핏기가 돌아와 있었다.

“예, 장군!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고구려군에서 탈출해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오다 보니 곡기를 채울 시간도 없었사옵니다.”

“그랬을 테지. 일각이 급하니, 그대가 가져온 보따리부터 끌러보게.”

막고해가 다그쳤다.

“네! 고구려 원정군은 총 3만.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거치면서 두 갈래 길로 이곳 수곡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습니다.”

사기는 고구려군에 속해 있을 때 얻어들은 정보들을 쏟아냈다. 선봉군 대장 연수의 휘하 장수 두충에게서 들은 정보이므로 정확하다고 할 수 있었다.

“흐음, 선봉군이 평양성 군사들을 길잡이로 앞세워 지름길로 진군하고 있다? 더구나 잘 조련된 기마대 5백 기를 위시하여 말갈족을 포함해 변방을 지키던 정예 군사들로 이루어진 선봉군이 1만 5천이라고?”

막고해는 방금 사기의 입에서 뱉어진 말들을 다시 정리하여 되물었다. 작전상 정확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네, 선봉군만 평양성 군사까지 도합 1만 5천의 군세입니다. 그러나 비교적 진군하기 좋은 평탄한 길로 우회하는 대왕 사유가 이끄는 중군의 경우, 국내성의 중부 군사들 3천을 빼면 나머지는 급하게 모병한 농민군들이 대부분입니다. 군복을 입혔지만 전쟁에 처음 참가하는 핫바지들이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압록강을 건널 때도 그 핫바지들이 겁을 먹고 강물에 빠진 척 뛰어들어, 도망쳐버린 놈들이 허다했습니다.”

사기도 도강할 때 일부러 강물에 빠진 척하여 헤엄을 쳐서 고구려군에서 탈출했노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후군은 5천으로 군량과 건초를 실은 수레를 이끄는 보급부대와 경계병들이라 했으렷다?”

“네, 후군 역시 중군 뒤를 따라 우회로를 이용해 진군하고 있습니다.”

“이제 폐하를 만나러 갈 것이니, 지금 한 내용을 한 치도 틀림없이 그대로 보고토록 하라. 단 이 정보는 너와 나만이 아는 사실이다. 폐하에게 직접 보고를 한 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막고해는 사기에게 단단히 이르고 나서, 대왕 구를 만나러 가기 전에 몰래 고구려 원정군이 진군하는 두 길로 척후병들을 내보냈다. 이들 척후병들을 두 파로 나누어 각기 적군이 접근하는 길목들을 지키게 하여, 그때그때의 적정 상황을 신속하게 보고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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